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⑥ 《송도기행첩》 上

도1 작가 모름, 《송도기행첩》의 <영통동구도>, 1757년 경,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 이홍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과연 강세황이 그렸을까?

《송도기행첩》이 ‘과연 강세황 작품일까’ 하는 의구심은 최근에 들었다. 나는 올해 들어 한문 초서공부반 學草玩月會에 참여해왔다. 조선시대 편지인 서간문과 더불어 그림에 쓰인 화제 시문을 읽는 모임이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화제 시문을 재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세황과 《송도기행첩》을 다시 따져 본 점이 나로서는 최고 수확이었다. 관련 자료들을 전면 뒤졌으나, 강세황의 작품으로 확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강세황 그림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글·사진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이 그리지 않았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은 나에게도 커다란 쇼크였다. 충격의 여파가 적지 않을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강세황의 작품이 아니라 해서, 이 화첩의 미술사적 평가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 《송도기행첩》을 그린 화가를 찾아 오롯이 거장으로 등극시킬 일이 생겼다.
이 화첩은 고려의 고도인 송도松都, 곧 개성 일대를 돌아보며 사생한 그림을 모은 것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로서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 위상을 드높인 화첩이다. 전체적으로 풍경을 직접 사생한 신선한 시각과 당시 전통화법을 따르지 않은 파격의 묘사방식에 방점을 찍으며, 강세황의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특히 <영통동구도> 같은 작품은 적극적으로 서양화법 입체감을 구사한 사례로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도1). 전통적인 미점米點 산주름을 배경 삼아 듬성한 바위에 녹색과 먹을 혼합해 덩어리 음영을 표현한 점이 색다른 맛을 풍긴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금강전도>나 <인왕제색도>만큼 한국회화사에서 국민의 유명작이라 꼽힐 정도이다.
《송도기행첩》은 개성 출신인 고 동원 이홍근(東垣 李洪根, 1900-1980) 선생 소장품이었다. 1980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무려 4만여 점 가운데 한 건이다. 이 화첩을 1970년에 신자료로 처음 알린 이는 고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관장이었다. (최순우, <姜豹庵>, 《고고미술》 110, 한국미술사학회, 1970) 이후 지금까지 50여 년 동안 새로운 작품이나 문헌 자료의 발굴을 통해 미술사와 문학사의 연구 성과들이 쌓였다. 크고 작은 기획전들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막상 《송도기행첩》을 누가 그렸는지 작가에 관련한 재검토는 없었다. 1970년 세상에 소개되기 이전부터, 강세황 그림으로 확고하게 대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도2 작가 모름, 《송도기행첩》의 <박연도>



도4 이태호, <박연폭포>, 2022.7, 면지에 수묵, 36×51㎝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표작

