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⑧
전남 담양 객사리와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배 모양의 ‘행주형지세行舟形地勢’에 돗대를 상징하는 탑이나 당간을 세운 일은 고려 때 이른바 풍수風水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상당히 유행한 듯하다. 청주읍성 용두사지 철당간, 화순 운주사 계곡에 천불과 더불어 조성한 천탑들도 그 좋은 예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조선 시대 사찰의 당간이 지역 고을의 읍치당간으로 재활용됐을 법하다.
당간은 수호신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고을 통치공간의 위세를 상징했던 것이다.

글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도1 이태호, 15m 높이의 담양 객사리 석당간, 2022. 1. 면지에 수묵 스케치, 64x24cm


지난 5, 6, 7월호 세 번에 걸쳐 연재한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편에서, 우리나라 사찰 당간의 형태를 살펴보았다. 신라와 고려에는 익산 미륵사지 석당간石幢竿을 제외하고는 둥근 쇠기둥 철당간이 주류였다. 도르래가 설치된 당간의 꼭대기는 용머리 장식의 용두당간, 용두보당龍頭寶幢으로 불렀다.

사원 장식물에서 고을 수호신으로

고려시대에는 용두 외에 봉황 머리를 당간의 꼭대기 장식으로 활용했던 사례도 전한다. 고려 인종 1년(1123) 송나라 사신으로 내조했던 서긍徐兢이 밝혀 놓았다. ‘개성 흥국사興國寺 법당 뒤 금동당간金銅幢竿 정상에 비단 깃발 당幢과 봉황 머리 봉수鳳首를 장식하였다’라는 것이다.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와 또 다른 형태의 상륜부는 고려 시대 석조 당간으로 전남 나주와 담양 두 지역에 전한다. 이들을 전북 부안의 고려 당간지주와 더불어 익산 미륵사지 신라의 석당간 전통을 이은 호남 지역의 특징적인 석조물 형식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 시대 나주 동점문東漸門 밖 석당간(보물 제49호) 상륜부 장식은 지붕 모양의 8각 보개寶蓋와 연봉형태의 보주寶珠를 석조로 마감했다. 용두당간에 보이는 도르래 설치물이 없다. 석당간의 경우는 철조 당간과 달리 깃발을 거는 기능이 퇴화했을 수도 있겠다. 조선 후기에 복원한 담양 객사리 석당간(보물 제505호) 상륜부의 경우에는 풍경이 달린 이중 원형 철제와 그 위에 삼지창 모양이 장식되어 있다(도1, 도7). 두 석당간은 배 모양의 고을에 돛대를 세웠다는 ‘행주형行舟形 지세’의 표징으로, 언젠가부터 번영과 수호의 지역 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좌) 도2 담양 남산리 5층석탑, 고려, 높이 약 7m, 왼쪽 뒤로 석당단이 보인다
(우) 도4 당간지주와 중건비


담양 석탑과 석당간 고려 절터를 지키고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절터를 지켜온, 담양읍 객사리 석당간의 외모와 장식물은 온전하다. 2.5m의 당간지주와 15m의 당간 기둥 모두 고려 형식으로 여긴다. 이 연재를 염두에 두고, 올해 1월에 답사했고, 늘씬하게 솟은 석당간 전체를 스케치해 놓았다(도1). 담양 객사리 석당간은 조선 시대에 지역의 지킴이로 변했지만, 인근 남산리 5층석탑(보물 제503호)과 함께 고려 사원의 상징물이었다. 높이 7m가량의 5층석탑은 네 모서리 곡선으로 솟은 옥개석이 유난하나,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과 비교할 정도로, 백제계 양식을 갖춘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꼽힌다(도2).
보물로 지정된 석탑과 당간을 연결해 공원으로 정비하면서, 흔적도 없던 고려의 절터 건물지나 우물 등이 최근 확인되었다. ‘太寺’ 혹은 ‘大寺’, ‘卍’ 자의 명문 기와나 청자 편들이 출토되었다. 대체로 석탑이나 당간의 조성 시기와 비슷한 10세기 후반쯤의 유적지로 추정했다. 담양 남산을 배경 삼아 정비된 절터에 남은 석탑과 석당간 두 유물을 함께 파노라마로 찍으니, 고려의 커다란 사찰공간의 위세도 그려진다(도3).
광주와 순창을 잇는 도로가 확장되는 바람에 두 유적이 분리되고, 각각 행정 지명도 다르다. 이 담양 길에서는 읍내 관방천 둑의 팽나무 길과 나란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열 지은 가로수길로 유명하다. 가로수 길가의 담양 객사리 석당간은 지명대로 관아의 객사客舍가 있던 자리에 있던 것이다. 담양 석당간 곁에는 명문 비석이 세워져 있다(도4, 도5). 음각으로 새긴 단정한 행서체 중건비 비문의 내력은 아래와 같다.


