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③ 강릉 굴산사지 석조 당간지주 上

도1 봄철 눈밭 속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사진 이태호, 2022. 03. 20



깃발을 걸기 위한 기둥, 당간은 지금의 국기게양대와 유사하다. 사찰의 경계나 권위를 표징하거나 행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당간지주 돌덩어리는 별 장식 없이 하늘로 곧추 뻗어 있다. 장대하고 육중하다. 그야말로 자연에 어울리는 환경 조형물이자 대지예술로서, 현대미술에 버금간다.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추상조각 명품으로 꼽고 싶다.

글·사진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올 겨울은 유난히 가물었다. 이 연재를 제안 받았을 때, 첫 대상으로 강릉 강문 진또배기나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떠올렸다. 당간지주를 두 번째로 삼은 것은 황량한 들 눈밭에 선 돌기둥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작년 12월부터 강릉을 다녔고,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였다. 겨울눈 오는 날을 만나지 못했고, 지난 3월 5일 이 연재 글을 쓰기 위해 마무리 답사를 하였다. 굴산사 당간지주와 절터, 그리고 굴산사 창건주 범일 국사와 관련한 유적지를 자세히 살피며 온종일 쏘다녔다. 매화꽃 향기가 짙어지고, 동해안 여기저기가 산불로 얼룩졌을 때였다.
4월호 원고를 펑크 냈을 때다. 뒤늦게 강원도에 봄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3월 20일 아침 기차를 타고 강릉을 향해 내달렸다. 예상대로 굴산사지 당간지주 두 돌기둥이 학산리 들, 하얗게 덮인 눈밭에 우뚝 서 있었다(도1). 사시사철 다 좋지만, 역시 하얀 들의 수직 조형물이 최고였다. 이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기에도 간단해 현장에서 살짝 언 곱은 손으로 몇 점 드로잉했다(도2). 고요한 눈밭 속 돌기둥이 돋보이는 남쪽 들에서 북쪽을 향해 포착한 그림이다.


도2 이태호, <굴산사지 당간지주와 들판 설경>, 2022, 면지에 수묵 스케치, 24×64㎝


하얀 눈밭에 우뚝, 선돌의 추상미

제작연대가 신라 말기~후삼국 시기(9세기 말~10세기 초)로 추정되는 <강릉江陵 굴산사지崛山寺址 당간지주 幢竿支柱>는 일찍이 보물 제86호(1963년)로 지정되었다. 5.4미터의 두 돌기둥이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181번지 농로 가장자리 논바닥에 나란히 서 있다. 서쪽으로 대관령 준령이 병풍을 두르고 동해안 바다를 넘겨보는, 남쪽으로 칠성산 능선이 감싼 너른 들 한 가운데 선 두 개의 돌기둥이 압권이다(도3). 당간지주 돌덩어리는 별 장식 없이 하늘로 곧추 뻗어 있다. 장대하고 육중하다. 그야말로 자연에 어울리는 환경 조형물이자 대지예술로서, 현대미술에 버금간다.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추상조각 명품으로 꼽고 싶다.
당간지주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맨 아래에 기단을 조성하고, 깃발인 ‘당幢’을 매다는 높은 장대 ‘간竿’을 땅바닥에 고정하는 두 개의 받침대 ‘지주支柱’를 말한다. 당간은 지금의 국기게양대와 유사하다. 깃발을 걸기 위한 기둥, 당간의 높이는 10~20여 미터에 이를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기울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당간지주 돌기둥은 2~3미터부터 5미터가 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당간은 사찰의 입구나 경내의 주요 위치에 세웠다. 야외 장엄으로 사찰의 경계나 권위를 표징하거나 행사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국에 100여 기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긴 하나, 쇠나 돌 장대를 갖춘 당간은 10여 기 정도이다. 대부분 강릉 굴산사지의 경우처럼 당간지주만 댕그라니, 절이 없어진 폐사지를 지켜온 사례가 많다. 대부분 국가나 지역 문화재로 지정된 편으로, 사원에 설치한 당간의 석조 지주는 문화유산으로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다. 불교를 수용한 아시아에서 우리나라 사원에 가장 많은 당간이 조성되었다. 그런 만큼 당간지주는 아시아 불교 문화권에서 한국적인 조형물로 손꼽을 만하다. 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7
단순한 수직 형상의 석조물, 당간지주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지역에서 8세기 전후부터 세우기 시작해 신라 중기 이후 고려 시대에 주로 제작되었다. 조각수법이 단순한 편이어서 시대 차에 따른 양식변화나 편년 설정이 쉽지 않다. 고려까지 이어진 당간지주 형식은 외면을 거칠게 다룬 사례들도 없지 않으나, 비교적 다듬어 세웠다. 외곽 띠나 선조 무늬를 넣는 게 통례이고, 외관으로 연꽃무늬를 새긴 사례도 있다.


