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교수의 민화재료학 특강 ② 다시금 전통 한지를 꿈꾸다

100여년 전만해도 한지의 종류는 40여종에 달하고 쓰임새도 무궁무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후 대량생산이 가능한 양지洋紙가 들어오면서
한지 수요가 급감해 제조법의 맥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외발뜨기와 도침이라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찾을 수 없는 독창적인 제조법이 있는 한지.
이번 시간에는 전통 한지의 제작과정에 대해 알아본다.


한지의 주원료는 닥나무(楮, Broussonetia kazinoki Sieb.)의 인피섬유이다. 닥나무는 뽕나뭇과에 속하며 흔히 닥나무와 꾸지나무라 부른다. 닥나무와 꾸지나무(構, Broussonetia papyrifera Vent)는 모두 우리나라 고유 품종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구분 없이 심어서 잡다한 유전자를 가진 잡종으로 변해 식별이 어렵다. 꾸지나무는 머구쟁이, 부닥, 개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산 닥나무는 겨울은 몹시 춥고 여름은 매우 더운 기후와 계곡과 구릉의 비옥한 사질토에서 재배해 인피가 두껍다. 태국이나 중국의 아열대 지방보다 수율收率이 높은 질 좋은 인피섬유를 가지고 있다. 또 닥나무는 논둑이나 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부한 재료 중 하나이다. 닥나무와 꾸지나무 이외에도 산닥나무(목안피木雁皮)와 삼지닥나무가 있는데, 이 수종들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전통 한지 제작을 할 때 부원료로 황촉규(닥풀)가 쓰인다. 닥풀은 초지할 때 분산제 역할을 하는 점성제이다.

나무의 변신은 무죄, 닥섬유 풀기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한지는 아흔아홉 번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날에는 닥종이를 백지百紙라 하였다.

① 원료 만들기
원료 거두기
– 겨울철인 11~2월 사이에 1년생 햇닥나무를 베어 한지 원료로 사용한다.
닥나무 찌기(닥무지)
– 닥나무를 증기로 쪄서 흐물흐물하게 해서 불순물이나 유기물을 제거하여 나무줄기로부터 껍질을 벗기기 쉽게 하는 과정이다.
박피剝皮, 건조乾燥, 일광표백日光漂白, 침지沈漬
– 백닥을 얻기 위해 벗겨낸 나무껍질에 붙어 있는 흑피黑皮를 제거한다. 겨울철의 차가운 냇물에 10시간 동안 불려서 겉껍질을 칼로 벗겨낸 것이 청피靑皮이다. 이 청피를 다시 벗겨낸 것이 백닥[白皮]이다. 백닥은 일정 시간 햇볕에 널어 말리면서 표백을 한다. 잘 마른 백피를 하루나 이틀 동안 차고 맑은 냇물에 담가서 불린다.

② 잿물 만들기와 원료 삶기(닥죽 만들기)
메밀대, 콩대, 짚을 태운 재를 뜨거운 물로 걸러 내거나 우려낸 다음 체로 걸러 잿물을 만든다. 잿물은 닥섬유의 섬유소를 지나치게 파괴하지 않고 광택을 내주며 오염 문제를 해결해준다. 물에 충분히 불린 백피를 약 30~40㎝ 정도 크기로 적당히 잘라 쇠솥에 넣고 만들어둔 잿물과 함께 쇠죽 끓이듯이 4~5시간 푹 삶은 뒤 일정 시간 뜸을 들여 건져낸다.

③ 불순물 제거 및 일광유수日光流水 표백하기
닥 원료를 일정 시간 닥솥에 삶은 후 2~3시간 정도 그대로 두어 뜸을 들이고 흐르는 맑은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둔다. 이 과정에서 섬유질 이외의 당분, 잿물기, 기름기 등을 다시 없애준다. 특히 물속에 담가놓고 원료 전체에 햇볕이 골고루 내리쬐도록 자주 고르게 섞어 뒤집어주면 백피가 더욱 하얗게 표백된다. 원료를 물속에서 건져내어 잡티(표피, 상처, 먼지, 작은 모래 등)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한다.

