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④ 강릉 굴산사지 석조 당간지주 中

도1 이태호, <굴산사지 당간지주 위로 봄 초승달 뜨고>, 2022. 03, 면지에 수묵, 51×36㎝



거대한 당간지주를 세우기 위해 사용한 돌덩어리들은 어디서 옮겨 왔을까? 근처 학산 학바위에 올라 수 백년된 노송과 암석을 보는 순간, 이곳이 바로 그 채석장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에서 학산 정상까지 1km가 넘기에 학산마을에 전승해온 농요 ‘오독떼기’가 신라 말 굴산사 당간지주의 거석을 옮기던 노동요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글·사진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역시 무엇이든 자주 찾고, 오래 보아야 자세히 잘 보이는 모양이다. 작년 말부터 강릉 굴산사지를 5번쯤 찾았다. 지난 3월 초 오전부터 해넘이까지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함께 지냈다. 해가 대관령 능선을 넘기까지 온종일 머무니, 앞서 5월호에 소개한 것처럼 당간지주의 모양새를 세세히 살필 수 있었다. 돌 표면의 정 자국이 리듬감 있게 난 곳, 거칠게 덩어리를 떼어낸 곳, 최초 돌을 분리할 때 열 지어낸 흔적 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당간지주를 만든 조각승의 높은 구도求道와 선법禪法을 떠올렸다.
퇴직하니 뾰족이 할 일도 없고 한데, 이런 시간이 주어져 좋다. 지난 3월 5일 답사할 때는 당간지주 반경 2~3km를 뒤졌다. 또 다음 후편을 보강하기 위해 두 달 동안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비교 대상인 신라 시대의 경주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당간지주, 공주 갑사 철당간,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그리고 조선 후기의 단양 석당간 등을 다시 찾아 나섰다. 답사를 다니니 좋긴 하지만 원고료보다 답사 비용이 몇 배 더 들어 좀 그렇다.


도2 이태호,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칠성산 전경>, 2022. 03, 면지에 수묵 스케치, 24×64㎝


음양 맞춰 대지에 거석을 세우고

봄날 해가 대관령 능선을 넘을 때, 동해에서 희게 떠오른 초승달이 칠성산 능선을 따라 소리 없이 노랗게 방실대고 있었다. 북쪽 그늘에서 본 당간지주에 초승달이 걸린 모습이 새로운 감명으로 다가와 스케치했다(도1). 사계절뿐만 아니라 대자연이 변화하며 늘 새롭게 연출하는, 추상적 조형물과도 같은 당간지주의 매력은 넘치고 또 넘친다.
대관령 해넘이 동안, 남쪽 칠성산에 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무렵이다. 주봉 정상의 왼편으로 산 중턱 한 봉우리가 유난스레 눈에 들었다. 여근곡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연출되기에, 아무도 없는 들에서 혼자 ‘우와!’ 탄성을 질렀다. 거석의 당간지주와 당간을 세운 위치에서 음양의 상징성을 간파할 수 있었다. 곧바로 여근곡과 어우러진 남근 이미지의 두 당간지주를 스케치했다(도2). 남성성의 당간지주와 마주해 있어, 당간지주의 위치 잡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법하다. 헌데다 칠성산을 향해 당간지주 오른편으로 세운 남근 형상의 선돌도 예사롭지 않다. 학산마을 사람들이 당간지주 서쪽 마을 북쪽 입구 길목으로, 여근곡과 짝 맞추어 남근석을 하나 더 모셨던 것 같다(도3). 조선시대 성신앙性信仰 민속공동체 문화로 정착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음양의 조합일 터이다.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도3 굴산사지 당간지주 서쪽에 놓인 선돌