나 역시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송도기행첩》을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서술하는 데 빼놓지 않았다. 당대 회화사조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주의적 묘사방식의 참신함 때문이다. 《송도기행첩》의 <박연도>가 지닌 사생화의 사실감은 겸재 정선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박연폭도>와 잘 비교된다. 그래서 나는 두 사례를 들어 ‘눈 그림과 마음 그림’, 곧 ‘눈으로 보는 대로 사생寫生을 중시한 형사形似와 기억으로 대상의 감명을 쏟아낸 사의寫意’ 두 가지 표현방식을 분류해보았다. 이태호, <實景에서 그리기와 記憶으로 그리기>-朝鮮後期 眞景山水畵의 視方式과 畵角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57, 한국미술사학회, 2008.3. ; 이태호,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마로니에북스, 2015 이는 두 작품을 실제 박연폭포와 대조하면, 그 다름이 금새 드러난다.
정선의 <박연폭도>는 굉음을 내며 쏟아진다는 폭포 소리를 평면에 담으려 의도적으로 길다란 족자에 폭포를 길게 과장해 그렸다. 현장에서 느낀 감명을 표출한 ‘마음 그림’이라 하겠다(도2). 이를 주제로 2001년 미국 LACMA에서 가진 한국미술사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박연폭도>와 경치를 나란히 비쳐놓고 폭포 소리를 노래한 <개성난봉가>를 들려주며 발표를 마쳤을 때, 공감과 박수를 받았다. Lee Taeho, Chong Son’s(1676~1759) Method of Representing Actual Scenery : The ‘Pagyon Waterfall’ of the 1750s, Establishing a Discipline :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Korean Art History,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2001.3.1. ; 이태호,
<겸재 정선의 실경표현 방식과 <박연폭도>>, 《조선후기 그림의 氣와 勢》, 학고재, 2005.
《송도기행첩》의 <박연도>는 폭포와 범사정 풍경을 제법 충실하게 사생한 ‘눈 그림’인 셈이다(도3). 아래서 올려본 폭포를 좁혀 그린 투시원근법마저 적용하였다. 하경夏景 그림으로 최고여서, 나도 무더운 7월에 범사정 정자를 빼고 박연폭포 전면을 스케치하였다. 금강산, 묘향산, 평양 지역 고구려벽화고분 등은 다녀왔는데, 하필 개성지역 답사 기회를 놓쳤다. 언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터라, 옛 사진에 의지하며 그 소회를 담은 그림이다. 두 작품을 비교하기 위한 박연폭포 실경으로 대신해본다(도4). 박연폭포는 화담 서경덕, 황진이와 함께 ‘송도3절’로 유명해진 절경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 <박연도>를 보고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탄신 300주년 기념특별전’으로 기획된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 표암 강세황> 전시(국립중앙박물관, 2013)와 관련한 주간지 기사에 났다. 어느 감정학 박사의 인터뷰로, ‘《송도기행첩》 <박연도>의 경우 폭포의 시작과 물 떨어져 흰 거품 부분의 백색 안료가 검게 변한 것은 1850년대~1940년대 신중국산 연분을 사용한 때문이다’라고 썼다. <가짜에 빛바랜 표암 강세황 예술혼>. 주간동아, 2013.8 실물 검토 없이 오판한 듯하다. 이번에 그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짙은 먹선 위에 흰 물감을 칠하였기에 회색조를 띨 뿐, 납 성분의 연분鉛粉이 변한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종이의 질감, 수묵과 채색, 화풍 등 《송도기행첩》은 18세기 영조 시절의 명품에 틀림이 없다.

강세황 작품이 아니라고 의구심을 품다

《송도기행첩》이 ‘과연 강세황 작품일까’ 하는 의구심은 최근에 들었다. 나는 올해 들어 한문 초서공부반 學草玩月會에 참여해왔다. 조선시대 편지인 서간문과 더불어 그림에 쓰인 화제 시문을 읽는 모임이다. 초서 읽기에 눈 밝고 고전 검색의 달인 김채식 박사가 경운초당에서 운영해왔다. 여기서 나는 회화 작품의 진위문제를 판단하며 보조했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와 표암 강세황의 주요 작품들을 함께 보며,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화제 시문을 재검토하였다. 생각보다 기존의 잘못 읽은 오류들이 상당히 발견되었다. 하나하나 수정하며 무릎을 치곤 했다. 이들을 통합해 별도의 책으로 출간하거나 온라인 사이트로 운용할 예정이란다.
이 과정에서 강세황과 《송도기행첩》을 다시 따져 본 점이 나로서는 최고 수확이었다. 관련 자료들을 전면 뒤졌으나, 강세황의 작품으로 확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강세황 그림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 《송도기행첩》을 발표한 정동운 한문학박사가 내 의견에 가장 먼저 공감해주어 반가웠다.
내친김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송도기행첩》을 열람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져본 셈이다. 내가 이 화첩을 처음 실견한 것은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동원 선생 유족들이 기증했을 1980년 무렵, 나는 당시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 회화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원 소장품인 정수영의 금강산 기행 화첩 《해산첩》(1797~99년)과 더불어 《송도기행첩》을 대했던 감명이 새롭다. 두 화첩 그림 다 별난 개성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정수영의 《해산첩》에 집중하느라, 《송도기행첩》은 미루었다. 한참 멀게 돌아 이제사 재검토하게 되었다. 두 화첩은 마침 작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의 ‘동원 이홍근실 40주년 기념전(2021년 가을, 그분을 기억하다)’에 나란히 전시되었다(도5).


