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의 동양미술 전문 박물관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기메동양박물관(Musée Guimet)은 리용의 사업가 에밀 기메에 의해 1889년 문을 연 유서 깊은 박물관으로 유럽에 있는 박물관 가운데 가장 많고 뛰어난 우리 민화들을 수장하고 있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1888년 샤를 바라가 한국에서 수집하여 기증한 민화들과 2001년에 현대화가 이우환 씨가 기증한 민화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정병모 교수

정병모

십여 년간 해외 박물관 또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 민화를 조사한 정병모 교수의 여행기를 연재한다. 정병모 교수는 현재 한국 민화의 정수를 담은 도록을 총괄 기획하고 있고, 한국 민화의 해외전, 외국에서의 한국민화 축제, 민화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 우리 민화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현재 정병모 교수는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이면서, 한국민화학회 회장과 사단법인 한국민화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민화 찾아 3만 리, 긴 여정의 시작

정병모 교수2002년 3월 어느 날 내 제자이자 초등학교 교사인 심성미 선생이 유럽 연수를 다녀온 뒤,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민화 특별전 도록을 들고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시회 제목이 ‘한국의 향수(Nostagies coréennes)’였다. 도록을 뒤적뒤적 보다가 왜 이 전시에 대해 진작 알려주지 않았는가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도록에 적힌 전시회 기간은 2001년 10월 6일부터 2002년 1월 14일까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주 후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화가 왔다. 기산 김준근 풍속화를 모사하는 작업을 하는데 자문위원으로 참석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느 박물관 소장품이냐 물었더니, 기메동양박물관이라 했다. 순간, 묘한 인연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에 이끌려, 2002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에 파리를 향했다.
“대한미국, 짝짝 짝 짝짝!”
파리 센 강의 유람선 위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발음도 제대로 안되는 우리말로 당시 유행한 우리의 월드컵 응원구호를 외치며 웃고 즐겼다. 눈시울이 찡한 장면이었다.
풍속화 모사의 일정을 마친 뒤, 기메동양박물관 동양부장인 삐에르 깜봉(Pierre Cambon) 선생의 도움으로 지하 창고에 수장된 민화들을 조사할 기회를 가졌다. 우리 민화가 이렇게 매력적이었던가? 지하 수장고의 쌀쌀한 기운은 나의 흥분된 마음을 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삐에르 깜봉 선생이 당시 유럽 매스컴에서 다루었던 민화 전시회 기사를 정리한 스크랩북 두 권을 보여주었다.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반응입니까?”라고 물었더니, “다른 전시회보다 더 뜨거운 반응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의 보배와 같은 민화를 세계화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삶의 방향이자 학문의 방향을 잡은 뒤, 틈만 나면 한두 나라씩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 민화를 조사하러 다녔다.
“민화 찾아 수만 리”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까치호랑이, 책거리 등 명품 수두룩