그런데 이 큰 돌덩어리들을 어디서 옮겼을까? 막상 당간지주 주변 들에서는 절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굴산사 절터 발굴 작업은 당간지주에서 1km 남짓 떨어진 서쪽 개울 건너 옴팍한 산기슭 분지에서 이루어졌다. 절터 서쪽 언덕에는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보물 제85호)이 남아 있다. (엄기표, <굴산사지 석조부도의 주인공과 미술사적 의의>, 《선사와 고대》 37, 한국고대학회, 2012. ; 최성은,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문화재》 56, 국립문화재연구원, 2012.)
잘 다듬은 팔각원당식 승탑으로, 신라 후기의 전형을 따른 양식이다.
절터에는 강릉 단오제의 대관령 산신으로 모신 범일국사 탄생설화와 관련된 돌샘 석천石泉 우물과 학산 학바위, 학산마을 솔밭 성황단과 돌무더기(도4), ‘강릉학산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 등의 유적들이 살아 있다. 승탑과 절터 자리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발굴 이후 정비해놓은 상태이다. 이들은 당간지주에서 서쪽으로 반경 5~600m 거리에 분포되어 있다(도5, 도6). 이곳 절터는 2010~16년 7차에 걸쳐 발굴되었다. 30여 개소의 사원 건물지를 찾았다. 범일국사 승탑의 비를 세웠을 돌거북, 소조 불상, 동종 파편, 쇠와 흙으로 만든 말 조각 등 불교 유물이 출토되었다. ‘天慶三年(천경삼년, 1113)’, ‘五臺山(오대산)’, ‘五臺山 金剛社(오대산 금강사)’, ‘屈山寺(굴산사)’ 내지 ‘崛山寺(굴산사)’ 등의 명문 기와류와 고려 시대 청자와 백자, 조선 초 분청사기, 중국 도자기 등 수습된 생활유물로 보아, 절은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을 법하다. (《강릉 굴산사지 발굴조사보고서Ⅰ》,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2014) 이들과 시대 차이를 지닌 ‘天啓五年(천계오년, 1627)’의 기와는 폐사 뒤에 들어선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1584)의 위패를 모신 석천묘石川廟의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와 유교가 교체된 증거이다. 석천묘는 후에 강동면 언변리에 자리를 잡은 송담서원松潭書院으로 옮겼다.


도4 강릉 학산마을 입구 솔밭과 성황단, 돌무더기



도5 오른쪽 범일국사 승탑과 굴산사지 전경. 승탑 오른편에는 학산, 왼편에는 성황당과 솔밭이 있고 멀리 칠성산 능선이 흐른다.



도6 이태호, <강릉 굴산사지 지도>, 2022. 05, 면지에 수묵담채, 36×51㎝


학바위 놓인 곳, 당간지주의 채석장으로 추정

범일(梵日, 810~889)은 신라 말 헌덕왕 2년(810) 명주도독을 지낸 아버지 김술원金述元과 어머니 문씨文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나라에 유학해 나라의 큰 성직자로 선승禪僧이 되었다. 굴산사 외에도 강릉 신복사, 동해 삼화사, 삼척 영은사 등 영동 지역의 사원 건립과 불교 발전을 두루 주도했다. 1788년에는 화승 신겸信謙이 추모해 상상화로 그린, <범일국사진영>이 영은사에서 제작되었다. 여의如意 머리의 긴 주장자拄杖子를 양손에 쥐고 오른 팔목에 긴 염주念珠를 감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중후하면서 이국적인 이미지이다. 이 영정은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걸려 있다.
이처럼 실존 인물이지만, 범일에 관한 전설이 여럿이다. 《삼국유사》 에는 낙산사의 관음보살의 진신과 화신 일화에 금색동자 ‘정취보살正趣菩薩 연기담緣起談’으로 실려 있다.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범일국사의 이야기는 지역의 민중 문화에 파고들면서 더욱 신비화된 듯하다. 태양을 꿈꾸고 낳았다는 태몽을 각색했는지, ‘처녀가 마을 우물에서 표주박에 해가 비친 물을 마시고 잉태했다’라는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곳이 승탑 아래의 석천 우물이다. 발굴 작업 후 복원해놓았다. ‘처녀의 아이가 마을 산에 버려지자 백학이 찾아와 보호했다’라는 설화의 현장은 절터의 남쪽 낮은 야산인 학산鶴山이다. 산의 정상에 학바위가 있다. 이는 마치 전남 영암 월출산 아래 신라 말 도선과 관련된, ‘빨래하던 처녀가 개울에 떠오는 오이를 먹고 도선국사를 낳았다’라는 국사바위 설화와 유사해 흥미롭다.
학산 학바위에 오르니, 이곳이 당간지주의 채석현장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횡으로 갈라진 학바위와 주변 암반들의 덩치가 그러했다. 그리고 승탑 아래 4~5백살 먹은 노송 언덕에도 당간지주와 눈짐작으로 비슷한 크기의 돌덩어리들이 쌓여있다(도7, 도8).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주변 2~3km를 훑었지만, 그처럼 커다란 돌이나 암반을 찾지 못했다.
땅 위로 솟은 굴산사 당간지주의 높이가 5.4m이다. 땅에 묻혀 숨겨진 부분을 생각하면 7~8m는 족히 될 터이다. 지하에 감추어진 밑뿌리는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보물 제69호)의 하단에 노출된 부분을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처럼 당간지주 하단에 큰 돌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무게는 눈에 보이는 덩치의 두 배는 넘지 않을까 싶다.
안양 중초사지의 당간지주(보물 제4호)에는 “보력寶曆 2년 병오년(827)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僧岳의 한 돌을 둘로 갈랐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옮겨 9월 1일 이곳에 도달했다. 정미년(828) 2월 30일 완성되었다. …(하략)”이라고 제작과정이 기술되어 있어 흥미롭다. 4m가 조금 모자란 크기의 돌기둥을 찾아 둘로 가르는 데 20여 일, 두 팀이 이동하는 데 4일 걸렸다. 돌을 사찰로 옮겨 6개월 만에 완성한 셈이다. 이 글 아래에는 참여 승려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의 경우 중초사지의 것보다 두 배는 더 크고 무거울 것 같은즉, 날 돌에 가까우니 옮기는 데 엄청나게 힘들었을 법하다. 현재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에서 학산 정상까지 직선거리로 600m쯤으로, 움직이는 길거리로 1km가 넘는다.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여러 날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학산마을에 전승해온 농요 ‘오독떼기’가 신라 말 굴산사 당간지주의 거석을 옮기던 노동요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도7 굴산사터 학산 학바위와 바위 군락. 채석장으로 추정된다.



