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감추고 싶었으나 이름이 알려진 민화작가 석강 황승규

월간 민화 답사팀이 방문한 황승규 생가
민화작가 석강 황승규

민화작가 가운데 유일하게 세상에 알려진 화가는 석강 황승규다. 석강 황승규는 그의 작품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석강 황승규에 대한 이해는 우리나라 민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민화는 민중을 위하여 민중 화가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민화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민화가 미술사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은 지배층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의 주체를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 즉 민중 중심의 역사관이 정립되면서 민화에 대한 관심은 본격화되었다.
민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예술이다. 민화는 일반 민중의 실용적인 요구에 따라 그려진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림이다. 따라서 민화는 일정한 장소와 때가 있었다. 민화는 예술적 행위를 통한 그림이 아니라 사용할 장소와 시기가 결정된 이후에 작업을 시작하여 완성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민화는 공간적으로 인간이 생활하는 생활공간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생활공간을 편안하고 아늑하게 때로는 훈시적訓示的으로 장식하기 위해 이용된 실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화였다. 민화는 시간적으로 시기에 따라 그 용도와 기법, 주제를 달리하였다. 민화는 회갑이나 혼례 등의 행사와 일 년 중 중요한 절기 때마다 사용되는 그림으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었다. 이처럼 민화가 실용적인 그림이라는 인식은 민화의 보존에 악영향을 미쳤다. 즉 민화는 쓰고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보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연대가 올라가는 민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민화는 민중의 꿈과 사랑, 믿음을 표현한 그림이다. 민화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 공유한 꿈과 희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그림으로 민중의 삶과 얼과 멋을 느낄 수 있다. 민화에는 민중이 가지는 해학과 여유가 넘쳐흐른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몇 번씩이고 중첩된 화면을 그려내는 과정 속에서 능숙하고 넉넉한 사랑이 넘치는 그림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그려낸 꾸밈없고 순순한 민화의 세계 속에는 어린이의 꿈과도 같은 원색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 같은 민화의 기교적 서투름과 삶에 대한 솔직한 표현은 역설적으로 민화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민화는 작가가 드러나지 않은 그림이다. 민화는 민중을 위해 민중 화가에 의해서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에 작가와 제작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민화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면서도 그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첫째, 민화의 목적이 생활 속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실용적인 것이지 개성이나 독창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째, 민화를 그리는 작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화서의 화원을 양반이 아닌 중인 신분으로 차별대우한 것과 마찬가지로 민화를 그리는 화가들에게 사회적으로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림같은 황승규의 생애
황승규 산소. 생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황승규 산소. 생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황승규의 호는 석강石岡이며,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그러나 그는 호보다는 ‘황노인’이라는 별칭이 더 알려져 있었다. 그의 그림과 글씨를 ‘황노인 그림’ ‘황노인 글씨’라고 불렀다. 황승규는 1886년 11월 5일 아버지 건과 어머니 김녕 김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1962년 5월 12일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황승규의 이름은 셋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황응선黃應先이며, 평해황씨 족보에는 황기영黃玘英으로 되어 있다. 실제 불렀던 이름은 황승규黃昇奎로 알려져 있는데 족보에는 자字가 승규昇奎로 되어 있다.
실제 사용했던 이름은 황승규인데 호적상에 황응선으로 오른 것은 일제시대 창씨개명 때문으로 생각되며, 족보에 황기영으로 된 것은 항렬자를 따서 이름을 바꾸어 족보에 등재하였기 때문이다. 평해 황씨 족보에는 황승규가 기영玘英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승규는 경북 평해읍 기성에서 태어나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 황건은 평해 기성면 덕실에서 황대구黃垈九의 둘째로 태어났으며, 결혼 후 삼척으로 이주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장자우위의 상속으로 선대로부터 별다른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황승규의 아버지 황건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와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황승규의 가세는 한미할 수밖에 없었다.
황승규는 함창 김씨와의 사이에 외동아들 병한炳漢을 두었으며, 병한은 세 아들을 두었다. 황승규의 맏손자가 창회昌會인데,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서 재회載會로 기록되어 있다. 황승규의 계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승규는 기골이 장대한 6척 거구였으나 품성은 인자하고 온순하였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할 줄 모르고 남의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화투 한 벌만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밤새 화투 한 벌을 정성스레 그려 다음날 아침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이후 동네 화투는 그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늘 많은 친구가 함께 했으며, 인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황승규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은 옥람玉藍 한일동韓溢東이었다. 한일동은 당시 강원도 근대 서화가를 대표한 인물이었다. 황승규는 한일동보다 7살 연하였다. 두 사람은 말술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으나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황승규의 생가에 걸려있던 ‘石岡’이라는 현판은 바로 한일동의 작품이다. 한일동이 황승규의 호를 지어주고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난당하여 생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없다.
황승규는 다재다능하여 ‘칠능七能’이라고 불렀다. 시詩·서書·화畵·기棋·주酒·재담才談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나이 20세에 동네 사람들로부터 ‘문장가 어른’ 또는 ‘황문장黃文章 어른’으로 불릴 만큼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고 배우고자 하는 집념이 대단하여 장기·바둑은 스스로 익혀 그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의 손재주 또한 뛰어났다. 뒷간에서 용변을 보는 동안 한지를 꼬아서 만든 지승紙繩 씨앗 바구니를 만들어서 나오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재담才談은 좌중을 압도하였고 한번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몰랐다. 사랑방에 모여 든 사람을 상대로 얘기를 시작하여 말문이 터졌다 하면 삼국지는 한 달이 걸려도 끝나지 않았다. 구수하고 재치 있게 끌어가는 말솜씨는 이야기책 속의 주인공과 당시에 함께 살았던 듯이 생동감이 있어서 듣는 사람들은 밤새도록 보채고 성화를 대었다.

