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교수의 민화재료학 특강 ⑨
모든 빛을 흡수한 흑색黑色, 색이 섞인 간색間色

저승사자의 도포 자락과 갓에서 연상되는 검은색은 오행 중에 물과 북쪽을 상징하며 한국인의 의식주에서 친숙한 빛깔이다. 또 오방색 가운데 둘 이상의 색을 섞은 간색은 염색 순서에 따라 복합 염색해야 제대로 색을 낼 수 있다.

– 글·사진 이승철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물과 죽음을 상징하는 흑색黑色

세종실록에 이르길, 춘분, 하지, 추분, 동지에 구름 빛이 검으면 비가 자주 오거나 물난리가 나게 된다고 하였다. 민간 신앙에 쓰이는 종이 부적은 한지에 붉은 광물성 안료인 단사丹砂를 주로 사용하나, 화재 예방 부적만은 불의 색인 빨강 대신 물의 상징인 검은색을 주로 쓰며, 먹으로 ‘수水’자를 써서 불을 취급하는 곳에 거꾸로 붙인다. 그것은 그릇에 담은 물을 거꾸로 하면 쏟아지는 이치를 주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음양학에서 음은 검정, 양은 흰색으로 비유된다. 흑백논리란 것도 흑은 악이요, 백은 선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꿈속에서 흰머리와 흰 수염, 흰 도포를 입은 신령을 보면 길몽이요, 검은 옷을 입은 신령을 보면 죽음과 저승사자의 현몽으로서 악몽이 된다. 흑심은 음흉하고 부정한 마음, 흑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음흉한 내막을 말한다. 상중임을 나타내는 상장은 검은 헝겊으로 만들어 상복 대신 옷깃이나 소매, 모자 등에 붙인다. 또 조기는 조의를 표하는 검은 깃발이다. 이러한 검은 상장이나 조기는 죽음을 나타낸다.

우리나라의 승려는 검정 물감이나 땡감으로 물들인 검은 베옷을 입는다. 때를 잘 타지 않고 활동하기에 편리하며, 비용이 적게 드는 등 검소한 복색이기 때문이다. 고려 때는 왕의 자문에 응하던 승려를 흑의재상黑衣宰相이라고 하였다. 나이가 젊은 재상을 흑두재상黑頭宰相이라 하는데, 검은 머리가 젊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행설에서 검정을 상징하는 도상은 현무도玄武圖이다. 현무는 오행 중에서 물에 해당하고, 계절로는 겨울, 방위로는 북쪽이며, 그 색은 검정이다. 5~6세기경의 고구려 무덤 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의 북쪽에 그려진 것이 현무도이다. 검정 색상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갓, 간장, 숯 등이 있다. 한국의 갓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머리에 썼던 검은 빛의 갓, 즉 흑립黑笠일 것이다.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간결한 형태와 이를 감싸는 고결하고 엄격한 검은 빛은 한국 남자, 즉 선비의 기품이자 멋의 상징이다. 간장의 검은 빛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빛깔이자 정성이 가득 배인 빛이다. 한국에서 숯을 사용한 것은 2600년 전부터이다. 숯은 취사와 난방에 가장 좋은 재료였을 뿐 아니라, 전통 시대에는 숯다리미가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전기다리미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 독특한 풋풋한 숯 내음 속에 의생활 문화가 형성되어온 것이다.
흑색을 염색할 수 있는 천연염료로는 붉나무, 참나무, 밤나무, 산나무, 가래나무, 진달래, 철, 철장액, 철사가 있다. 대부분 염료에서 얻어지는 검은색은 복합 염으로 만들어지며 주성분이 타닌 성분이다. 그밖에 광물성 카본, 먹, 재 등이 있다.

