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소재로 살핀 우리 옛 그림 ⑨ 두루미

천연기념물인 두루미는 학鶴이라고도 불리며 우리에게 친숙한 겨울 철새이다.
옛 그림 속에서는 고고한 선비의 모습으로, 신선이 타는 장수의 영물로 그려지곤 했다.

글 이원복 (미술사가)


한자문화권에서 상상의 새인 봉황을 제외하면 가장 상서로운 새는 학이다. 학은 장수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으며, 우리나라 그림으론 <십장생도>(도1)와 <요지연도瑤池宴圖> 등 조선 시대 일급화원들이 제작한 궁중장식 병풍엔 반드시 등장했다. 오회분 4호묘나 통구사신총의 <학을 탄 신선>(도2-1) 같은 고구려벽화에 묘사된 인물은 무덤 속 주인공으로 사료되나, 조선 후기 <요지연도>에는 수성노인과 왕자교王子喬 등 전설로 전해지는 신선이 학을 탄 모습으로 등장하며 무희와 춤추는 쌍학도 발견할 수 있다(도2-2). 이처럼 학은 소박한 꿈을 담은 민화뿐 아니라 15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그려진 생명력이 긴 회화 소재이다.

도2-1 <학을 탄 신선> 부분, 통구사신총 현실서벽(고구려 6-7세기)
도2-2 <학춤>, <요지연도> 부분, 18세기, 비단에 채색, 156×504㎝, 개인소장

상서로운 새, 두루미

학鶴은 순우리말로 두루미이다. 두루미는 겨울 철새로 늦가을 한반도를 찾아와 월동하며, 천연기념물 제202호로 지정됐다. 두루미의 청아한 울음소리, 현란한 군무, 눈부시게 빛나는 흰 날개, 날개 끝의 검은 깃과 머리 위의 붉은 점, 가늘고 긴 다리와 목, 늘씬한 외형은 우아하고 당당하며 품위 있는 자태를 만들어낸다. 덕분에 중국과 한국에서 오랜 세월 시문으로 상찬賞讚되었고 화폭에 옮겨졌다. 학보다 작은 크기인 백로白鷺는 텃새로 쉽게 볼 수 있으나, 학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가 아니다. 또한 눈 주위가 붉고 등이 회색인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가슴에서 몸 아래가 흑 회색인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도 있다.
학은 신선이 타는 새이기에 선학仙鶴, 선금仙禽으로도 불렸다. 수명이 80년 정도지만 한자문화권에선 천년을 산다고 믿어 십장생十長生에 포함됐다. 조선 시대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여 품계를 나타낸 흉배胸背에는 호랑이와 학을 수놓아 각각 무관과 문관을 구별했고, 선비들의 평상복인 학창의鶴氅衣는 학의 모습을 본뜬 옷이다. 자기와 목칠, 금속 등의 공예품 무늬로도 자주 활용된 학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화조화, 궁중장식화, 고사인물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소재로 그려졌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부터 이름난 직업화가, 민화를 그린 무명화가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또는 조연으로 등장 했다.
학이 대나무와 함께 그려지면 중국어로 죽竹과 축祝의 발음이 같아 축수祝壽를 뜻하는 그림이 된다. 우리 근대화단에선 화갑華甲을 맞이해 ‘소나무와 학처럼 오래 장수하시라’는 의미로 두 소재를 그리고 화면 상단에 송령학수松齡鶴壽를 쓰기도 한다. 일품당조一品當朝(당대의 조정에서 벼슬이 일품에 오르다)의 가장 높은 지위인 일품은 새 가운데 우두머리인 학을 지칭하는데, 파도 앞에 학을 그리면 당조當潮(파도 앞에 서다)가 당조當朝(조정에 든다)로 읽혀 높은 관직에 올라 오래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다.

도3 휘종, <서학도> 부분, 1112년, 비단에 채색, 51×138.2㎝, 중국 요녕성박물관
도4 <죽림선학> 부분, 내몽골 자치구 고륜기 1호 요 무덤(1080년), 390×250㎝