④ 두들기기(고해叩解)와 섬유 풀기(해리解離)
티를 골라낸 백닥을 닥돌 위에 올려놓고 닥방망이로 40~60분 정도 두들겨 찧는다(고해). 이 과정이 너무 힘들어 조선 시대에는 죄인들에게 형벌로 이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고해가 끝나면 해리를 한다. 곤죽이 된 섬유가 완전히 풀리도록 하는 과정으로 완전하게 풀린 원료를 지통(종이를 뜰 때 그 재료를 물에 풀어 담는 큰 나무통)에 넣고 물과 골고루 잘 섞이도록 대나무 막대로 충분히 저어준다. 옛날에는 흐르는 개울가에 망을 놓고 완전히 섬유를 풀어놓았다. 완전히 해리된 원료에 부원료 닥풀(황촉규)을 넣고 섬유가 전체적으로 일정한 농도를 유지하도록 잘 저어준다.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뜨는 법

⑤ 종이뜨기(초지抄紙)
충분히 풀린 닥섬유는 닥풀, 물과 함께 초지통에서 섞는다.
닥과 물의 혼합 비율은 약 2:8이고 닥과 닥풀의 비율은 2:3이나 2:4로 섞는다. 초지통에 닥과 닥풀, 물을 일정 비율로 희석한 후 종이뜨기 작업에 들어간다. 초지통에 풀어헤친 닥섬유를 미세한 틈으로 이루어진 대발과 이를 지탱하는 발틀로 건져 지면을 만든다. 닥섬유와 물의 결합으로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초지법은 발, 발틀의 외형 차이와 섬유 안착 방법, 물질하는 법 등 초지법의 차이에 따라 크게 전통 초지법과 개량 초지법으로 나눈다. 전통 초지법에는 외발뜨기와 장판지 뜨기가 있으며 개량 초지법에는 쌍발뜨기가 있다.

외발뜨기
–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초지 방법이다. 먼저 고해된 인피섬유를 완전히 푼 후, 초지통에 넣고 물과 닥풀 분산제가 잘 분산되도록 풀대 막대기로 충분히 저어준 다음 외발을 써서 낱장으로 종이를 뜬다. 외발뜨기란 명칭은 직사각형의 조그만 발 하나를 턱이 없는 틀 위에 얹고 공중에 매달린 가로막대에 한 줄로 매달아 앞뒤 좌우로 흔들어 종이를 뜨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 용어이다. 외발은 앞뒤 좌우로 물을 흘려보내(물질) 닥섬유가 서로 엇갈리게 결합하므로 인장력이 뛰어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외발은 외곽에 발틀 턱이 없는 평평한 상태이므로 발 틈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보다 외곽으로 흘려보내는 양이 더 많아 섬유질이 발에 안착하는 시간이 적게 든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섬유질 방향도 결정되므로 종이 표면을 잘 살펴보면 섬유와 대살의 배향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물질은 위에서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는 틀 위에 발을 놓고 ‘앞물’을 떠서 뒤로 버리고 ‘옆물’을 떠서 반대쪽으로 버리는 동작을 서너 번씩 반복하면 적당한 두께의 습지가 만들어진다. 더 두껍게 하고자 할 때는 옆물질을 더 많이 하면 된다. 앞물질을 할 때는 자기 앞의 물을 떠서 뒤로만 버릴 수 있으므로 뒷물을 떠서 앞으로 버리지 못한다. 습지 두께가 얇아 뜨는 사람이 자기 앞쪽의 습지 두 장을 서로 엇갈리게 겹쳐야 종이가 한 장 만들어진다. 이러한 합지 방식 때문에 외발지를 음양지라고도 하는데, 이 초지법에는 많은 숙련이 필요하다. 외발뜨기는 섬유가 ‘정井’자 모양으로 얽혀 질기고 강한 종이를 만들 수 있다.

장판지 뜨기(대형지)
흘림뜨기의 일종으로 조선 시대 종이 뜨는 일을 맡아 하던 조지서造紙署에서 장판지, 장지, 농선지, 과지, 왕조실록 등 크기가 큰 한지를 뜰 때 사용하던 방식이다. 3명이 1조가 되어 물질한다. 2명은 턱이 없는 틀에 얹은 발 양쪽을 잡고 앞물을 떠서 뒤로, 뒷물을 떠서 앞으로 버리고 왼쪽 물을 떠서 오른쪽으로, 오른쪽 물을 떠서 왼쪽으로 버리는 걸 반복하여 두께를 잡으며 나머지 1명은 습지를 포개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습지를 가지고 원하는 두께에 맞게 합지를 하여 쓴다.
장판지 뜨기는 종이의 섬유조직이 완전한 ‘정井’자 형태를 이루면서 서로 얽히므로 지면이 매우 고르며 종이의 인장 강도와 인열 강도가 매우 강한 것이 특징이다. 장판지는 종이 크기가 커서 발과 틀 형태가 외발과는 달리 커다란 정사각형이며, 발촉이 두껍게 제작되어 발 중간 매김이 엇갈리게 이루어진다. 발틀에서 발을 지탱하는 바디 수도 많은데, 바디는 가는 대나무를 쓴다. 이 방식으로 뜬 종이는 먹물 번짐이 원형을 이루는 장점이 있으며 200호 이상의 초지도 가능하다. 장판지 초지법은 조지서나 전주, 의령, 가평 등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나 대개 비슷하다. 이 방식은 1970년대 초반까지도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장판지 뜨기를 할 수 있는 지장도 발과 발틀 형태도 모두 사라져 그 이름만 유지되고 있으나 최근 복원시도 중이다.