도3 굴산사지 당간지주 주변과 남쪽 칠성산 설경


현대적 조형물 같은 자연 상태의 날 돌

학산마을 들녘 논바닥 가장자리에 세운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전국에 분포한 당간지주 가운데 높이 5.4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당차다. 동과 서로 일 미터 좀 못되게 벌려 배치한 양쪽의 지주를 각각 하나의 거대한 돌을 사용하여 조성하였다. 그리고 기단을 조성하고 다듬어 세우는 당대의 당간지주 형식과 달리 외형과 석면을 다듬지 않은 파격을 보인다. 거의 자연석 상태에 가깝다. 단순하고 소탈한 형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적 조형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도4).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암반에서 분리됐을 때, 최초의 덩어리 감을 살려 세운 점이 독보적이다. 동서로 배치한 두 석조 지주는 본디 한 몸이었을 듯하다. 이는 화강암 상단에 두 줄 사선으로 난 흰 석영 줄무늬가 같은 두께에 나란한 모습에서 서로 짝이 잘 맞는 것이리라 추정된다(도5).
거대한 돌덩어리에 새겨진 자연무늬가 도리어 시각적인 세련미를 준다. 암반에서 떼어낸 분리 흔적으로 모서리 세모 열마저 내버려 두었을 정도이다(도6). 떨어진 면을 다듬지 않은 상태 그대로 살려놓기도 했다. 날 것다운 맛이 일품이다. 마치 자연석 냇돌을 필요에 따라 깨어내고 개조해 주먹도끼 뗀석기를 만들던 구석기시대 인류 최초의 조형의식과도 상통하는 듯하다.
두 당간지주 기둥은 밑바닥 측면이 130㎝, 앞면이 75~85㎝가량이다. 북쪽 향해 오른쪽 돌 밑부분이 약간 너른 편이다. 약 1m 간격을 두고 동서로 위치한 두 돌은 옆면이 앞면보다 약간 넓은 사면체 형태로 수직으로 세워졌다. 당간 기둥을 고정하기 위해 핀을 끼우는 구멍, 간공杆孔은 지주의 상하에 한 뼘 정도로 둥글게 뚫었다. 두 지주의 구멍은 나란히 이어져 있어 구멍으로 반대편 풍경을 살짝 볼 수도 있다. 눈밭에서 보니 구멍 너머 먼 풍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도7)
당간을 세우고 고정하는 공간으로, 양 지주가 마주하는 한쪽 면만 평평하게 다듬은 편이다. 외면이나 사면체 라인에는 별도의 선조나 새김 장식이 없다. 다듬기를 고집하지 않고 떼어낸 상태 그대로를 살려 거칠다. 3면에서 돌 표면이 조금씩 두드러진 곳마다 망치로 쇠 정수리를 쳐서 부분부분 깎아 내었다. 길고 짧게 쪼은 정 자국도 사뭇 불규칙하다. 양 지주의 정상 부분은 좁혀들면서 끝이 뾰족한 형태로 곡면을 이루는데, 옮기면서 생긴 듯 동쪽 지주의 끝이 살짝 파손되었다.