도3 겸재 정선, <박연폭도>, 1750년대, 지본수묵, 119.5×52.0㎝, 개인소장


《송도기행첩》의 내용과 구성

《송도기행첩》의 표지에는 28.6×3.3㎝ 미색 쪽 비단에 예서체 ‘표암선생 유적(豹菴先生遺積)’라고 쓴 ‘성재 제첨(惺齋題簽)’이 붙어 있다(도6). 음각의 ‘金台錫印’과 양각의 ‘惺齋’ 도장도 찍혀 있다. 성재 김태석(1875~1963)은 1920년대부터 활동한 서예가이며, 여기 제첨 글씨는 상당히 무르익은 후기의 필치로 보인다. 중국제 꽃무늬 비단을 감싼 두꺼운 앞뒤 표지는 가장자리를 볼 때 상당히 낡은 상태이다. 이에 비해 그림첩 꾸밈은 깨끗하고 야무지다. 더구나 화첩의 이름이 송도 그림과 관련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제목도 좀 생뚱맞다. 아마도 강세황의 다른 화첩에 사용했던 것을 재활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도6 김태석이 써 붙인 《송도기행첩》 표지, 왼쪽 하단에 인장 부분을 오려낸 흔적이 보인다. 실제 송도기행첩을 그린 작가의 인장으로 추정된다.

《송도기행첩》은 총 17면에 그림과 글로 채워져 있다. 그림은 16점이다. 개성시가와 송악산, 화담, 백석담, 백화담, 대흥사, 청심당, 영통동구, 산성남초, 대승당, 마담, 태종대, 박연 등을 그린 앞의 12점은 양쪽을 펼친 상태로 29.5×39.2㎝ 크기에 맞추어 그렸다. 13, 14면에는 두 사람의 시문이 있다. 이어서 태안창, 낙월봉, 만경대, 태안 석벽 태안 경치를 그린 4점은 29.5×18.6㎝ 크기로 화첩의 반쪽씩 각각 할애하여 15, 16면에 담았다. 화첩의 맨 뒤 17면에는 화첩 소장자 ‘吳’ 씨에 관한 후기가 딸려 있다.
<개성전경도>를 제외하고는 그림마다 실경 장소의 지명을 밝혀 놓거나, 간소한 지리정보와 풍경소견에 대한 화제 글이 있다. <박연도>와 <태안창도> 사이 두 면에 있는 오수채와 강세황이 쓴 시, 말미의 후기까지 화첩에는 세 꼭지의 시문이 보인다(도7).
오수채(吳遂采, 1692~1759)는 영조 시절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수士受, 호는 체천棣泉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으로 소론계열로 분류된다. 오수채가 개성유수로 근무한 기사는 ‘영조 33년(1757) 4월 29일과 10월 13일’에 나오며, ‘34년(1758) 7월 1일’ 자로 대사헌이 되었다. (《英祖實錄》) 오수채는 개성유수를 역임하며 ‘김육金堉이 인조 26년(1648)에 만든 《송도지松都誌》를 증보하여’ 영조 33년(1757)에 《송도속지松都續誌》 1권을 펴냈다. (정조 6년(1782)에 정창순鄭昌順이 7권으로 완성했다.)
오수채가 먼저 화첩 13면 왼쪽에 ‘박연폭포’ 관련 7언시를 써넣었다. 《송도속지松都續志》에 올린 ‘희우당’, ‘청향각’, ‘대승당’ 등 여러 자작시 중 하나로, 폭포 아래의 ‘범사정泛槎亭’ 부분에 실려 있다. 사선형으로 길죽하며 활달한 필치는 개성이 또렷하다. 오수채의 다른 편지나 시고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지며 쉽게 구분된다. 모두 당시 소론과 남인계 문인의 서풍이다. 시의 서두 머리 도장 음각의 명인은 ‘청쇄노신 자각만은(靑瑣老臣紫閣晩隱)’이다. ‘궁궐의 창쇄문 늙은 신하 드나들고, 남산으로 늦게사 은둔하네’라는 자신의 삶을 담은 내용이다. 말미에는 ‘逮泉’과 ‘士受’라는 네모난 음각 도장이 찍혀 있다.


도5 《송도기행첩》의 <태종대도>(우)와 나란히 전시된 정수영 《해산첩》의 <군옥대>,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기증실


