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⑥ 《송도기행첩》 下

도1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송악산도>, 1757년 경,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 이홍근 기증·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개성 땅의 질감을 살린, 송도 화가의 파격미

비록 표암 강세황이 그린 것은 아니지만, 《송도기행첩》이 조선 후기 문화사의 명품임은 분명하다. 겸재 스타일의 회화식 지도 화풍이나 미점산수 방식이 엿보이지만, 당대 회화의 주류 맥락과 연계되지 않는다. 서양화법을 멋대로 구사한 게 가장 눈길을 끈다. 어쩌면 타문화 형식을 새로이 수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기 솜씨대로 송도 지형과 어울려낸 개성미! 이 대목이 《송도기행첩》을 그린, 작가의 매력 포인트 같다.

글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송도기행첩》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이 그리지 않았다. 지난 호에 확인했듯이, 화첩 어디에도 강세황의 그림이라는 낙관이 전혀 없다. 강세황의 문집 《표암유고》나 여타의 문헌 자료 어디에서도 양자와 유관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이 글이 나간 뒤 허영환 교수, 고연희 교수 등께서 연락을 주셨다. 도재기 기자께서 기사화(경향신문, 2022.8.2.)해주었고, 많은 의견이 제기되었다.
강세황을 조선 후기 거장으로 설정한 데는 《송도기행첩》의 파격 실험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화첩의 그림 솜씨가 강세황이나 당대 문인화가의 산수화풍과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 이 화첩을 빼고 강세황의 그림을 보면, 늘 그렇듯이 싱겁다. 조선 후기 아마추어적인 문인화가의 한 전형이랄까? 당시 회현동 이웃해 살던 청년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얘기를 들어 보자.
“표암은 난죽蘭竹을 즐겨 그렸지만, 죽竹은 다만 몇 잎을 그려 드러낼 뿐이었다. 산수는 그의 장기가 아니나,
<도원도桃源圖> 팔곡병풍八曲屛風에서 닭과 개를 그린 장면은 정밀해 묘예妙藝를 보였다.”
“강세황에게 그림 구하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마치 저잣거리 같았다”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丁若鏞, 『與猶堂全書』 卷一, 二] 현존하는 강세황의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가볍고 대충 그린 인기작품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한 글이다. 내가 그동안 글을 써댄 관행대로 라면, 그림의 현장을 다녀와야 사생 그림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송도기행첩》을 강세황 그림으로 잘못 읽어왔다고 지적했으니, 마무리 보충이 필요하겠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북한지역 20세기 전반 옛 사진과 더불어 20세기 후반 명승의 풍경 사진이 공개되어 있다. 개성지역은 한때 공단이 들어선 이후 다녀온 사람들의 사진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이를 참작해서 《송도기행첩》의 사생 화법과 풍경 해석, 그 여정을 간략하나마 훑어보겠다. 내 여생에서는 불가능할 거라 예측도 들지만, 낱낱 작품에 대한 검토는 현장답사 이후로 미룬다.