도5 전 셋슈, <사계화조화> 6첩(1쌍) 병풍 부분, 종이에 채색, 159.5×349.8㎝, 매다이쿠토구카이재단

중국과 일본의 학 그림

중국 조형미술에 등장한 학은 기원전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75-221) 와당瓦當 문양에서도 살필 수 있다. 학은 새 중에 봉황 다음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다. 서예가로 잘 알려진 설직(薛稷, 649-713)은 가장 먼저 학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후대 그의 그림을 방倣한 그림들로 미루어 당唐 7세기 후반 학이 본격적으로 그려졌고, 그에 의해 정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뛰어난 서화가이자 예술 후원자인 북송 휘종(徽宗, 1082-1135) 때 황궁이 비장한 그림 목록인 《선화화보宣和畫譜》에는 설직 외에, 서희(徐熙, 10세기)와 더불어 오대五代 화조화의 원류인 황전黃筌과 황거보黃居寶 부자, 등창우縢昌祐 등의 작품이 기록되어 있어 적지 않은 수의 학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전해지지 않는 그림일지라도 작품명을 통해 화조화 범주에서 모란·대나무와 학을 한 화면에 그리고, 1마리는 물론, 2마리씩 쌍으로 그리거나 많게는 6마리까지 함께 그렸음도 알 수 있다.
송대宋代 학 그림인 휘종의 <서학도瑞鶴圖>(도3)에는 궁궐과 구름 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현란한 군무群舞를 펼지는 22마리의 학이 등장하는데, 마치 <고려청자운학문매병>의 무늬를 펼친 것 같다. 송말 선승화가 목계(牧谿, 13세기)가 백의관음보살 좌우에 학과 원숭이를 별폭으로 그린 일괄 작품 <관음觀音>, <원猿>, <학鶴>도 잘 알려져 있다.
이에 앞서 1972년에 발굴된 11세기의 요遼 무덤 벽화 중 대나무 숲에 한 쌍의 학이 깃든 <죽림선학竹林仙鶴>(도4)이 있다. 명明에서 청淸에 이르는 학 그림은 학과 대나무 또는 소나무가 함께 그려진 화조화가 일반적인데, 매화, 부용, 동백, 파초 등도 함께 그려졌다. 이러한 경향은 명 15세기에 활동한 변경소邊景昭와 변문진邊文進, 여기(呂紀, 16말-16세기 초)나 청 심전(沈銓, 1682-1760), 낭세영(郞世寧, 1688-1766)의 유작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편, 학은 일본 북해도 동북 연안 등 일정 지역에선 철새가 아닌 텃새로 산다. 무로마치시대 화승 셋슈(雪舟, 1420-1506경)의 전칭작이지만 6첩이 쌍을 이룬 <사계화조화> 대작 병풍이 여러 벌 현존하며, 이들 그림엔 한 쌍의 학이 큰 비중으로 등장한다(도5). 특히 변문진, 셋슈, 이징의 학 그림에서는 같은 소재를 다루는 한·중·일의 표현 차이를 엿볼 수 있다(도6-1, 도6-2, 도6-3). 18세기 화조화의 대가로 활약한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는 동아시아의 국제적 화풍을 바탕으로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현한 거장으로, 사찰 장벽화障壁畫를 비롯해 수묵·채색 분야에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함께 그린 쌍폭 학 그림을 여럿 남겼다.

도6-1 변문진, <매죽쌍학도>, 15세기, 비단에 채색, 163.5×86.6㎝,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도6-2 전 셋슈, <사계화조도> 병풍 부분, 15세기, 종이에 채색, 181.6×375.2㎝,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도6-3 전 이징, <사계영모도> 병풍 부분, 17세기, 종이에 담채, 144.5×35㎝, 울산박물관



도7 설충 외, <학>, <관경변상도> 부분, 1323년, 비단에 채색, 224.2×139.1㎝, 일본 치온인
도8 <신선과 학>, 고려, 비단에 채색, 43.3×28.5㎝, 개인소장

고려 불화와 도석인물화에 그려진 학

상감운학문象嵌雲鶴文은 고려청자의 문양 중에 가장 선호되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 학 그림이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접시와 병 등 조선백자에도 청화로 그린 학이 자주 등장한다. 1323년 설충薛冲 등 화공이 그린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에는 공작과 함께 연지에 등장한 학이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으며(도7), 이 고려 불화는 드물게 전해지는 고려 시대 화조화의 높은 수준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북송대 절강성 항주 고산孤山에 20년 가까이 은거한 임포(林逋, 967-1028)가 움직이지 못하는 매화를 부인 삼고 학을 아들 삼은 고사故事는 <매처학자梅妻鶴子>, <서호방학>, <고산방학> 등의 화제로 즐겨 그려졌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신선과 학>(도8)은 이 주제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조선 초 15세기 문집에도 우리 그림인지, 중국 그림인지는 불분명하나 <임화정방학도>에 부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가 있다. 임포의 고사를 그린 그림으로는 조선 중기 문인화가 홍득구(洪得龜, 1653-?)의 전칭작 <고산방학도>(도9)와 정선(鄭敾, 1676-1759), 윤덕희(尹德熙, 1685-1766), 김홍도(金弘道, 1745-1806경) 등의 유작이 전해진다.

도9 전 홍득구, <고산방학도>, 17세기, 비단에 수묵, 74.6×38.2㎝, 국립중앙박물관
도10 전 유자미, <지곡송학>, 15세기, 비단에 채색, 40.5×34㎝, 간송미술문화재단



도11 이덕익, <죽학도>, <송학도>, 17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 28.8×41㎝, 하버드 새클러미술관



도12 장우성, <오염지대>, 20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1.3×21.5㎝, 개인소장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병풍을 비롯해 고사인물화에는 학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서원아집도>는 북송대 부마인 왕선王詵이 자기 집 정원[園林]에서 미불, 소식과 소철 부자 등 당시의 유명한 시인 묵객들 16명의 아회를 담은 그림이다. 조선의 풍광을 배경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의 한가롭고 여유 있는 삶을 그린
<삼공불환도>나 <평생도> 등 풍속화의 한 모퉁이에도 등장한다. 과거에는 학을 잡아 기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림 속 모습이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차茶가 있는 곳에 학이 그려짐으로써 유연한 분위기를 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전통회화의 학 그림은 영모화조화 영역에서 감상화로 지속해서 그려졌다. 조선 초 문인 유자미(柳自湄, ?-1462)의 전칭작 <지곡송학芝谷松鶴>(도10)은 15세기의 학 그림이다. 16세기 문집에 벽화로 그려진 송죽과 함께 한 쌍의 학에 부친 제시도 있다. 조선 중기 화단에서 선비들이 정형을 이룬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에 학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징(李澄, 1581-1653 이후)의 <영모도>, 이덕익(李德益, 17세기)의 <죽학도>와 <송학도>(도11) 등을 통해 화원들도 학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근대 화단의 학 그림의 경우 화제가 더 다양해졌다. 곽남배(郭楠培, 1929-2004)의 <정우장락靜友長樂>에는 한겨울 무리를 지어온 군학群鶴이 서정적으로 묘사됐으나, 장우성(張遇聖, 1912-2006)의 <오염지대>(도12)에는 병들어 날지 못하는 학이 그려져 환경오염 문제를 안고 있는 현실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원복 | 미술사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역임하며 42년간 박물관 현장에 몸담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사)역사여성미래 공동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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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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