도3 담양 남산 아래 고려 5층석탑과 왼편 길가 석당간



돌기둥이 세워진 해를 알기는 어려우나, 대개 이 고을이 조성되며 설치되었을 것이다. 어느 해에서 갑인년(정조 18년, 1794) 사이에 큰바람으로 부러져 나무로 대체했다. 지난봄에 또 넘어졌다. 이번에 처음처럼 중건했다. 기해년(헌종 5년, 1839) 3월의 일이다. 숭정崇楨 기원후 네 번째 기해己亥 3월 일에 담양부사 홍기섭이 쓰다. [石棹之立年不可攷 盖自設邑始 幾年至甲寅 爲大風折 以木代立 昨春又頹 今則如初重建 歲己亥三月也 崇楨紀元後四 己亥三月 日 知府 洪耆燮記]


‘정조 18년(1794) 태풍으로 석당간이 쓰러져 나무로 대체했다가 헌종 5년(1839) 3월에 다시 돌로 바꾸었다’라고 밝힌 이 중건비는 담양부사 홍기섭이 지었다. 홍기섭은 같은 해 4월에 공주판관으로 이동했고, 새 부사 이규수李奎秀가 4월에 부임했다. 그러니 부사의 이임에 맞춘 치적治積 공덕비에 해당하겠다.
부사 홍기섭은 남양홍씨로 자가 수경壽卿이다. 1816년 진사시에 급제했고, 비변사에 근무한 뒤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했던 것 같다. 함열현감(1829-1831), 예천군수(1831-1835)를 거쳐 담양부사(1836.11-1839.3)로 부임하였으며 이후 공주판관(1839-1840), 홍주목사(1840), 상주목사(1841-1843), 개성유수(1849-1850), 황해도관찰사(1850-1852),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이 비석의 뒷면에는 중건에 기여한 유사有司·호장戶長·읍리邑吏 등의 담양부 관리들도 보이나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이 비석은 철종 때 담양부사 황종림(黃鍾林, 재임 기간 1854-1857)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나란히 놓여 있다.


도5 담양부사 홍기섭의 석당간 중건비, 1839년 3월


담양부사가 중건한 객사리 석당간

담양부사가 당간의 중건을 주도한 것을 보면, 객사리 석당간은 읍성과 관청 지킴이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고종 시절에 제작된 《1872년 군현지도》의 <담양부 지도>에도 잘 드러난다(도6). 초록색 산세와 붉은색의 도로 표시가 어울린 아름다운 채색지도이다. 복잡하게 들어선 관아 건물들 가운데 관청의 동쪽 객사의 오른편으로 ‘부내府內 동변면東邊面’ 지명 위로 ‘石棹’와 ‘石塔’이 보인다. 석탑보다 삼지창 상륜부를 강조해 석당간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하였다. 붉은 외곽선을 두른 초록색 바탕의 네모 안에 ‘石棹’라고 중건비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담양부 관청이 직접 관할하였음을 알려준다. 고려의 사찰 당간이 조선의 읍치邑治 당간幢竿으로 자리 잡은 증거 사례로 꼽을 만하다.
석당간의 새 이름 석도石棹는 노 젖는 ‘노’라는 뜻이다. 언젠가 당간이 쓰러져 누운 모습에서 연유한 듯하다. 물론 돌로 만든 ‘돛대’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관변 명칭과 달리 지역 주민들은 높이 세운 돌기둥의 ‘종대’, 혹은 ‘솟대’와 동의어로 쓰이는 ‘짐대’라 일컬어졌다. 고을의 지세를 배 모양으로 보고 세운 위치나 형태가 돛대에 해당한다고 여겨온 이름이다.
네모기둥의 당간지주는 상하로 도드라진 띠가 신라~고려 시대 전형을 보여준다. 후대에 석당간을 끼우며 윗부분을 약간 손상시킨 모양이다. 남북의 두 돌기둥에 끼운 당간은 8각형이고, 그 받침돌 기단에는 연꽃무늬가 양각 선묘로 새겨져 있다(도4). 3단의 돌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혀지고, 돌기둥 사이의 이음새는 상하 절반씩 깎아내어 맞춘 뒤 구멍을 내서 고정하였고, 외부를 철제 고리 띠로 묶었다.
돌기둥 위는 철제 상륜부에 맞춘 듯 6개의 철통을 이어 붙여 완성했다. 철당간과 석당간을 절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삼지창 형태의 상륜부에는 깃발을 매달 도르레 설치물은 보이지 않고, 당대의 것인지 후대에 끼웠는지 모를 풍경風磬 같은 장식물이 달려 있다. 예전에는 두 개였으나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아마도 상륜부는 임시로 세웠던 목당간을 본래의 석당간으로 재건하면서 만들지 않았나 싶다(도7). 꼭대기 삼지창 장식물은 무구巫具를 연상시키며 현대의 피뢰침 같다.
석당간은 고을 지킴이로 남았다손 치더라도, 절 이름조차 까맣게 사라졌는데도 유교 이념 아래에서 석탑을 보존해온 게 장하다. 여기 천변리 별도 공간에 작은 석인상 2구도 눈길을 끈다. 관모를 쓰고 홀을 든 자세가 묘의 문인 석상임에도, 신상神像으로 모셔져 있어 그렇다. 어쩌면 조선 사회의 특성, 내지 우리 민족이 지닌 문화의식의 한 경향성일 법하다.