도8 굴산사지 근처 5~6백년 된 노송과 바위덩어리들


오독떼기는 ‘돌을 떼서 옮기던’ 소리에서 유래한 듯

굴산사가 폐사된 이후 절터를 중심으로 강릉 학산마을이 형성됐다. 발굴 이전만 해도 승탑 근처까지 가옥이 들어섰을 정도였다. 마을 입구에 상당히 너른 솔숲이 있고, 여기에 삼신을 모신 원형 돌담과 세 돌무더기가 위치해 350여 가구가 살았다는 마을의 위상을 말해준다. 이 학산마을에 ‘강릉학산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라는 농요農謠가 전승돼왔다. 1971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부터 ‘강릉 오독떼기’로 알려져 유명하다. 지금도 강릉 단오제의 시작이자 중심을 이루고,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수회관이 들어서 있다. 바로 굴산사와 그 창건주 범일국사의 터전에 유지해온 전통민속이라 할 수 있겠다.
‘강릉학산오독떼기’는 물 푸는 소리, 논갈이, 모찌기, 모심기, 김매기, 벼베기, 타작, 등짐 소리, 영산홍 등으로 구성된 농요이다. 오독떼기는 김매기 소리에 들어 있는 소품이다. 신라 화랑의 풍류도에서 연유했다는 천년의 소리, ‘오독떼기’는 5방五方 혹은 다섯 곡[五曲], 다섯 번 꺾어 부르기 등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오독떼기’라는 말 자체가 ‘다섯 돌 떼기’ 내지 ‘검은 돌 떼기’, 혹은 ‘큰 돌 떼기’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 이리 보면, 오독떼기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굴산사 사원공사를 위해 ‘돌들을 떼 내어 옮기는’ 과정에서 부르던 노동요였을 법하다. 특히 선승으로 국사가 된 범일이 언젠가부터 대관령 산신이자 강릉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졌음을 감안하면, 더욱 강릉 단오제 행사의 출발지인 학산마을의 ‘오독떼기’도 범일이나 굴산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굴산사 당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존하는 대부분 당간지주는 기단을 갖춘 편인즉,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기단이 없이 아랫부분이 묻혀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두 돌기둥 사이 높다란 당간을 세워놓았던 받침돌의 구조는 불분명하다. 당간이 돌이었는지, 쇠였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이 굴산사 당간의 원형은 어떠했을까? 여러 당간의 사례와 비교하며, 이들을 빗대어 그 복원도를 그려보았다. 이는 다음 호에 소개하겠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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