쌍발뜨기(개량 초지법)
1900년경 일본에서 들어와서 전주를 중심으로 전파된 초지 방법이다. 쌍발은 물을 얼마나 뜨느냐에 따라 종이 두께가 결정된다. 틀 외곽에 야트막한 턱이 있어 지통 물이 그 안에 고여 있다가 섬유질만 남기고 밑으로 빠져나가 지면이 형성된다. 쌍발이란 이름은 원래 턱이 있는 2개의 손잡이가 달린 큰 발틀에 발이 들어가 붙은 것이다(발틀 형태). 지금은 사각형 큰 발이 하나 들어가고 가운데를 헝겊으로 기워놓아서 한 번에 2장씩 나오게 되어 있다. 발과 틀이 무겁고 커서 지붕에 꽂힌 여러 개 대나무 막대에 매달아 낭창낭창하게 탄력을 주어 물치기하기 좋게 되어 있다. 쌍발뜨기는 발 형태가 보이게 뜨는 방식과 보이지 않게 뜨는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차이는 발밑에 또 다른 섬유층(고운 망사와 견)을 두고 뜨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방식은 합지를 하지 않으므로 홑지로서 얇고 투명한 화선지 뜨기에 알맞다. 엄밀히 말해서 쌍발뜨기는 가둠뜨기와 흘림뜨기의 복합형으로 두께가 일정하고 표면이 고른 종이를 뜰 수 있으며 외발뜨기로 종이 1장을 뜰 때 쌍발뜨기로 4장을 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외발뜨기와 섬유 배향이 달라 종이가 질기지 못하고 먹물 번짐이 타원형을 이루는 단점이 있다.

질기고 오래 가는 한지의 탄생

⑥ 물빼기
널판자 위에 먼저 작은 가마니나 바탕지를 깔고 나서 그 위에 습지를 한 장씩 포개어놓는다. 이때 종이 사이에 왕골 혹은 나일론줄을 끼워 나중에 종이를 떼어내기 좋게 한다. 여러 겹으로 쌓아놓은 습지 위에 다시 널판자를 얹고 무거운 돌을 올려놓거나 지렛대로 눌러 하룻밤 동안 물기를 뺀다.

⑦ 말리기
전통적으로 햇볕에 널어 말리거나(일광건조) 열판 또는 방바닥에 펴서 비로 쓸어가면서 말리거나(목판건조), 벽에다
붙여서 말린다(온돌건조, 지방건조). 일광건조는 주로 장판지나 큰 종이를 건조할 때 사용하는데, 개울가에서 초지한 장판지를 자갈 위나 줄에 널어서 말리는 방식이다. 온돌건조(지방건조)는 바닥이 장판지로 된 온돌방에 종이를 포개어 붙여놓고 군불을 지펴 서서히 말리는 것이다. 목판건조는 목판을 벽이나 목판 지대에 약간 기울여놓고 종이를 한 장씩 서서히 떼어내어 구김이 생기지 않도록 목판 위에 습지를 펴고 말 털 등으로 만든 건조비로 쓸어내린다.

⑧ 다듬기(도침搗砧) 및 선별
마지막으로 전통 한지의 종이 표면 가공기술을 도침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해졌다. 보통 종이를 수십 장씩 포개놓고 홍두깨나 디딜방아 모양으로 생긴 도침기로 여러 번 두들긴다. 도침 처리를 하면 종이의 치밀성과 표면의 평활성이 향상되어 품질이 좋은 한지가 만들어진다.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한지의 특성상 지나치게 흡수성이 크고 번짐이 불규칙하며, 보푸라기가 이는 등의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이다. 도침을 한 종이는 표면이 고르고 섬유 사이의 틈이 메워져 인쇄할 때 번짐 현상이 줄어들며, 광택도 좋아진다. 우리 선조가 세계 최고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쓴 종이 표면 가공기술이 바로 도침인데, 도침을 하면 종이 품위가 향상되며 성질도 변화시킬 수 있다. 도침지는 우리나라 회화가 중국과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독특한 기법과 양식을 지닌 수묵화와 채색화가 나타나게 했다. 다음 연재는 ‘한지의 종류와 좋은 한지 고르는 법, 그리고 화선지’에 관한 이야기이다.〔계속〕



글·사진 이승철(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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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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