도2 이태호, <만월대와 송악산>, 2022.7, 면지에 수묵, 24×64㎝



도3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대흥사도>


난해한 투시원근법의 시도

《송도기행첩》의 가장 인상적인 화풍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형상에 따라 쓱쓱 그은 농담의 먹선과 그 위에 청록채색이나 흰색을 덧칠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 거친 대로 먹물과 물감을 섞어 칠하고 번짐이나 닦아내는 기법의 효과는 화강암지대인 개성 땅의 질감을 떠오르게 한다. 종래의 준법이나 선묘법과는 크게 다른 입체화법이다. 이는 조심스런 건필의 피마준법을 골간으로 삼은, 담묵담채의 강세황식 남종산수 화풍과 또렷하게 차이진다 하겠다.
또 다른 하나는 소실점을 두고 그린 투시도법의 시도에 있다. 서양화법을 활용한 게 분명하다. 지난 호에 살펴본 <박연도>에도 아래에서 올려본 폭포 묘사에 투시도법이 적절히 적용되어 있다. 이처럼 유난한 투시원근법의 시도는 당대 산수화로는 이른 편이다. 중국과 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의 주요 거점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개성지역에 신풍新風이 일찍 자리를 잡았을 법하다.
화첩의 첫 그림 <개성전경도>에서는 송악산을 배경으로 개성시가지를 담은 투시도법의 모양새가 제법이다(도1). 왼편 고려 범종이 설치된 근경의 남문과 그 너머로 조선시대에 형성된 개성부의 큰길 중심대로中心大路가 보인다. 이를 따라 이어진 좌우 상가와 지붕들이 점점 희미하고 작아진다. 원근감이 그럴싸하다. 나는 마침 최근 고려 궁터 만월대 발굴지에서 찍은 송악산 경치가 유사해서 사진을 보고 스케치해보았다(도2). 화첩의 <개성전경도>보다 송악산에 가까이 다가선 풍경이다.
그런데 <대흥사도>의 경우는 <개성전경도>와 마찬가지로 일점 투시도법을 적용했는데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웃기게 그렸다. 왼편의 대웅전 공포 장식은 밑에서 올려다본 모습이고. 오른쪽 기와 건물은 약간 부감해 포착한 형태이다(도3). 다시점多視點으로 건물들이 어그러져 있다. 우리 기와집 그리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지만, 별도로 도법을 훈련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는 바람에 <영통동구도>의 어색한 입체화법과 더불어서, 서양화법의 수용이 파격으로 돌출되어 있다.


도4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대승당도>



대흥사의 근래 사진을 보면, 천마산 배경과 가파른 계단, 3칸의 중문 형태 등 대흥사 경내의 <대승당도>와 닮은 편이다. 대승당 자리에 대흥사를 중건하였다. <대승당도>는 <태종대도>와 더불어 조선을 건국한 실세로 태종 이방원과 관련된 유적지에 해당한다. ‘ㄱ’자 집 대승당大乘堂의 건물 작도법도 그렇고, 주변 건물들과도 맞지 않는다(도4). 왼쪽 약간 위에서 본 시점을 감안하면, 대승당의 맨 왼쪽 측면이 드러나야 하는데 정면에서 본 것처럼 이를 생략하였다. 실제 대승당 축대의 계단과 왼쪽 모서리 시점이 거의 반대로 그려져 어색하지만, 얼핏 괜찮아 보인다. 건축물의 도면 연습이 쌓여야 정확한 묘사가 가능한 시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림 속의 대승당 건물을 투시도법에 따라 수정해 그려보았다(도5).
그런데 1788년의 《풍악장유첩》(국립중앙박물관)에 표현된 강세황의 <회양관아도>를 보면, 건물들의 사선 배치가 한 시점으로 일목요연한 편이다(도6). 강세황은 눈썰미도 있고, 도법을 익혔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점도 《송도기행첩》과 강세황의 화법이 서로 다름을 읽게 한다.
투시원근법에 대한 어려움이나 몰이해는 당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4)의 서양화에 관한 글에서도 확인이 된다. 이익이 마태오 리치의 《기하원본幾何原本》 서문을 재인용하면서 ‘(입체표현의) 오목한 곳과 우뚝한 요돌坳突은 이해되지만, (원근법에 해당하는) 크게 보이고 멀리 보이는 시대시원視大視遠의 방법은 모르겠다’라고 말한 설명이 그것이다. (李瀷, 《星湖僿說》 卷4, <萬物門> ‘畵像坳突’) 이 <대흥사도>나 <대승당도>는 이익이 토로했던 투시원근법의 난해함을 쉽게 수긍하게 한다.


(위) 도5 이태호, <대흥사 대승당>, 2022.8, 면지에 수묵, 24×32㎝
(아래) 도6 강세황, 《풍악장유첩》의 <회양관아>, 1788년