개성유수 오수채가 화첩 제작을 주관해

오수채는 <박연도> 상단에 자작시 앞부분을 쓰고 ‘江湖一翁’이라는 음각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大興寺’, ‘淸心堂’, ‘山城南譙’, ‘大乘堂’, ‘馬潭’, ‘太宗臺’, ‘朴淵’ 등 7 그림의 지명은 모두 오수채가 썼다. <박연도>의 화제시나 그림 지명들이 모두 비스듬히 질죽한 게 닮은 필세이다. 이는 《송도속지松都續誌》 1권을 완성한 개성유수 오수채가 주관해서 송도의 명승도 화첩을 제작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화첩 그림 모두 고적이면서, 개성開城을 보호하기 위한 대흥산성大興山城 일대의 북부지역 주요 관방關防 거점들이 선택된 점도 그러하다. 혹여 화첩의 사생화들을 ‘오수채가 그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겠나’라고 점쳐본다.
‘체천’과 ‘사수’를 오수채의 자호字號라 밝히고, 오수채와 강세황의 친교를 확인한 것은 2002년 김건리 씨의 석사학위 청구논문이다. 김건리,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연구>, 《미술사학연구》 237·238, 한국미술사학회, 2003. 《송도기행첩》이 공개된 지 30여 년 만이다. 또 강세황이 1757년 7월 개성을 여행했던 사실은 친구 연객 허필(煙客 許泌, 1709~1768)이 자신의 <묘길상도> 발문에 밝혔다. 이를 찾은 것은 강세황 관련 첫 박사학위 논문이자 책으로 발간한 변영섭 교수이다.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 일지사, 1988. 이 글에 등장한 강세황이 개성을 방문해 그린 화첩은 ‘무더위를 이기게 해준다’라는 《무서첩無暑帖》이다. 산수화와 화조화로 꾸민 2첩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허필의 글에는 송도 사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어 강세황은 13, 14면 세 쪽에 걸쳐 7언시를 써놓고, “읍취헌의 크게 흥겨운 시를 광지가 쓰다(揖翠軒 大興詩 光之書)”라고 마무리했다. 이 시는 조선 초기 문인 읍취헌 박은(揖翠軒 朴誾, 1479-1504)의 ‘관음사에서 묵고(宿觀音寺)’라는 작품이다. 내용은 관음사 인근의 박연폭포를 읊은 것이다. (朴誾, 《揖翠軒遺稿》) ‘光之’는 강세황의 자字이고 光之書 아래에는 강세황의 호인 ‘豹菴’이라는 네모 음각 도장이 찍혀 있다.
이 시문이 《송도기행첩》의 유일한 강세황임을 밝힌 필적이다. 이 때문에 작가의 도서낙관이 없는 《송도기행첩》이 강세황 작품으로 기울게 한 듯하다. 강세황의 개성을 잘 드러낸, 강약의 붓질 감각이 유연한 행서체이다. 이 서풍은 15, 16면 <화담도>, <백석담도>, <백화담도>, <영통동구도>, 태안 4곳 실경도의 지형에 관련해 간략하게 쓴 글에도 남아 있다. 이들은 아마도 강세황이 개성에 들렀을 때, 개성유수인 오수채의 간곡한 부탁으로 썼을 법하다. 그런데 강세황이 남의 시를 베껴 놓고, 별 성의가 없어 보인다. 《송도기행첩》을 탐탁스레 여기지 않은 모양이다.

개성부 소속 화원이 그렸을 듯

마지막 17면의 후기後記는 7언시 형식으로, 《송도기행첩》을 소장한 오씨 아우 ‘오제(吳弟)’로 시작한다. 오씨는 이 화첩의 소유주이던 오수채의 후손일 게다(도8).


오씨 아우는 그림을 많이 좋아해, 집안에 소장 화첩이 천정에 닿을 정도라네. / 산수 유람 다니기 어려움을 알고서, 그림은 대부분 좋은 물과 바위네. / 집 뜰 나서지 않고도 와유臥游를 즐기니, 옛날 금경과 상장(禽慶ㆍ尙長 : 명산을 주유한 중국 후한 시대 은둔자)은 고생만 실컷 했나 보네. / 무미無味한 것에 참 맛이 있으니, 화공의 그림도 반드시 오씨 아우의 앎에 못미칠 지니. / 오씨 아우는 도시에 지내며 소란함을 싫어해, 화첩을 싸들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네. / 나를 좋아해 남촌인으로 봐주고, 기이한 문장과 의심스러운 뜻을 아침저녁으로 구하네. / 이 화첩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吳弟爲人多畵癖 家藏畵帖殆連屋 見得行看山水難 所畵蓋多好水石 臥游不出戶庭間 向來禽尙徒勞役 無味之中有味存 畵工畵亦未必吳弟識 吳弟城市猒塵囂 携將畵帖入窮谷 愛我視作南村人 奇文疑義要晨夕 此帖世人不曾一目擊]


