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당 김은호의 <승무> 초본② – 초본으로 그린 한국화

이당 김은호의 <승무> 초본②
초본으로 그린 한국화

이당의 <승무>는 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지훈의 시 「승무」다. 조지훈의 장남의 증언에 의하면 조지훈은 이 시를 쓰기 위해 이당의 작품 앞에서 거의 두 시간을 서서 7~8점의 스케치를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 <승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이당은 왜 「승무」를 그렸나

이당 김은호의 대표작을 꼽자면 단연 <승무>를 꼽을 수 있다. 김은호가 제일 처음 <승무>를 주제로 작품을 그린 것은 1922년으로, 그는 제1회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한 <미인승무도>로 4등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 그는 다양한 <승무> 연작을 제작해 출품하였으며, 출품작 외에도 많은 <승무>를 그렸다. 여기 소개하는 초본을 가지고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있는데 그 중 한 점은 현재 인간문화재 가야금 병창 박귀희 씨가 소장 중이다. 이당이 왜 그토록 <승무>를 많이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평소 섬세한 채색미인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당에게, 화려한 법의를 입은 미모의 여승이 주인공인 <승무> 도상은 관심을 끌 만한 소재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또한 그가 마지막 어진화사였다는 점을 통해 왜 섬세한 그림에 치중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a

「승무」 초본, 왜 제작되었나

이당 김은호는 평생에 걸쳐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로는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 등 대부분 한국 화단의 거목들이다. 그는 자신의 문하에 들어온 제자들을 가르칠 때 승무 그리기를 필수코스로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학원교육이 아닌 도제식 교육 방식으로 그림을 가르쳤는데, 그 때의 교육내용과 방법을 이 작품 오른쪽 하단에 쓰여 있는 글씨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림의 크기를 정해서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 초본을 보고 그림을 그릴 사람에게 그리는 방법을 써준 것으로, 초본과 같은 크기로 그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은 이 초본을 보고 그리는 사람이 다양한 크기로 연습하라고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고 그대로 그리는 것뿐 아니라, 보고 그리면서 크기 조절 연습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은호는 종로에서 미산이발소를 운영했다고 한다. 해방 후 친일작가로 낙인찍히면서 그림만으로 먹고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낙심하여 방탕한 삶을 살거나 제자들을 키우는 일에 소홀한 적이 없었다. 이당 김은호, 그가 있었기에 한국화단의 발전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s

 

글 : 이다정(가회민화박물관 학예사)
사진제공 : 가회민화박물관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