《송도기행첩》의 개성지역 유람코스

총 17면에 그림과 글로 채운 《송도기행첩》은 16점의 실경화로 꾸며져 있다. 앞부분 12점은 개성시가와 송악산, 화담, 백석담, 백화담, 대흥사, 청심담, 영통동구, 산성남초, 대승당, 마담, 태종대, 박연 등이다. 13면과 14면의 글은 오수채와 강세황 두 사람의 시문이다. 이어서 15, 16면 실경화는 태안창, 낙월봉, 만경대, 태안 석벽 그림 4점이다. 맨 뒤 17면 화첩의 후기는 지난 호에 소개한 바 있다(도7).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송도기행첩》 그림들은 당시 문인들이 즐겨 유람하는 코스의 전형이다. <산성남초도> <태안창도> <대흥사도> <대승당도> 등은 모두 개성開城 북부지역 산 계곡의 명승고적들이면서, 개성의 피난성避亂城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군기고, 화약고, 군량미 창고 등 군사시설과 연관되는 곳이다.
현재 화첩의 그림 배열과 보통의 개성 유람 여정과 잘 맞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대흥산성 안에 한 사찰 공간인 대흥사와 대승당이 다른 지역인 것처럼 서로 떨어져 있어 그렇다. 화첩의 기행 코스를 다시 조정해 보면, <개성전경도>에 이어 화담, 영통동구, 백석담, 백화담 등 화담 서경덕과 관련된 오관산 계곡부터 산성남초, 대흥사, 대승당, 마담, 청심담, 태종대, 박연폭포까지 성거산과 천마산 대흥산성 내외의 명승으로 분류된다. 대흥사, 대승당, 태종대 등은 조선을 건국한 태종 이방원 관련 유적지이다.
그런데 근거리를 이동하며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 여정을 보면, 화첩의 표구된 순서도 일견 맞을 듯도 하다. 당시 개성지역 유람기 가운데 월곡 오원(月谷 吳瑗, 1700~1740)의 《서유일기西遊日記》에 개성과 천마산 일대 유람 일정이 상세하다. 1729년 4월 2일부터 7일까지 한양 돈의문에서 출발해 귀경하는 일정이며, 《송도기행첩》의 명소 돌아보기는 4월 4일~4월 6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오원의 발길을 따라가 보자. 4월 4일에는 화담 서경덕의 옛터에 세운 화곡서원을 시작으로, 영통동구, 백석담, 영통사, 백화담, 대흥동, 동구, 남문, 청심담, 대승당, 대흥사를 둘러보았다. 4월 5일에는 대흥사, 태종대, 관음사, 박연폭포를 노닐었다. 4월 6일에는 관음사, 박연폭포, 마담, 남문, 중영, 백화담, 영통동구, 서사정(화담)을 거쳐, 남문에서 개성 여정을 마쳤다.


도7 《송도기행첩》 전체 그림과 글


서울의 북한산세와 닮은 개성 북부 경관

《송도기행첩》의 실경화들은 개성 북쪽지역의 산세와 계곡미를 잘 담아내었다. 우뚝 솟은 봉우리 봉우리가 이룬 여러 형상의 괴상怪狀들, 줄지어 갈라진 수직절리의 석벽, 커다란 너럭바위나 바윗덩어리들이 놓인 맑은 물 계곡 등이 보인다. 한양의 북한산과 도봉산처럼 화강암 바위들이 연출하는 빼어난 석산 경관이다. 개성에서 출발한 조선건국의 세력이 고도古都와 닮은 새 수도를 지었다고 이를 만큼, 두 지역 풍치가 유사해 흥미롭다.
<태종대도>는 수직절리와 수평절리가 겹친 벼랑의 계곡물을 즐기는, 여름의 탁족 풍속도를 담은 그림이다(도8). 근경 너럭바위에는 빈 화폭을 비스듬히 펼쳐놓고 어색한 대로 붓을 든, 화가의 옆모습이 눈길을 끈다. 도포 차림과 흑립의 크기로 보아 강세황 같은 양반 차림이라기보다, 중서층의 복장답다. 개성부 소속 화원일 법하다. 풍경화에 작가 자신을 배치한 구성은 마치 작가와 대상이 하나로 어울린 한국인의 자연관을 떠오르게 한다.
먹선 위에 먹과 흰색 안료를 섞어 회색조의 번짐을 살리고, 표면을 닦아내며 흰색을 거칠게 덧칠한 너럭바위나 큼직한 바위들의 표현도 참신하다. 절리의 바위 틈새를 따라 자란 소나무는 먹선묘 위에 초록색을 얹어 그렸다. 역시 겸재 정선식 화풍으로, <도성도>를 비롯해 18세기 중후반에 유행한 회화식 지도를 연상케 하는 묘법이다. 이 소나무 군락 표현은 <산성남초도>에도 고스란하다.
<산성남초도山城南譙圖>는 대흥산성 남문 망루 남초南譙에서 본 천마산과 주변 경관을 그린 대경大景의 산수화이다(도9). 산 주름과 굴곡을 드러낸 미점준米點皴은 겸재 정선이나 현재 심사정, 표암 등 문인들의 미점산수화에 비해 거칠고 다채로운 편이다. 산정상 마다에는 암봉들이 살짝살짝 드러나 있다. 화면의 중앙을 차지한 거대한 천마산은 먹 점들에 청록색을 가미해 상그럽다. 그 너머 좌우 멀리 산 능선들이 구름 위로 넘실대니 장관을 이룬 풍경화이다.