(위) 도7 《송도기행첩》의 오수채와 강세황 시문
(왼쪽 아래) 도8 《송도기행첩》의 필자미상 후기 / (오른쪽 아래) 도9 후기의 도장 제거 부분, 4×1㎝



이 글은 강세황이 쓴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강세황의 낙관이 없다. 김채식 박사도 공감했듯이, 강세황의 개성적 서체나 품새와 달리 필획이 느슨하고 가는 편이다. 글을 쓴 바탕 종이는 약간 누런 색조이다. 조선 후기 흰색 바탕의 화첩 그림과 시대 차가 느껴지고, 19세기 후반쯤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후기의 끝부분에는 4×1㎝가량의 종이가 잘려져 나갔다. 글쓴이의 도장이 찍힐 부분으로 추정된다(도9). 또 인명이나 시기 등의 낙관이 더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부분을 오려내는 바람에, 《송도기행첩》이 강세황 작으로 둔갑한 셈이다. 석연치 않은 표지 꾸밈과 더불어, 이 화첩을 강세황 그림으로 착각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여기에는 화첩 그림과 관련한 내용이 없고, 끝맺음이 아쉬워 글이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겠다.
그리고 후기 중간에 ‘화공 그림[畵工 之畵])’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이 《송도기행첩》이 문인화가 강세황의 작품이 아닌 근거이기도 하다. 대신에 개성과 북부지역 실경도가 당시 개성부 소속화원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 후기에는 주요 지방 도시마다 중앙에서 도화서 화원의 파견을 법제화했고, 지역에서 배출한 화원이 소속되기도 했다. 지방의 행사 기록화나 지도제작을 주로 맡았다. 《송도기행첩》 실경 그림의 능란하지 못한 필치가 지방화원의 솜씨로 여겨진다.
1757년 오수채가 《송도기행첩》을 개성유수 시절 기념품으로 꾸몄다면, 비슷한 시기의 《해동지도》(규장각 소장, 보물 제1591호)가 떠오른다. 1권 경기도 편의 앞 <도성5부도> <송도> <강화> 3장 지도가 다른 지역들과 달리 회화식이다. <송도> 지도는 먹선에 연두색, 초록색, 파란색 등 진채眞彩를 구사해 진경산수 화풍에 근사한즉, 1750년대 개성부나 경기감영 지방화원의 솜씨로 여겨진다(도10). 먹선 위에 채색하는 방식과 담채 수법이 《송도기행첩》 그림과 유사한 구석도 있고, 종이의 질감이나 화면의 헤진 부분에 보이는 부푸러기도 비슷하다. 두 사례를 이번 기회에 나란히 비교하니, 《해동지도》를 그린 화가와 《송도기행첩》를 그렸을 화가가 연관이 깊거나 동일인일 가능성도 없지 않겠다.


도10 작가 모름, <해동지도>의 송도 지도, 1750년 경, 종이에 수묵채색, 46.7×59.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보물 제1591호


《송도기행첩》은 강세황의 산수화풍과 달라

《송도기행첩》 어디를 펼쳐도 강세황이 그림을 그렸다는 서명이나 도서낙관이 보이지를 않는다. 사생 화첩인즉, 강세황의 문집에 개성 여행이나 곳곳을 다닌 《송도기행첩》의 실경 명소에 대한 구체적인 시문이 없다. 강세황이 ‘박연에 다녀온 뒤 박도맹이 그림을 요청하자, 병풍을
만들어 그려주며 그림에 7언시 한수’를 써준 사례가 유일하다. 강세황, 《표암유고》
《송도기행첩》의 사생 그림과 강세황의 산수화는 대상의 사실적 묘사 기량이 떨어진다는 게 공통점이긴 하다. 그런데 미점米點 표현을 제외하고는, 《송도기행첩》과 강세황의 남종화 산수화풍과 거리가 좀 멀다. 화첩의 실경 그림들은 대체로 짙거나 옅은 먹선들이 윤기 나고 직선적이다. 이에 비해 강세황의 산수화풍은 <방심석전倣沈石田 벽오청서도>, 성호 이익의 요청으로 그린 <도산도陶山圖>, 금강산을 여행하고 단원 사생화를 주로 임모한 《풍악장유첩》 등을 보면, 이와 완연히 다르다. 강세황은 화보풍에서 연유한 담묵 선묘의 고실고실한 갈필(피마준법)을 즐겨 쓴 편이다. 다음 호에 《송도기행첩》 그림을 살펴보겠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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