오방색 사이에 존재하는 간색間色

자연염료는 염료가 지니는 고유색 이외에 자연염료끼리 염액을 혼색하여 물감처럼 색을 만들 수는 없다. 자연염료의 혼색은 염색되어 만들어진 색상 위에 다른 색을 올리어 복합 색을 만드는데 이렇게 만드는 색을 간색이라 한다. 자연염료를 섞어서 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염색한 옷감을 다른 염료로 물을 들여서 색상을 낸다. 또한 순서에 따라 염색해야 제대로 된 색이 나온다. 복합 염색의 생명은 바로 염료별 염색 순서에 있다.
색상을 잘 만들어낸다는 말은 곧 간색을 잘 낸다는 말이다. 푸른색은 쪽으로 염색하고, 노란색은 치자나 황련, 붉은색은 강도에 따라 잇꽃이나 소목을 쓴다. 그 밖에도 색을 내는 염료는 많지만 대체로 원색에 가깝다. 따라서 간색의 원리를 터득해야 마음대로 색을 낼 수 있다. 전통적인 방법에서 보라색을 내는 지초는 야생 지초가 아니면 염색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야생 지초는 구하기도 어렵고 값이 매우 비싸다. 보라색을 내는 다른 방법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섞어 만드는 것이다. 붉은 물이 든 천에 푸른 물을 들이면 색이 죽어버린다. 먼저 쪽물로 푸른 물을 들이고 잇꽃으로 붉은 물을 들여야 제대로 된 보라색이 살아난다.
오방색의 염색 순서는 백, 청, 황, 홍, 흑이다. 이 순서를 어기면 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흰색은 색이 아니므로 모든 색을 받아들이지만 검정은 빛깔들이 합해져 자기 색을 잃은 것이므로 어떤 색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검은색에 가까운 색부터 염색하면 간색이 아니라 색이 아예 죽어버린다는 말이다. 또 짙은 색을 먼저 쓰고 밝은색을 나중에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쪽으로 밝게 염색한 후 오리나무로 물을 들이면 약간 탁한 청색을 만들 수 있다. 쪽으로 염색한 뒤에 괴화를 들이면 녹색을 얻을 수 있지만, 괴화로 염색한 뒤에 쪽을 물들이면 괴화의 색상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견뢰도(외적 조건에 대한 염색물 빛깔의 내구성 정도)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진행해야 한다. 견뢰도가 높은 것에 견뢰도가 낮은 것으로 간색을 내려고 하면 색상이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밑바탕이 되는 염료의 견뢰도가 너무 낮아도 전체 색상이 빠져나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간색을 내는 복합 염색 순서

이렇듯 어떤 색을 먼저 들이고 어떤 색을 나중에 들이는지는 각 단계에서 염료가 얹힌 색도가 보이는 특징을 경험한 뒤라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색상을 내기까지는 더 많은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단일 염색은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지만, 간색을 내는 것은 색의 농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얹혀 섞여서 보이는 색상을 찾는 작업이다. 작업하면서 감이 느껴져야 원하는 색상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 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합 색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기 어렵다.

기록에 남겨진 여러 가지 간색 방법


* 목홍색
다목을 삶은 물에 명반과 오배자를 넣어 염색한다.
* 아황색
황벽나무를 삶은 물로 염색하고 마麻의 잿물에 담갔다가 다시 소다수로 빤다.
* 다갈색
연화의 열매 껍질을 삶은 물로 염색하고 다시 청반수로 염색한다.
* 대홍관록색
홰나무의 꽃을 삶은 물로 염색하고 다시 남전수로 그 위에다 물들인다. 빛깔의 농담은 명반으로 조절한다.
* 두록색
황벽나무를 삶은 물로 바탕을 물들이고 다시 남전수로 그 위에다 물들인다.
현재는 작은 잎의 현람現藍을 삶은 물로 그 위에다 염색한 것을 초두록색草豆錄色이라 한다.
빛깔이 대단히 산뜻하다.
* 유록색
홰나무의 꽃을 삶은 물로 엷게 물들이고 다시 청반수로 염색한다.
* 천청색
남전수의 항아리에 넣어 연한 남색으로 물들이고 다시 다목을 삶은 물로 짙게 염색한다.
* 포도청색
남전수의 항아리에 넣어 짙은 남색으로 물들이고 다시 소목수로 짙게 염색한다.
* 단청색
황벽나무를 삶은 물로 물들인 후 남전수의 항아리에 넣어 다시 염색한다.
* 현색玄色
남전수로 진한 청색으로 염색하고 같은 양의 거먕옻나무와 소귀나무의 껍질을 삶은 물로 물들인다.
또 다른 방법은 대청大靑의 어린잎을 우려낸 물에 넣어 물들이고 그 후 다시 청반, 오배자의 물에 넣어 염색한다.
단지 이렇게 염색한 베나 비단은 비교적 쉽게 썩어 문드러진다.
* 상아색
거먕옻나무를 삶은 물로 엷게 물들인다. 혹은 황토로 물들인다.
* 대홍색
잇꽃 염색에 있어서 2차 노목으로 염색한 후 잇꽃으로 염색하여 만든다.

고문헌에 의한 색채 계열과 식물성 염료의 단색염색 및 복합염색을 고찰한 바로는 색채 계열이 8계열이고 전통 염색 색상은 48가지이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는 8가지 염색방법을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헌에서 발췌하여 기록하고 있다. 《임원경제지》는 중국 명나라의 기술서적인 《천공개물天工開物》에 언급된 21가지 색깔 만드는 자료 중에 방법이 미상이라고 표시된 ‘적황색’과 괴화 달인 물에 염색하고 청을 매염제로 쓰는 ‘유록색’, 중국 남색을 만드는 방법과 변천을 기술한 ‘부염생청포색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다. 괴화를 사용한 유록색에 관한 부분은 다른 문헌에서는 선황색이라 하여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 국한된 사항인 ‘부염생청포색법’이 빠진 것 외에, 글자 몇 개가 바뀌었을 뿐 거의 모든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중국의 염색기술은 대부분 한국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이승철 |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30년 동안 한지와 자연염색 등 전통미술 재료를 연구했으며 다수의 전시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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