도8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태종대>



도9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산성남초도>


태안 천마산의 기괴한 석산 표정들

<박연도>에 이어 쓴 오수채와 강세황의 글은 박연폭포를 중심에 두고 쓴 시문이다. 이어서 후반부에는 태안창泰安倉이 있는 낙월봉, 만경대, 석벽 등 대흥산성 서쪽 천마산의 산세가 배열되어 있다. 4곳 경치를 별도로 추가한 듯하며, 그림마다 강세황 서체의 짧은 글이 보인다. 이곳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재위 : 918~943)의 태실胎室이 모셔진 고적이어서, 강세황이 ‘고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오원의 개성유람기에는 이곳이 빠져 있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근의 대찰 대흥사는 고려 후기 왕건 태실을 보호하는 사찰로 건립되었다. 태실이 있던 ‘태안胎安’이 ‘태안泰安’으로 바뀐 것이다.
천마산 정상에는 <만경대도>처럼 개성 산수를 한눈에 전망할 봉우리가 우뚝하다. 그 아래 태안창을 중심으로 노적봉, 천마봉, 부아봉負兒峰, 낙월봉落月峰 등 석산石山의 비경으로 꼽히는 만큼, 기괴한 표정의 바위들이 즐비하다. 그림의 상단에는 “태안창에서 왼쪽 산성을 바라보면, 만경대가 있다. 봉우리들은 뾰족하게 우뚝우뚝 솟아 있다. [自泰安倉 左望山城 有萬景臺 峰極尖秀亭亭雲表]” 라고 써넣었다. 이런 <만경대도>를 천마산 실경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사생한 표현력이 그럴싸해 보인다. 만경대를 뾰족하게 과장하고, 틀에 얽매지 않아 묘사의 정확도는 떨어지는 편이다(도10 우).


도10 작자 모름, 《송도기행첩》의 <태안 만경대>(우), <태안동 석벽>(좌)



도11 <개성 천마산 만경대>, 출처 조선향토문화대백과사전



<태안 석벽도>는 큼직큼직 갈라진 수직절리 화강암 석벽들과 그 위로 동그스런 토르 형태의 산세가 유난하고, 수직절리의 틈새를 따라 자란 앉은뱅이 노송들이 듬성하다. 《송도기행첩》의 화가는 이 장면들을 빼놓지 않고 그리면서, 맘껏 개성미를 발휘하였다(도10 좌). “태안동의 문을 들어서면, 좌우 석벽이 모다 기이하다. [入泰安洞門 左右石壁多奇]”라고 썼듯이, 수직절리 표현은 마치 유럽 현대미술사의 큐비즘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이하다. 강세황의 산수화는 물론이려니와 조선 후기 어느 화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붓질과 먹 맛을 냈다. <태종대도>에 등장하듯이, 개성 땅에서 태어나 개성지역 경관을 온몸으로 익힌 송도의 화가만이 가능한 표현법이자 파격미 아닐까?
두 회에 걸쳐 살펴보았듯이, 《송도기행첩》은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별종의 존재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겸재 스타일의 회화식 지도 화풍이나 미점산수 방식이 엿보이지만, 당대 회화의 주류 맥락과 연계되지 않는다. 서양화법을 멋대로 구사한 게 가장 눈길을 끈다. 어쩌면 타문화 형식을 새로이 수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기 솜씨대로 송도 지형과 어울려낸 개성미! 이 대목이 《송도기행첩》을 그린, 작가의 매력 포인트 같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