생계를 위해 배운 민화

황승규가 민화를 처음 배운 것은 이초시 어른으로 알려진 이규황李圭璜이다. 이규황은 황승규의 생가가 있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의 강 건너편 삼척시 근덕면 부남리에 살면서 대대로 민화를 그려온 집안이다. 이규황은 아들 이종하에게 민화를 전수하였다. 이규황은 1868년생으로 황승규보다는 18세 연장자였다. 이규황은 그의 아들 이종하李鍾夏와 황승규에게 민화를 가르쳤다. 황승규는 그림에 대한 실력이 출중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이규황에게 그림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도 못되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이후 스스로 자신의 손재주를 바탕으로 지혜를 모아 독학을 하였다.
재주가 좋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쇄도하였다. 당시 병풍의 수요는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다양한 용도의 병풍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혼병婚屛은 부부의 인연을 맺을 때 쓰는 모란 병풍, 신랑, 신부의 신방 분위기를 감싸주던 화조병풍이 있었다. 제병祭屛은 제사나 장례식 때 사용하는 것으로 글씨나 사군자를 색깔 없이 그렸다. 이외에 일상병日常屛으로 노인방 외풍을 막아주는 머리병풍, 아낙네가 화장할 때 가려주는 가리개 병풍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감상용이 아니라 장식을 위주로 하는 실용적인 병풍이었다.
황승규는 그림을 그릴 때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다. 아침 일찍 작업 시작하는 것을 보고 가족들이 이웃 동리 잔치를 보러 갔다가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와 보면 아침에 떠날 때 있었던 그 자리에서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점심을 걸러가며 끼니를 잊은 채 일만 할 때가 많았다. 때로는 먼 곳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한두 달 집을 떠나 유랑화공流浪畵工 노릇도 하였다. 호구지책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황승규는 그림을 그리는 그 자체를 즐겼다.
그러나 후손에게는 민화를 그리는 화업畵業을 전수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면 눈이 빠진다’고 할 만큼 힘든 작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환쟁이라는 사회적 멸시를 전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와서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화를 그리기는 하였지만 민화 작가에 대한 당시 사회적 지위는 매우 열악하였다.
황승규는 민화를 그리는 것과 함께 표구하여 병풍으로 만드는 작업도 손수하였다. 10폭 병풍을 기준으로 종이에 그릴 경우에는 15일 정도가 걸렸으며, 옥양목에 그릴 경우에는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당시 병풍 한 틀의 가격이 쌀 3~4가마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민화를 그려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황승규는 단청작업에도 참여 하였다. 오대산 월정사를 비롯하여 근덕면에 있는 신흥사의 단청 작업에 참여하였다. 단청 작업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황승규의 작품을 보면 유채油彩보다는 분당채粉唐彩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민화를 그리면서 단청안료를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승규는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 3체 모두를 잘 썼다. 민화에는 흔치 않는 화제畵題를 직접 썼다. 그리고 병풍의 뒷면에도 행서行書나 초서草書로 글씨를 써주었다. 그의 글씨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던 옥람玉藍 한일韓溢東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황승규의 글씨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소위 ‘민서民書’라는 것이다. 민서民書는 민화와 대칭되는 것으로 회화적이고 상형적인 글씨를 말한다. 민서民書는 인간의 본능적인 작태作態·교태嬌態·춘의春意 등을 은유적으로 쓴 글씨를 일컬으며, 작위적이고 해학적인 관념세계와 예술적 시각에서 형상화된 글씨라 할 수 있다. 익살스럽고 빈정거림에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민서民書는 사대부의 사랑방과 같은 장소에는 절대 금물이었으나 신혼방의 화조병풍 뒤에 종종 등장하였다.

