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⑫ 돌

십장생 중 하나인 돌은 동아시아 문인화가들에게
사랑 받는 소재였다. 일찍부터 여러 작품에 소품처럼 등장한 돌이
독립적인 화과로 발전하기까지의 양상을 자세히 살펴본다.

글 이원복(미술사가)


한자문화권에서 돌은 불변不變과 강건剛健, 나아가 장수長壽를 의미한다. 상형문자인 한자 ‘석石’의 글자 모습이 보여주듯 돌은 경사진 절벽에서 떨어진 형태이다. 긴 세월의 흐름에 부피가 작아지면 바위에서 돌, 그리고 모래로 바뀐다. 십장생으로 불리는 열 가지 상징은 해·산·구름·물 넷에, 두루미[鶴]·거북·사슴으로 동물 셋, 소나무와 불로초[靈芝]로 식물 둘, 나아가 광물인 돌이 포함된다. 이들을 함께 그린 것이 <10장생도>로, 조선시대 제도권에 속한 화원들이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나, 궁궐의 장엄과 치장 목적으로 그린 병풍과 벽화 등 화려하고 섬세한 필치의 대작 장식화들이 여럿 전해진다. 한편 돌은 그림 장르에 무관하게 화면 한 모퉁이에 일찍부터 줄기차게 등장했다.

(왼쪽부터)
도2-1 <괴석도>, 정선, 종이에 수묵, 23×21cm, 개인 소장
도2-2 <괴석도>, 최북(1712~1786이후), 종이에 수묵담채, 21x23cm, 부산박물관 소장
도2-3 <괴석도>, 강세황(1713~1791), 1789년, 종이에 수묵, 28.5×18cm, 일민미술관 소장

동아시아의 돌에 대한 각별한 애정 – 수석壽石과 원장배석元章拜石

산수화를 탄생시킨 동아시아에서 기묘한 돌[기석奇石·괴석怪石]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환상적이고 구멍이 숭숭 난 기묘한 태호석太湖石이 중심인 중국의 원림園林, 잔돌을 비로 쓸어 펼친 일본의 석정石庭, 인공을 배제하고 자연을 아우른 조선의 정원 등 비록 정원의 양식과 미감은 국가별로 다르나, 삼국이 공유한 수석壽石의 존재와 더불어 하나같이 돌에 대한 애정을 기저로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화면에 돌이 일찍부터 등장한다.
조선 말 괴석도로 명성이 큰 정학교(丁鶴喬, 1832~1914)의 <송무석수도>에선 돌과 소나무가 같은 비중으로도 등장한다(도1). 이에 앞서 정선(鄭敾, 1676-1759)과 최북(崔北, 1712-1786 이후), 그리고 강세황(姜世晃, 18713-1791) 등의 <괴석도>에선 주연인 양 돌만 홀로 그려졌다(도2-1, 도2-2, 도2-3). 19세기 이후, 회갑을 맞은 벗이나 지인을 경축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서화첩에 등장한 ‘석수만년石壽萬年’ 또는 ‘수동금석壽同金石’ 등 화제와 그림은 같은 맥락이다.
중국에서도 비교적 시대가 올라가는 현존 그림으로 당대唐代 인물화의 배경에 돌이 나타나니 당 말기에 활동한 손위(孫位, 9세기 말)의 <칠현도>는 중국 위魏·진晉 때 권력을 등지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소일한 일곱 은사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담은 것이다. 화면이 잘려 단지 4명만 보이는데 화면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작은 키에 가장 술을 잘 마신 유령(劉伶, 221-300)이다(도3). 송 이후 독립된 화과로 발전한다.


