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⑩ 백로

백로는 온몸이 순백색인데다 목 아래 깃과 꼬리를 덮는 장식깃이 길어 우아하다.
희고 깨끗한 자태로 청렴한 선비를 상징했으며, 시문과 화조화의 소재로도 많이 등장했다.

– 글 이원복 (미술사가)


오늘날 백로를 두루미[학鶴]로 여기며, 백로·해오라기·왜가리 등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자연과 멀어진 현대인들의 일반적인 상황이다. 백두산 고지를 제외하고 한반도 전역에 만날 수 있는 백로는 몸 전체가 눈부신 새하얀 색, 등에서 꼬리까지 이어진 비옷 모양 여름 깃, 목 하단 깃 등 깨끗하고 우아한 자태는 시선을 모으기 충분하다. 백로는 동아시아에서 두루미 때문에 다소 가려진 감도 없지 않으나, 그에 뒤지지 않는 사랑을 받아왔다. 두루미처럼 ‘청렴한 선비’를 상징한다.

해오라기와 백로

차로로 옛 서울인 한양의 서소문인 혜화문을 벗어나면 바로 남북으로 성북동과 삼선동을 가르는 사거리 교차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성북천 상류인 북쪽은 하천을 덮어 찻길이 되었으나, 남쪽 신설동까지 복개래 청계천에 합류한다. 청계천에 이어 성북천도 복개해 물을 인공으로 방류했고, 4킬로 남짓한 하천 좌우 고수부지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 조성했다. 1시간 남짓한 이 길을 산책하면서 하천에 시선을 옮기면 송사리와 붕어 등 물고기를 물총새를 비롯해, 때로는 일곱이나 아홉 마리 새끼를 거느린 청둥오리 가족과 예닐곱 백로와 해오라기·왜가리 등 여러 종류의 새들도 만난다.
백로는 열대에서 온대까지 지구상에 12종이 번식하며, 우리나라엔 가장 흔한 중대백로와 중백로, 희귀한 나그네새인 노랑부리백로, 남부와 제주 텃새인 쇠백로, 겨울 철새인 대백로 등 5종이 확인된다. 철새인 두루미와 달리 텃새와 철새가 공존하는 백로는 봄에서 늦가을까지 도심의 하천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백로 또한 두루미처럼 순백의 깨끗하고 눈이 부셔 청렴한 선비를 상징한다. 동아시아에서 긴 세월 시인 묵객들이 상찬해 적지 아니한 시문과 화조화의 한 소재로 그림이 다수 전한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시漢詩만이 아닌 시조時調, 적지 아니한 그림이 전한다.
백로는 백조白鳥·사금絲禽·설로雪鷺·로사鷺鷥·설객雪客·설의아雪衣兒 등 명칭으로 옛 문헌에 나타난다. 순우리말로 백로는 해오라기·해오라비·해오리·하야로비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오늘날 해오라기는 작은 키에 목이 굵고 몸통이 통통하고 회색인 새들을 칭한다. 넓은 의미의 백로는 해오라기와 왜가리를 포함한다. 고전 발레 음악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1840-1893)의 <백조의 호수>로 잘 알려진 백조는 백로가 아닌 고니다.

(왼쪽) 도2 여기, <추로부용>, 비단에 채색, 192.6×111.9㎝,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오른쪽) 도3 마원, <설탄쌍로>, 비단에 수묵담채, 59×37.6㎝,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백로 그림의 유형, 독화讀畫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 전통회화에서 백로와 함께 등장하는 식물 소재로는 연꽃과 부용芙蓉, 여뀌[료蓼], 버드나무 등이다. 물새이기에 백로는 물총새처럼 물가나 연지蓮池에 그려짐이 일반적이다. 궁중장식 병풍과 여기서 비롯한 민화 <연지도> 병풍에는 화사한 연꽃과 백로 외에 각기 쌍을 이룬 청둥오리, 원앙, 제비 등 조류와 새우, 게, 각종 물고기들이 함께 등장한다.
수묵 위주의 일반감상화로서는 조선 시대 초부터 잎은 시들어 떨어지고 연밥이 달린 줄기 아래나 소슬한 가을로 가는 길목을 배경으로 백로 한 마리만을, 또는 이징(李澄, 1581-1653이후)의 <패하백로敗荷白鷺>(도1) 등 조선 중기 그림들처럼 스산한 분위기나 부부의 따스한 정이 느껴지듯 해로偕老를 기원한 듯 쌍으로도 그려졌다. 전자 ‘일로연과一鷺蓮菓’는 음이 같은 ‘일로연과一路連科’로 과거科擧에서 1차인 향시鄕試에 이어 임금 앞에서 치루는 2차인 전시殿試까지 연이은 합격 기원을 의미한다.
중국에선 여기(呂紀, 15세기 말-16세기 초)의 <추로부용秋鷺芙蓉>(도2)처럼 물가 주변에 부용화를 함께 그려 부용은 부영富榮과 같이 발음되어 부귀영화를, 연밥과 백로 그리고 부용화 셋을 함께하면 평생 내내 영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배경이 연꽃이 아니더라도 백로가 유독 3마리나, 9마리를 그림은 나름의 뜻이 있다. 전자 ‘삼사三鷥’는 ‘삼사三思’로, 후자는 ‘구사九思’로 읽어 이들 그림을 <삼사도>, <구사도>라 부른다. 배우고 자식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를 베푸는 등 덕행德行 셋, 《논어論語》에 나오는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때 등 군자君子의 반듯한 행동거지 아홉 가지 가르침을 암시한다.

