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교수의 민화재료학 특강 ⑤ 자연이 만든 순수한 색, 소색素色

모든 민족은 저마다의 환경과 정서에 맞는 색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백의白衣로 일생을 마쳤다고 할 정도로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선조들이 선호한 흰색은 오늘날의 인위적인 흰색이 아닌 자연적인 ‘소색素色’이다. 오방색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의 소색에는 모시, 백자, 호분 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고유의 색감과 소박한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다.


‘색이란 공기처럼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그냥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자연색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때, 자연색에 대한 인식은 무지할 만큼 단순했다. 그러나 소색 한지를 연구하며 접한 조선 시대 두루마리 색지의 자연 염색된 색감에 매료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 전통색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의 자연색에 대한 인식도 필자의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할까?

백의민족白衣民族은 예부터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해 흰옷을 즐겨 입어서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것은 흰색이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바탕의 색, 소색素色이다. 소색의 ‘소素’자는 순백을 의미하며, 회의문자로서 ‘본래의 그대로’라는 뜻을 지녔다. 소색은 모든 색상의 기본 바탕이 되는 색이자 자연이 만들어낸 색이다. ‘백의白衣’는 인공이 배제된 소색의 백색이며, 선조들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소색 옷을 입는 행위로 자연과 동화되고자 했다.
소색의 아름다움은 무명이나 모시, 창窓과 문門에 바른 한지韓紙, 벽에 바른 흰 석회, 백자, 호분, 소금, 눈 등 수없이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소색의 백색은 광선을 반사하여 번쩍거리는 백색이 아니고 빛을 흡수하는 은은한 빛깔이며, 화학약품으로 표백된 순백색이 아닌 옅은 미색을 띤 백색이다. 같은 백색이라 해도 민족마다 색감에 대한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에 각 민족이 좋아하는 백색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선조들이 좋아한 백색은 조선 백자의 투명함과 세모시 백색 도포에서 보이는 격格이 있고 깊이 있는 백색이다. 물론 자연이 만든 소색은 젖빛 같은 유백색도 있으며, 달걀 빛 같은 난백색도 있고, 또 그냥 희기만 한 순백색도 있다.

자연이 소색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소색에는 자연 스스로가 소색의 재료가 되어 만들어낸 ‘기본적인 소색’과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재가공한 ‘백색 소색’이 있다. 기본적인 소색은 목화가 만들어낸 순백색의 무명, 뽕나무 잎이 누에라는 곤충을 통해 만들어낸 황백색의 비단, 흙과 자연의 유약이 불을 이용해 탄생시킨 백색의 백자 등이며, 이러한 기본적인 소색을 다시 자연의 힘으로 변화시킨 것이 백색 소색이다. 백색 소색에는 시간과 불을 통해 조개껍데기로 만들어낸 호분, 물과 햇볕을 이용하여 황갈색 닥나무껍질로 만들어낸 흰색 닥종이 등이 있다.
혹자는 우리 민족이 가난하여 색깔을 못 쓰는 민족이라든지, 색에 대한 표현력이 없어 흰옷을 입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이 지닌 다양한 색 문화를 격하시키는 것이다. 색상의 다양성은 고구려 고분 벽화, 삼국 시대의 복식, 고려 불화, 조선의 사대부와 궁중의상, 단청 같은 문화유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개인도 그렇듯이 민족이나 집단이 선호하는 색상과 배색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민족은 저마다의 환경과 정서에 맞는 색상을 가지고 색에 대한 의미체계를 갖추고 있다.