(왼쪽) 도3 <칠현도>(부분), 손위(9세기), 비단에 채색, 45.2×168.7cm, 중국 상해박물관 소장
(오른쪽) 도4 <원장배석도>, 유숙(1827~1873), 1709년, 종이에 수묵담채, 115.5×47.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돌과 관련된 인물로 송宋 서화가 미불(米芾, 1051-1107)을 들게 된다. 그는 기이한 돌을 만나면 석형石兄이라 부르고 절을 했으며 벼루도 수집했다. <원장배석도元章拜石圖>(도4)나 <미불배석도米芾拜石圖>로 불리는 그림은 중국과 조선에서도 빈번히 그려졌다. 조선 말 유숙(劉淑, 1827-1873)도 걸작을 남겼다. 고사 인물화 중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는 북송 영종英宗의 부마 왕선(王詵, 1048-1104)이 자기 집 정원인 서원西園에 유명한 시인묵객 15-16명을 초대해 연 아회雅會를 그린 일종의 기록화이다. 담소와 주연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한 인물 중 석벽에 시를 쓰는 이가 미불이다. 명明에선 구영(仇英, 1494-1552), 조선에선 김홍도(金弘道, 1745-1806경)의 걸작이 전한다.
예술, 특히 조형미술은 자연의 모방에서 비롯하니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함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자연에 대한 각별한 공경과 애정을 지닌 자연관自然觀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회화에서 가장 빛나는 영역은 산수화이다. 대자연의 웅혼하고 감동적이며 아름다운 풍광을 상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실제 경치를 화폭에 옮김에서 비롯한다. 서양의 풍경화보다 5백 년 앞서며, 실경산수에서 비롯했으나 점차 이상화된 풍광을 그린, 서양의 추상과는 다른 정형산수定型山水로 발전한다. 정형산수는 관념산수觀念山水라고도 불리며 보편적인 국제양식으로 한·중·일 삼국이 공유한다.
산수화에는 산과 물이 빠질 수 없으니 산세 표현에 있어 여러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기법인 준법皴法이 탄생한다. 중국 청대 1627년 간행된 《십죽재화보十竹齋畫譜》와 17세기 말 발간한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 내 석보石譜나 산석보山石譜 등이 중국은 물론 조선과 일본 화단의 괴석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도5 <송석도>, 홍인(1610~1663), 종이에 수묵, 29.5×22cm, 중국 천진시예술박물관 소장
도6 <삼석도>, 고기패(1672~1734), 1709년, 종이에 수묵, 31×60cm, 중국 심양고궁박물관 소장
도7 <괴석도>, 오카모토 도요히코(1773~1845), 종이에 수묵, 31.5×45.5cm, 호림박물관 소장

중국과 일본의 괴석도 – 독립된 주제로 국제적 보편성

일찍 돌을 천지의 뼈로, 물을 피로 인식한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산수화뿐 아니라 돌은 고사 인물화의 배경 외에 사군자·미인·화훼초충·기명절지·어해도 등 모든 장르와 자연스레 어울린다. 시대와 관계없이 줄기차게 화면에 등장하나, 거침없이 활달하고 비범과 기개로 옹졸하지 않은 독립된 주제로 즐겨 그려지게 되었다. 주로 문인들의 묵희墨戱로 조선후기에 이르러야 일반화를 보이며 근대로 이어진다.
청대 홍인(弘仁, 1610-1663)의 <송석도松石圖>와 고기패(高其佩, 1672-1734)의 <삼석도三石圖>는 각기 8폭 화첩에 속한 것들로, 비교적 단순한 구성이나 독자적 필치에서 개성미가 돋보이는 수작들이다. 황산黃山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즐겨 화폭에 담은 홍인의 <송석도>는 전술한 정학교의 <송무석수도>처럼 바위에 뱀처럼 감긴 소나무가 화면 내 같은 비중을 드러낸다(도5). 지두화로 유명하고 문인들이 크게 선호한 고기패는 비록 여린 풀이 보이나 돌만이 주인공인 점에서 주목된다(도6). 이 같은 양상은 조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근대 20세기 초에 활약한 황정계黃廷桂 그림은 국내에도 몇 점 전한다.
일본의 경우는 국내에서 2018년 봄 호림박물관 소장 ‘일본 회화의 거장들’ 특별전을 통해 오카모토 도요히코(岡本風彦, 1773-1845)의 <괴석도>가 공개되었다. 중국과 서양화풍을 아우르며 산뜻하며 정갈한 분위기에 부드러운 붓놀림과 먹의 선염효과로 18세기 교토에서 명성이 큰 마루야마-시죠파[圓山四條派]의 진하고 옅은 먹의 농담 조화가 보이는 ‘쓰케타테 기법’을 잘 계승해 그 또한 산수화로 명성을 얻었다. 이 전시에 함께 출품된 <밤[栗圖]>도 이 같은 기법을 잘 보여준다(도7). 이는 모임에서 주문에 의해 급히 그린 이른바 석화席畫로 간주된다. 영지를 함께 그린 것은 삼국의 공통적 요소라 하겠다.