에펠탑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기메동양박물관(Musée Guimet)은 리용의 사업가인 에밀 기메(Emile Guimet, 1836~1918)에 의해 설립되어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그 문을 열었다. 아시아 미술을 집중적으로 수집했고, 후에 그 범위를 확장하여 지중해, 이집트, 소아시아, 북아시아, 중국, 일본미술을 망라하게 되었다. 이 박물관은 유럽에 있는 박물관 가운데 가장 수가 많고 뛰어난 민화들을 수장하고 있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1888년 샤를 바라가 한국에서 수집하여 기증한 민화들과 2001년에 현대화가 이우환 씨가 기증한 민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물 수장고에서 본 민화 가운데 압권은 다. 이것은 1999년 구입한 작품이다. 일본식으로 복잡하게 표구된 이 작품은 흰 띠가 번쩍이는 갈색 호랑이가 붉은 입을 벌리고 왼쪽으로 돌아서고 있는데, 역시 동물의 왕다운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 위에 까치는 몸을 기울여 호랑이의 등 뒤에 대고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이 그림의 특색은 배경에 있다. 녹색의 하늘과 황색의 땅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의 까치호랑이가 옅은 채색이 곁들어진 수묵화로 그려진 것에 비해 이 작품은 화면 전체에 채색을 베풀었다.
유명한 화가의 안목을 거친 탓인지, 이우환 선생이 기증한 민화들도 하나하나가 명품이었다. 책거리, 문자도, 화조화, 산수화, 인물화 등 다양한 제제의 민화를 수집, 기증했다. 그 가운데 책거리들이 볼 만한 것이 많았다. 내가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라는 책에서 “에로틱한 책거리”라고 소개한 이 는 기발한 상상력에 무릎을 치게 하는 명품이다.
남성과 여성의 물품과 침구, 옷가지로 암시한 에로티시즘은 한국적 은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매력적인 책거리 병풍이 있다. 키가 작은 책거리인데, 책가, 즉 시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가로 짜인 책거리는 크기가 작고 공간이 부족한 민화에는 적절치 않다. 그런데 이 병풍에서는 암시와 상상력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화면 앞의 시렁은 자유롭게 아름다운 공간구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렁 때문에 가뜩이나 좁아졌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넓은, 아니 무한한 상상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어떤 물품은 일부만으로 암시하고, 어떤 것은 시렁을 넘나들며 배치되어 시렁 안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무명화가 앞에서는 그림 전면은 좁고 작은 공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놀라운 반전인 것이다.

 
서민적 상상력 가득 찬 ‘자연의 꿈’

“한국의 향수” 전은 우리 민화의 키워드가 ‘추상(abstract)’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민화들의 기증자인 이우환 선생은 민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추상적인 환상(abstract fantasy)”을 들었다. 사실 민화의 특징 가운데 추상적인 면을 처음 지적한 이는 조자용이다. 이 선생 역시 민화 속에 담긴 구성미와 추상적 표현을 민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본 것이다. 유럽의 매스컴에서도 이 선생이 바라본 민화의 관점에 동감했다. 한결같이 우리 민화의 특색으로 한국적인 추상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로 대변되는 조선이 이웃 중국 및 일본과 달리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회화를 창출한 점에 많은 유럽의 매스컴에서 놀라움을 표한 것이다.
도록의 표지나 포스터에 실린 그림은 그 전시회 기획자의 전시방향이나 안목을 가늠하는 나침반과 같다.
“한국의 향수전” 도록의 표지에는 가 실려 있다. 거북이가 입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자 그것은 하늘에서 구름이 되었다. 그 주변의 산하는 겨울철의 서리처럼 날카롭게 솟아있다. 이 그림에 대해 프랑스 미술평론가 베레니스 조프르와 수네떼르(Bérénice Geoffroy-schneiter)는 “비단의 파라다이스-한국의 병풍들”이란 제목의 전시회 논평에서 “특히 바다 풍경 한가운데 마지막 숨을 내쉬는 거북이가 환상적 세계의 부서지기 쉬운 상징”이라 했고, 조선민화는 한마디로 “자연의 꿈”이라고 은유했다. “자연의 꿈”이란 개념은 우리 민화에 적절한 평가인 것 같다. 루브르박물관(Louvre musée) 잡지에 실린 이 전시회 평에서는 조선민화를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주제들에 의해 고취된 주제들을 탁월한 폭을 갖는 추상적 구성 속에서 발전시킨” 그림이라고 보았다.

올 2월 다시 사진작가 김종욱 씨와 함께 파리를 찾았다. 《한국의 채색화》 도록에 수록할 민화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이번에도 피에르 깜봉 선생의 도움으로 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주요 민화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찍어야 할 소장품이 많은데 허락된 시간은 이틀뿐이라, 우리는 점심까지 걸러 가며 저녁 늦게까지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지만 카메라의 우산 조명 앞에 민화들이 아름다운 빛을 발할 때, 배고픔과 피곤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센 강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민화를 보고 유럽인들이 보내는 찬사를 떠올려 보았다.
“한구미나, 짝짝 짝 짝짝!” ​

 

글 : 정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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