도4 임풍면, <백로>, 종이에 수묵담채, 84×152.5㎝, 타이베이 국립역사박물관



도5 셋슈, <사계화조도> 6첩 병풍, 종이에 채색, 181.6×375.2㎝,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중국과 일본의 백로도

중국 그림에서 백로의 등장은 늦어도 당唐부터다. 송宋 궁정에 수장된 그림 목록인 11세기 《선화화보宣和畫譜》에 당 주황周滉의 <수석로사도> 2폭과 <수로도>가 게재되어 있다. 오대 황전(黃筌, 906?-965)과 종실 화가들, 최백(崔白, 11세기 중후반)과 그의 아들 최각崔慤의 작품제목을 통해 주로 가을 물가의 시든 연꽃, 때론 부용화와 여뀌, 설경을 배경으로 그렸고 현대까지 줄기차게 그려진 생명력이 긴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마원(馬遠, 12세-13세기 초)의 <설탄쌍로雪灘雙鷺>(도3)는 수묵 위주로 눈 내린 춥고 스산한 산야를 배경으로 제목과는 달리 화면 하단에 4마리 대백로가 등장한다(도3-1, 도3-2). 화면을 대각선으로 분할한 너른 여백 구도(마일각馬一角)이다. 전술한 명대 여기의 <추로부용>은 잘 알려진 대작이다. 물가에 시들어 떨어진 연잎과 달리 화사한 부용과 바람에 경쾌하게 흔들리는 버드나무 줄기 등 화원다운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에 고운 채색도 돋보인다. 화면 내 큰 비중을 점하는 3마리 흰 백로와 꾀꼬리 등 2쌍의 작은 새도 보인다. 벼슬과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길상吉祥에 삼사三思의 의미도 곁들였다. 프랑스 유학파 임풍면(林風眠, 1900-1991)의 활달한 필치로 갈대숲이 배경인 <백로>는 국내서도 공개됐다(도4).
일본 수묵화의 최고의 스승으로 무로마치 시대 선승 셋슈(雪舟, 1420-1506경)의 <사계화조도>엔 백로와 두루미가 함께 등장한다. 한 쌍의 6첩 병풍엔 제비나 원앙 등도 보이나 한 틀엔 소나무와 두루미가, 다른 틀엔 매화가 백로가 주연이다(도5). 마치 마원의 <설탄쌍로>처럼 한 마리는 홀로 우측에, 다른 몇 마리는 바위 뒤로 등장한다. 18세기 대가 이토 자쿠추(伊藤若沖, 1716-1800)가 수묵으로 그린 <유백로도>에선 선배 셋슈의 영향이 보인다(도6-1, 도6-2).

(왼쪽) 도6-1 셋슈, <사계화조도> 6첩 병풍 부분
(오른쪽) 도6-2 이토 자쿠추, <유백로도> 부분, 종이에 수묵, 99.2×28.2㎝



(왼쪽) 도7 이건, <물총새와 백로>, 종이에 수묵, 67×20.7㎝, 국립중앙박물관
(가운데) 도8 전 이영윤, <물까치와 백로>, 비단에 채색, 152.6×55㎝,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도9 정선, <쇠백로> 첩 중 1폭, 종이에 수묵담채, 65.2×41㎝, 동산방

문인과 직업화가가 그린 우리 백로도

고려시대 현존 그림은 워낙 수가 적으나 청자 문양 중 물가 풍경을 담은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나, 중국과 교류를 감안하면 백로가 그려졌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학자로 관료이며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화가 이름은 보이지 않으나 <백로>, <쌍로> 등 작품명이 등장한다. 조선 초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중국 연경에서 <수묵백로도>에 제사를 쓴 사실도 알려져 있다.
현존 그림 중 시대가 이른 것은 18세기 조선의 대수장가인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꾸민 화첩인 《화원별집畫苑別集》 내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백로도>이다. 먼저 문인화가로 윤엄(尹儼, 1536-1581)·김식(金埴, 1579-1662)·이징·숙종의 어제가 있는 종친 이건(李健, 1614-1662)의 <물총새와 백로>(도7) 등 유작이 보여주듯 조선 중기 화단(1550-1700경)에 유행한 《사계영모첩》에 빈번히 등장한다. 이 시기 이영윤(李英胤, 1561-1611) 전칭작인 <영모8첩병풍>의 예가 말해주듯 섬세하고 화사한 궁중채색화 계열도 전한다(도8). 후기엔 윤두서(尹斗緖, 1668-1715)를 비롯해 정선이 절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에게 그려준 대작 10폭으로 된 《백로도첩》의 <쇠백로>(도9), 심사정, 김홍도 산수에 작게 등장한 서정적인 <석양에 둥지로 돌아가다[夕陽歸巢]>·<서군탄으로 향하다[向使君灘]>·<백로횡답白鷺橫沓>(도10), 말기엔 홍세섭(洪世燮, 1832-1884)의 <백로>(도11), 장승업과 양기훈(楊基薰, 1843-1919이후)의 일괄 영모병풍에서 백로를 만나게 된다.

도10 김홍도, <백로횡답>, 종이에 수묵담채, 26.7×31.6㎝, 삼성미술관 리움



(왼쪽) 도12 미상, <백로>, 19세기, 종이에 채색, 55×32㎝, 개인소장
(오른쪽) 도11 홍세섭, <백로>, 비단에 수묵, 119.7×47.9㎝, 국립중앙박물관



백로는 두루미로 인해 다소 가려진 감도 없지 않으나, 쉽게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데다가 순백의 우아한 자태로 한자문화권에서 긴 세월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온 새이다. 문학과 조형미술의 소재로 줄기차게 이어져 그림의 경우 종친과 사대부 등 지식층 문인화가와 회화사에서 족적이 선명한 거장을 비롯해 민화民畫(도12)를 그린 무명화가 등 모두가 즐겨 그려 명품과 소박한 그림들이 다수 전한다.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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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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