평해 황씨 족보에는 황승규가 기영玘英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해 황씨 족보에는 황승규가 기영玘英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승규의 작품의 선과 색

황승규 민화의 특징은 선과 색에 있다. 대부분의 선은 두툼하고 힘차다. 그러면서도 온유하고 매끄럽다. 그래서 황승규 민화의 형상들은 원만圓滿으로 가득 차있다. 황승규의 색은 ‘색의 마술사’라고 불릴 만큼 색을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적赤 ·청靑·황黃·흑黑·백白의 색깔을 사용하면서 색상의 대비, 조화, 균형, 비례가 기막힌 관계를 이루며 색다른 멋을 보여주고 있다.
황승규의 민화병풍은 몇백 틀이 넘을 만큼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그 수만큼이나 산수도, 화조도, 책가도, 영모도, 문자도 등 다양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문자도다. 전체 민화의 약 80%가 문자도다. 황승규 문자도의 특징은 정형화된 문자도 속에 상감한 듯 상징성을 그려 넣고 문자를 중심으로 상단이나 하단에 산수, 화조, 책거리 등을 첨가하여 이중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화제畵題를 적었으며, 강렬한 단청류의 채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회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조문자도花鳥文字圖는 그의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걸작이다. 문자도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교훈적이고 길상적인 뜻을 지닌 문자를 통해 소망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그림이다. 특히 효제도는 문자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義·염廉·치恥의 여덟 글자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한 그림이다. 그리고 화조도는 꽃과 새가 한데 어울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다. 화조문자도花鳥文字圖는 이 두 가지를 상·하단에 이중으로 배치한 그림이다.
가회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거리 문자도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책거리그림은 책을 중심으로 문방사우나 혹은 이와 관련된 물건들을 그린 것으로 주로 선비들의 사랑방이나 서재를 장식하였다. 책거리그림에는 선비들의 애장물인 책과 문방사우를 중심으로 사랑방의 기물인 도자기·화병·화분·부채 등과 선비의 여가 생활과 관련된 술병·술잔·담뱃대 ·악기·도검·활·투호·바둑판·시계·대모 안경 등을 책 사이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책거리 문자도는 책거리그림과 문자도를 상·하단에 이중으로 배치한 그림이다.
이들 문자도에는 각 글자마다 4가지의 고사를 화제畵題로 기록하고, 글자 속에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효孝 글자에는 효와 관련하여 화제로 ‘대순탄금大舜彈琴, 왕상빙리王祥氷鯉, 맹종읍죽孟宗泣竹, 황향선침黃香扇枕’를 썼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고사를 그렸다. 진나라의 선비인 왕상이 계모를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드렸다는 고사, 순임금이 눈먼 아버지와 계모 이복동생의 구박 속에서도 효심을 지켜 요임금으로부터 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 오나라의 맹종이 한 겨울 눈 속에서 노모를 위해 뜨거운 눈물로 죽순을 자라게 했다는 고사, 후한 황향이 홀로된 아버지를 위해 여름에는 부친의 이부자리와 베개를 부채로 부쳐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자신의 몸으로 이부자리를 데워 따뜻하게 해드렸다는 고사를 그렸다.
제悌 글자에는 형제간의 우애와 관련된 화제로 ‘춘회재분春回載盆, 상체화홍尙花紅, 일난명원日暖鳴園, 척령화명和鳴’를 썼다. 그리고 관련된 고사를 그려 넣었다. 옥매화는 형제 우애가 좋아야 옥매화처럼 번창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산앵두나무의 꽃과 꽃받침, 꽃과 잎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제애를 상징한다. 할미새 두 마리가 정답게 벌레나 꽃잎을 나누어 먹는 모습은 형제애를 보여주며, 시끄럽게 우는 모습은 형제간에 다급할 때 서로 알려준다는 의미이다.
충忠 글자에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군신간의 화합과 관련하여 화제로 ‘비우간쟁比于諫爭, 용봉직절龍逢直節, 어변성룡魚變成龍, 하합상하鰕蛤相賀’를 썼다. 그리고 관련된 고사를 그려 넣었는데, 잉어가 용문을 차고 올라서 용이 되었다는 소위 어변성룡魚變成龍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새우鰕와 조개蛤는 그 발음이 화합和合과 유사하여 군신간의 화합을 이루어 충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信 글자에는 화제로 상림추풍上林秋風, 백안전신白雁傳信, 요지벽도瑤池碧桃, 청조애남靑鳥哀를 썼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요지춘궁瑤池春宮으로부터 서왕모西王母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청조靑鳥와 상림桑林에서 편지를 물고 온 흰기러기를 그렸다. 이는 믿음이 서로 약속하고 의사를 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禮 글자에는 화제로 ‘낙귀빈도洛龜負圖, 천지절문天地節文, 행단춘풍杏壇春風, 강론시서講論詩書’를 썼다. 예禮 글자와 관련된 그림으로 책을 진 거북이를 그렸다. 책을 등에 진 거북이는 중국 하도낙서河圖洛書 고사와 관련된다.
의義 글자에는 화제로 ‘록하지당祿荷池塘, 관저화조關雎和鳥, 도원결의桃園結義, 작작기화灼灼其花’를 썼다. 그림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桃園結義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토벌하자 백이, 숙제는 이를 부끄러이 여기고 수양산에 숨어들어 고사리와 나물로 연명하였다는 고사를 그렸다.
염廉 글자에는 ‘염계한천廉溪寒川, 전진후퇴前進後退, 율리송국栗里松菊, 울림재석鬱林載石’를 썼다. 관련 그림은 수천만 리를 날고 배가 고파도 조를 조아 먹지 않고, 오동나무 그늘에서만 잠을 잔다는 청렴함을 상징하는 봉황을 그렸다. 염치를 아는 군자는 들어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뒷걸음질 치는 게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요임금 때 허유許由는 문왕이 제상의 자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당장 냇물에 귀를 씻었고, 이 소리를 들은 소부巢父는 자기의 소가 그 물을 마실까 두려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치恥 글자에는 화제畵題로 ‘수양매월首陽梅月, 이제청풍夷齊淸風, 유유도중悠悠途中, 사금불수辭金不受’를 썼다.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는데 그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지르니 그냥 산속에서 타죽었다는 일화와 관련한 그림을 그렸다. 백이와 숙제의 수양매월首陽梅月를 형상화한 매화와 그들의 무덤, 위패, 월상도를 그려 넣었다.