“내 벗이 몇 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중에서

도8 <절매삽병도>, 강희안(1417~1464), 비단에 수묵담채, 17.9×24.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 도9-1 <책가도>(부분), 19세기, 개인소장
(오른쪽) 도9-2 <백자청화 산형연적>, 조선 19세기, 30.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왼쪽) 도10 <괴석도>, 김유근(1785~1856), 종이에 수묵, 24.5×16.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오른쪽) 도12 <괴석영지도>, 고희동(1886~1965), 종이에 채색, 26×35cm, 밀양시립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돌 그림 – 조선 후기와 말기 화단에 큰 유행

도11 <괴석도>, 허련(1808~1893), 종이에
수묵, 94.7×37.5cm,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돌 그림은 구름과 같아 붓이 종이에 닿으니
바로 구름이 되어 영롱해지네
[畫石如雲纔着紙 便爲雲去亦玲瓏].”

-허련의 <괴석도> 제사 중에서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는 행동거지와 바른 말, 강직함으로 자주 여러 차례 유배를 겪은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한편으론 음악을 좋아하며 시를 즐긴 풍류인이다. 그가 남긴 자연을 읊은 시조 75수로 정철(鄭澈, 1536-1593), 박인로(朴仁老, 1561-1642)와 함께 ‘조선 3대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지칭된다. 그의 오우가는 물과 돌, 소나무와 대[竹], 달 다섯이 각기 지닌 상징 [부단不斷·불변不變·불굴不屈·불욕不辱·불언不言]을 의인화해 벗으로 읊은 시조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에 이어 조선 초부터 초충도나 화조화나 사군자에 배경으로 등장한다. 고려시대 <청자매병> 파편 조각엔 상감으로 괴석 좌우에 국화와 대나무 그리고 한 쌍의 백로를 시문한 것도 있어 고려시대 그림 자료가 된다. 조선 호 15세기 대표적인 서화가로 원예에 관한 최초의 저술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남긴 강희안(姜希顏, 1417-1474)도 주목된다. 그의 그림으로 전하는 <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에선 송·죽·매 등 세 수종을 중심으로 한 조선 초 정원의 모습을 유추하게 하며 분재盆栽 및 괴석도 등장한다(도8).
돌에 대한 선비들의 애정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가시화를 보인다. 전국의 기석을 모은다든가 중국에서 돌을 수입한 기록, 조선말 19세기 <백자청화 산형연적>과 조선서 정형을 이룬 <책가도冊架圖>에 등장한 수석 등이 이를 증명한다(도9-1, 도9-2). 돌이 어엿한 독립된 주제가 된 것은 정선, 최북, 강세황 등의 유작을 통해 알 수 있듯 18세기 이후로 여겨지며, 돌로 명성을 남긴 이들은 19세기에 등장한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돌 그림을 남겼고, 그와 교유한 묵죽의 대가 신위(申緯, 1769-1847) 권돈인(權敦仁, 1783-1859) 기암괴석 모양의 벼루 그림 13점인 <황산연산도첩黃山硯山圖帖>과 추사에게 소품 <괴석도>(도10)를 그려준 김유근(金逌根, 1785-1856), 조희룡(趙熙龍, 1789-1866), 괴석 병풍 등 대작과(도11) 다작을 한 허련(許鍊, 1808-1893), 화사한 새로운 색감의 정학교, 윤용구(尹用求, 1853-1939) 등 적지 아니한 문인화가들이 이 주제를 즐겨 그렸다.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의 <괴석영지도>(도12) 등 근대를 거쳐 현대화단에서도 새로운 소재로 대기 중이다.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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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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