오방색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의 소색

소색의 백색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하양’ 혹은 ‘희다’라고 한다. 음양오행의 의미체계에서는 의義를 뜻하고 수호신으로는 백호가 된다. 또한 백색은 동양의 공간 개념으로 서쪽을 말하고 시간 개념으로 사계절 중 가을에 속하며 상징적 개념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래서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하늬바람’이라고 부르며 천신天神을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우리가 흰옷을 즐겨입는 것은 곧 ‘하느님’을 숭상하는 경천사상에 연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색의 바탕은 오방색으로, 음양오행에 기반을 두며 우리 민족의 색채의식에 밑바탕을 이룬다. 음양오행에서 말하는 오방색이란 황색, 청색, 적색, 백색, 흑색을 말한다. 각각의 색은 방위와 관련이 되어 있으며, 항상 변함이 없이 중앙에 있는 색은 황색이다. 물, 식물 등 발전적인 것을 상징하는 청색은 동쪽, 따뜻함과 부를 상징하는 적색은 남쪽, 깨끗함과 순결을 나타내는 흰색은 서쪽, 암울한 세계를 상징하는 검은색은 북쪽을 가리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군자의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도 오행사상의 원리를 따라 각각 방위를 지니고 있다.
색을 만드는데도 음양오행 원리가 바탕이 된다. 오방색의 혼합에 따라 녹색도 나올 수도 있고 주황색이 나올 수도 있는데, 이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전통적으로 염색하거나 색을 혼합하여 새로운 색깔을 만들 때 중심 색은 황색이라는 점이다. 녹색을 만들 때 청색으로 먼저 염색한 후 황색을 염색하면 녹색이 나오나, 황색을 먼저 염색한 후에 청색을 염색하면 청색 기운이 강해서 녹색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또한 적색을 이용한 방법도 마찬가지로 황색을 먼저 염색하고 적색을 염색하면 적색 기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즉, 두 색을 이용하여 염색할 때는 중심 색이 나중에 들어가야 좋은 색이 나온다. 이러한 색의 배합 순서도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색을 ‘간색間色’이라고 부른다.

무공해 자연의 소색과 강제 표백된 흰색

우리 민족이 소색을 많이 사용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소색을 너무 많이 사용해 소색 사용을 금지한 기록으로 보아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그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태사국太史局에서 아뢰기를, “동방(고려)은 오행五行 중 목木의 위치이니 푸른 색깔을 숭상하여야 하며 흰 것은 5행 중 금金의 색깔인데, 지금 나라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흰 모시옷으로 윗옷을 많이 입으니, 이것은 목木이 금金에 제어되는 형상입니다. 백색 의복을 금하기를 청하나이다”하니, 왕이 그 말을 쫓았다고 한다. 소색 애용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에도 청색 숭상의 관습이 이어져 백의금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는데 “숙종 신미년 17년에 왕이 명하여 흰옷을 금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음양오행 사상은 지금까지도 풍습이나 이야기, 습관 등 생활 속에 뿌리 깊이 남아 있다. 음양오행 사상은 동양 색채문화에 근간이다. 한·중·일은 음양오행에 맞추어 자신들의 색을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민족마다 선호하는 색이 조금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색을 만들어 사용했다. 또한 색의 주된 사용자는 당시 지배계층이었다.
우리 민족이 소색을 즐겨 사용한 현실적인 이유로 편리성과 염료의 가격이라는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평민들은 지역과 계절에 따라 천(무명, 비단, 삼베, 모시)의 재료를 직접 재배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천을 세탁할 때도 집안에서 타고 남은 재에서 추출한 잿물을 이용하여 자연 표백했다. 이런 과정을 자급자족하여 해결할 수 있고, 당시 염료의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주로 염색하지 않은 소색 옷을 입었다. 그렇다고 평민들이 색깔 있는 옷을 선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평민들이 염색할 염료를 얻기 위해 벼농사보다 염료 재배를 선호하는 바람에 쌀 수확량이 감소하여 염료 재배를 금지한 경우도 있다.

요사이 사용하는 흰색은 우리 민족이 즐겨 사용하던 소색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현대의 흰색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결코 깨끗한 것이 아니라 눈속임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옛날부터 얼굴의 피부 색깔이 하얀 것을 좋아해서 화장품으로 백분을 발랐는데, 백분은 바로 납 성분이어서 시각적으로만 맑고 깨끗해 보이지만 실제 그 물질은 우리 피부에 해로운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흰색천은 일반적으로 강제 표백을 해서 흰색을 만든다. 발색을 좋도록 모든 천에는 광명단이라는 화학약품을 집어넣으며 광명단은 보통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으나 흰색 천을 놓고 사진 촬영을 하면 사진에 반사되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광명단 때문에 어머니들이 새 천을 사서 어린애들이 기저귀를 사용할 때 그냥 사용하지 않고 삶아서 쓰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삶지 않고 바로 사용하면 피부가 예민한 어린애에게서 피부 알레르기나 반응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양지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이다. 종이의 발색을 좋게 하고 변색이나 변질을 없애기 위해 화학성분의 활석이나 표백제, 포르말린을 사용하여 강제로 흰색을 만든다. 현대에서는 하얗다고 해서 결코 깨끗하거나 위생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하얀 백색을 만들 때는 무공해 자연을 이용하여 백색을 만들었다. 자연의 소색은 자연 자체의 산물이며 햇빛, 물, 바람, 불, 시간, 이라는 자연의 힘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연의 색이다. 〔계속〕



글·사진 이승철(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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