책거리 효제문자도 8폭 병풍, 황승규 作, 지본채색, 33×104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책거리 효제문자도 8폭 병풍, 황승규 作, 지본채색, 33×104cm,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후손에게 남겨준 산수화

민화에서 산수화는 정통회화의 관념산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보다 자유스럽고 독창적인 면이 있어 이들 그림과 구분된다. 산수민화山水民畵는 소상팔경과 관동팔경을 주로 그렸다. 황승규의 산수민화 가운데 대표작은 손자 황창회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소상팔경을 기본으로 하면서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아서 그린 10폭의 관념산수도이다.
황승규가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 의도는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라 후손에게 남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옥양목이나 종이에 그린 다른 작품과는 달리 비단에다 온갖 정성을 쏟아서 완성하였다. 그리고 병풍 뒷면에도 자신의 글씨로 후손들이 지켜야 할 일들을 유언하듯이 쓰고 있다. 황승규는 병풍 뒷면의 글씨를 다른 사람의 글씨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손자 황창희는 다른 어떤 사람의 글씨보다 조부의 글씨로 써 줄 것을 요청하였고 황승규는 손자의 청을 받아들여 직접 병풍 뒷면 8폭에 글씨를 썼다.
산수도는 민화풍이기는 하지만 정통산수화에 가까운 걸작임을 알 수 있다. 황승규는 자신이 민화를 그린 환쟁이가 아니라 정통 산수화를 그린 문인화가로 후손들에게 기억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최후의 작품은 모든 역량을 쏟아서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손자 황창회도 이 병풍을 조부 황승규를 모시듯이 극진한 마음으로 보관하고 있다. 황승규는 떠났지만 황승규의 산수화는 안방에서 집안의 울타리처럼 후손을 지켜보고 있다.
손자 사랑은 작품으로 승화되고
황승규의 작품은 손자에 대한 사랑이다. 황승규는 평해에서 갓 이주해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전한 생활을 하였다. 황승규는 집안을 돌보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면 전국을 돌아 다니는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의 유랑생활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손자가 태어나면서 손자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황승규의 생활을 바꾸었다. 유랑생활로 아들을 교육시키지 못한 황승규는 손자 교육을 통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째 집안을 돕고 있는 손자 황창회를 삼척공업고등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근덕면 동막리에서 40리 떨어진 삼척시내에 하숙을 시키며 손자를 공부시켰다.
한편 그림 그리는 곳에 손자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민화 작가는 환쟁이라는 이름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민화를 그리는 일을 가업으로 전수하고 싶지 않았다. 환쟁이로 불리며 받았던 설움을 손자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손자에게만은 신식 교육을 통해 가문의 입지를 세워 줄 것을 기대하였다.
이때부터 황승규는 손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황승규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민화로 승화되었다. 손자 교육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황승규의 민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손자가 그리우면 40리 밤길을 걸어서 손자의 하숙집을 찾아가 등교하는 손자의 얼굴을 보고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말이면 사랑방 문을 열고 신작로 정류소에 손자가 버스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손자 황창회는 할아버지의 소원을 절대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효손孝孫이었다. 황승규의 소원은 손자가 결혼하여 증손자를 보는 것과 공직으로 나아가 환쟁이로 살아오면서 받았던 설움을 떨쳐버리는 것이었다. 손자 황창회는 24살에 결혼하여 황승규의 품에 증손자를 안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평생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최근 산림조합 조합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묘역을 정비하여 할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마무리했다.