도6 1872년 군현지도 담양부지도 관아 주변 부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도10 1872년 군현지도 나주목지도 관아부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도7 담양 석당간의 상부 철제 장식

담양 것과 유사하게, 고려 시대 행주형 지세를 보강하는 석당간이 인근 나주에도 전해온다.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羅州 東漸門 外 石幢竿, 보물 제49호)은 전남 나주시 성북동에 있는 11m 높이의 돌기둥이다(도8, 도9). 사진은 지난 7월 여름 해거름에 붉게 물드는 흰 구름과 어울려 찍어 보았다. 나주 동문 밖 마을과 나주 들녘의 경계에 위치해 한껏 솟은 돌 장대는 노을과 어울려 그야말로 삶터를 장식한 환경 조형물로 최고였다.
담양 석당간보다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두 지역의 석당간은 조성 시기나 방식이 유사하다. 나주의 것이 상륜부까지 온전한 석당간의 모양새를 갖춘 편이다. 당간은 5개 돌을 맞추어 세웠다. 맞물리는 곳 이음새에 구멍을 뚫고 쇠 띠를 둘러 고정한 방식은 담양 석당간과 닮아 있다. 1983년에 석재 연결 부위의 무쇠 고리 마감을 철제 띠로 교체했고, 201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당간 꼭대기를 지붕 모양의 8각형 보개와 연봉을 올린 것은 당대 승탑이나 석조물에 보이는 형식이다. 이 상륜부는 담양 석당간보다 깃발을 설치할 도르래 장식 공간이 아예 없다. 담양 당간이 사찰에서 읍치당간邑治幢竿으로 변모된 것인 반면에, 나주 당간은 조성 초기부터 깃발을 걸지 않는 읍치당간으로 세워진 듯하다.
그리고 나주 석당간 주변에서는 담양과 달리 사찰 유적이 발굴된 적도 없다. 조선 중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나주목’ 조항에는 “주를 설치할 때부터 배 형국의 지형에 따라 지세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동문 밖에 ‘석장石檣’을, 동문 안에 ‘목장木檣’을 설립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장檣’은 그야말로 배의 돛대를 뜻한다. 석장과 목장은 고종 시절의 《1872년 군현지도》 가운데 <나주목 지도>에도 등장한다(도10). 동문 안팎에 옆으로 눕혀 그린 목장과 석장이 보이고 동문 밖 동쪽 들판으로 ‘내목성內木城’과 ‘외목성’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나주성을 보호하는 역할과 더불어 영산강 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석장과 목장도 영산강 침수지역의 범람을 막기 위한 액막이 역할을 함께 했을 듯싶다.
현재 동문 밖에 홀로 남은 석당간은 지역 주민들의 제의공간으로 살아 있다. ‘장사 주렁 막대기’, ‘힘 센 장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 ‘긴 막대’ 등으로 불리는데 보통 나쁜 것을 진압한다는 의미의 ‘진대’라 불린다. 요즈음에도 자동차를 구입하거나 집안일을 위해 이곳에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곳을 ‘진대제’라 부른다.
이처럼 배 모양의 ‘행주형지세行舟形地勢’에 돗대를 상징하는 탑이나 당간을 세운 일은 고려 때 이른바 풍수風水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상당히 유행한 듯하다. 청주읍성 용두사지 철당간, 화순 운주사 계곡에 천불과 더불어 조성한 천탑들도 그 좋은 예이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조선 시대 사찰의 당간이 지역 고을의 읍치당간으로 재활용됐을 법하다. 당간은 수호신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고을 통치공간의 위세를 상징했던 것이다.
신라 불교의 당간은 고려~조선의 읍치 당간으로, 또 마을 공동체 무속신앙의 솟대나 짐대로 정착되었다. 당간에서 솟대까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축으로서, 그 단순한 추상 이미지들은 한국 문화의 원초적 조형미를 뽐낸다. 이러한 양상은 전북 부안 읍성의 고려 당간지주와 장승 솟대 선돌 등 조선 후기 석조 당산들에서도 만날 수 있다. 다음 호에 소개하겠다.


(좌) 도8 나주 동문 석당간, 높이 약11m, 고려 / (우) 도9 나주 동문 석당간, 고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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