도4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오후



(좌) 도5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상단에서 볼 수 있는 흰줄의 석영맥
(우) 도6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동쪽 상단에서 최초로 돌을 뗀 부분


무심으로 쪼은 돌조각

굴산사는 이곳 명주 출신 범일(梵日, 810-889) 국사가 창건하고, 그 법통을 따른 신라 말 9산선문九山禪門에 해당하는 선종禪宗 사찰이다. 명주 사굴산파 사굴산문闍崛山門으로 꼽힌다. 선종 불교는 범일 같은 당나라 유학 승려를 통해 신라 후기에 수용되었다. 범일 국사의 선 정신은 한국불교의 초기 선승禪僧으로 신라 선종의 달마 격인 도의道義 선사에서 찾을 수 있겠다. 굴산사와 가까운 양양 진전사에 주석해 선불교를 일으키고 전파한 도의의 사상은 ‘무위임운지종無爲任運之宗’으로 압축된다. 당나라에 유학해 무념무수無念無修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웠기에, 당대 교종 중심의 ‘왕즉불王卽佛’이 강조된 신라 불교에서 새로운 선승의 ‘무위법’ 내지 ‘자심즉불自心卽佛’ 강학講學은 마어魔語로 몰리기도 했다고 전할 정도이다. 그런 탓에 선종은 중앙권력의 경주보다 지역의 호족세력과 조우했다. 구산선문이라 지칭되듯이 전라 충청 강원도에 퍼졌다. 그러나 결국 신라 왕실도 범일 국사처럼 선승을 국사로 인정하게 되었다.
선종은 경전, 장엄, 의례 등을 강조한 교종과 달리 순간의 깨달음 방식으로 돈오頓悟의 경지를 추구했다. 미술사에서는 조선시대 김명국의 <달마도>로 유명하듯이 순간 빠른 필치로 대상의 특징을 압축해내는 수묵 감필법減筆法이 선종화 방식으로 선호되었다. 바로 굴산사지 당간지주의 무심한 조형수법은 선종불교의 유입에 따른 새 파격을 보여준다. 잘 다듬어 격식을 갖춘 기존의 경주지역 형식에서 벗어난 생김새이다.


(좌) 도7 당간지주 하단을 관통하는 구멍
(우) 도8 이태호, <김종영이 불각의 미를 추구하며 작업한 작품 79-21을 보고>, 2022, 면지에 수묵 스케치, 24×32㎝


정 자국 하나하나가 선법禪法 같아

대충 떨어내 만든 굴산사지 당간지주의 거치른 형태미와 거대 조각 수법은 곧 선종에서 ‘돈오’의 수행 방법을 떠오르게 한다. 그야말로 집착을 떠나 만사에 초연해 일정한 격식에 메이지 않은 ‘무상無相’의 이미지로 보인다. 이리저리 선명하게 남긴 정 자국 하나하나가 부처님 법문 같다. 범일 국사의 선禪 의식을 그렇게 구현한 석공도 상당한 경지의 도를 깨우치지 않았을까. 어쩌면 유학승 범일의 선禪과 무위 철학보다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이 무념무상의 실천자였겠다. 물론 석공도 승려였을 터이고, 그가 만든 형상을 이대로 허용한 범일이나 그 학통을 이은 선승의 높은 뜻을 기리게 한다. 아니었으면 이 하얀 누리에 외로이 선, 우리 미술 최고의 추상조각을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 당간지주의 조형미를 맛보며, 한국 현대조각의 거장 김종영이 추구하는 ‘불각의 미’를 떠올렸다. 작가는 노장 철학의 무위無爲 개념으로 ‘새기지 않는 새김의 조각’을 표방하며 최소한의 인공으로 단순하고 추상적 형상을 찾았다. 마침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불각(不刻), 상(象)을 조각하기>라는 제목으로 김종영 작품전(2022. 3.18~5.15)이 있어 들렀다. 김종영의 동글동글 구름 닮은 흰 대리석 조각 <작품79-21>이 당간지주와 대조적인 형태지만, ‘불각不刻’의 이미지로 눈에 들어 그의 손길을 따라 그려 보았다. (도8)

이 거대한 돌들은 어디서 왔을까

학산마을 들판에 드러난 당간지주 5.4m만 놓고 보더라도 그 규모가 매우 웅대하다. 이를 수직으로 서도록 땅에 박힌 부분까지 염두에 두면, 돌덩어리는 7m가 넘을 듯하다. 허허벌판에서 이 거대한 돌들은 어디서 옮겨 왔을까? 또 이 지주를 버팀목 삼아 세운 그 당간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이들에 대해서는, 굴산사 터와 범일 국사 이야기를 포함해 다음 회로 넘긴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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