월간 민화 답사팀이 방문한 황승규 생가

▲월간 민화 답사팀이 방문한 황승규 생가

황승규 생가. 손자 황창회가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황승규 생가. 손자 황창회가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황승규가 남긴 삶의 흔적

황승규의 생가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 있다. 7번 국도변에 있는 생가는 황승규가 직접 지은 집이다. 강가의 돌을 가져다 돌담을 쌓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비교적 큰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 주위에는 배나무와 살구나무 감나무 그리고 호두나무까지 울타리를 치듯이 심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방 문을 열고 사랑하는 손자가 버스 내리는 모습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가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안방 처마 밑에 있던 ‘石岡’이라는 현판은 물론 기둥에 걸려있던 주련柱聯도 도난당하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은 짙은 하늘색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인심도 변하여 들어오는 대문도 집 앞에서 옆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태풍 루사로 인해 기둥만 겨우 남았던 집을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석강 황승규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허물어진 돌담 사이로 살구꽃이 피고, 감나무 위에서 까치가 울면 이곳이 민화가 생산되었던 예술가의 집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황승규의 산소는 생가 건너편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2000년 동해안 산불로 산에 있던 모든 나무들이 불탔는데 황승규 산소의 소나무는 산소를 지키는 호위병처럼 10여 그루가 남아 있다. 소나무가 산소를 지켜주듯이 황승규는 죽어서도 후손을 돌보고 있다. 그가 살았고 후손들이 살고 있는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가 바로 눈 아래 있다. 그 마을 한가운데 숲속에 생가가 바로 보인다. 그는 죽어서도 후손 곁을 떠나지 않았다.
후손들은 언제나 울타리가 되어주는 조부의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비석에는 황승규의 예술의 세계에 대한 기록은 한마디도 없다. 민화를 그리는 환쟁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했던 황승규의 마음을 후손들이 배려한 것일까? 그의 삶에 대해 비문은 “仁慈하고 溫厚한 性品에 勤勉誠實하며, 隣友相助하고 上敬下愛하는 孝親 등 崇祖思想이 투철하여 隣近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푸른 동해바다를 따라서 백두대간이 흐르고 그 사이 언덕 위에서 석강 황승규는 진정한 민중의 모습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제1회 월간 <민화> 학술답사 차장섭 교수 특별강연

차장섭 교수월간 <민화> 제1회 학술답사를 더욱 뜻깊은 학술행사가 되게 한 것 중 하나는 차장섭 삼척대 교수가 맡은 해설과 세미나였다. 동해의 동해척주비와 죽서루 답사에 이어 시립삼척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특강에서 차 교수는 강원도 민화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명쾌한 강의로 많은 호응을 받았다. ‘민화는 작가가 없는 그림’이라는 통념을 깨고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민화작가인 황승규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관심과 흥미를 모았다. 본래 강원도 민화 작가의 존재와 계보가 처음 발표된 것은 본지 발행인이기도 한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의 논문을 통해서였다. 아래 소개하는 차 교수의 특강 원고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알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한 것이다. 차 교수의 특강 원고를 전재한다.

참고문헌
윤열수,『민화이야기』디자인 하우스, 1995
윤열수,『민화』 Korean Art Book 예경, 2000
가회박물관,『문자도』가회박물관출판부, 2004
김영학,『민화』빛깔있는 책들 147, 대원사, 1994
임두빈,『민화란 무엇인가』서문문고, 1997
유용태, 「석강 황승규」『江原의 美』제1집, 강원일보사, 1993

 

글 : 차장섭(강원대학교 교수)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