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⑬ 17세기 ‘수락옹’의 소 그림

도1 수락옹, <수우도>, 17세기, 모시에 수묵담채, 21.1×18.1㎝, 개인 소장

조선이 사랑한 소, 그림과 조각(上)

한국 소, 한우韓牛와 관련한 문화는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 난 17세기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문헌 기록으로 밝혀진 대로 소의 사육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소고기 요리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이때 한국의 소 그림과 조각상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명작들이 출현했다. 이들에 대해 회화와 조각, 두 번으로 나누어 소개하겠다.

글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한국인의 자화상, 소 이미지

농경사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우리 민족은 소와 함께 해왔다. 농사를 지을 때 힘 좋은 일꾼으로, 온 민족의 보양식으로 단백질을 공급해온 점으로 그랬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운송수단을 마차보다 거의 소수레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소는 신에게 올리는 제수 음식을 대표했다. 조선시대 의례로 보자면 제상祭床에 소의 생고기를 올렸고, 술 담는 제기로 소 형상의 희준犧樽을 배치하였다.
또 권위의 상징으로 무소뿔을 고관의 허리띠 장식으로 썼다. 무소뿔로 만든 서대犀帶는 영의정과 동급의 1품직 벼슬아치의 관복에 착용했다. 외에도 소뿔은 화각장이라는 고급 목칠공예로 이용되었고, 가죽은 생활용품으로 널리 쓰였다. 뿐만 아니라 한민족은 소의 온 부위를 버리지 않는 요리를 발달시켰다. 세계 음식사에 내로라할 독보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수천 년 전 신석기~청동기시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소 새김부터 1950년대 이중섭의 <흰소>나 1980년대 이종구의 <아버지와 소> 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낱낱 이미지들은 우리 민족의 자화상 격이다. 시대에 따라 시대형식의 변화를 보이고, 작가마다 이룬 개성적 표현은 그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국 소, 한우韓牛와 관련한 문화는 임진·병자 양란을 격고 난 17세기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문헌 기록으로 밝혀진 대로 소의 사육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소고기 요리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이때 한국의 소 그림과 조각상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명작들이 출현했다. 이들에 대해 회화와 조각, 두 번으로 나누어 소개하겠다.
지금까지 조선 중기의 소 그림을 중국화풍의 복제로 오인해왔다. 이번 기회에 17세기 이 땅에 살았던 조선 소의 리얼리티와 그 변모를 재검토해보겠다. 또 동시대 소를 실감 나게 조각한 사례로, 한 <백자 희준>에 보인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이 명품을 중심으로 조선 소의 조각상에 대하여는 다음번에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소개하는 대표 소 그림은 ‘수락옹隨樂翁’이 그린 가작이다.

도2 수락옹, <모자우도>, 17세기, 비단에 수묵, 24×28㎝, 개인소장,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인용

17세기 ‘수락옹’의 무소 그림

2022년 봄 뉴욕 크리스티 옥션의 서울 프리뷰가 2월 말 삼청동 서울지사 갤러리에서 열렸다. 1531년 경의 <독서 당계회도> 한 켠에, 17세기 전형적인 소 그림 화법의 소품이 걸려 있었다. 장옥, 홍서주, 허자, 임백령, 송인수, 송순, 주세붕, 허항 등 12명이 참여해 학계에 널리 알려졌던 <독서당계회도>는 8억을 훌쩍 넘겨 문화재청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이 구입했고, 곧바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와 상대적으로 소 그림은 시작가에 겨우 낙찰될 정도로 관심 밖이었다. 내 눈에는 우선 그림이 좋아 보였다. 다행히도 옥션 전날 뉴욕 첼시에서 미술품 컨서베이터로 크게 명성을 얻은 김수연 대표에게 연락이 왔기에, 이 소 그림을 적극 추천했었다. 17세기 명작을 시작가에 구매했으니 횡재한 셈이다.
크리스티 옥션은 이 작품과 비슷한 화법으로 유명한 퇴촌 김식(退村 金埴, 579 ~ 1662)의 전칭작으로 올렸다(도1). 화풍으로 볼 때 타당한 설정이다. 퇴촌 김식의 할아버지 양송당 김지(養松堂 金禔, 1524~1593), 왕손인 이경윤이나 이영윤 형제, 이경윤의 서자 이징 등의 소 그림과도 연계되는 가운데, 김식 화풍과 가장 근사치이기에 그렇다. 제목은 ‘Water buffalo’라 붙였다. 큰 덩치의 수우水牛, 곧 무소와 닮은 외모 때문이다. 그림 바탕은 21.1×18.1㎝ 사이즈의 조선 모시로 보였고, 서명이 있는 왼편을 손바느질로 이었다.
X자 표시의 주둥이, 까만 눈동자 가장자리에 흰 선을 남긴 두 눈, 좌우로 날카롭게 뻗은 양뿔과 먹선의 왼쪽 귀를 묘사한 우직한 무표정이 정겹게 다가온다. 여기에 중간먹 몰골법으로 단순하게 입체감을 살린 머리, 기슴, 배의 표현은 큰 덩치의 물소 이미지에 적절히 어울린다. 더불어 목주름과 외곽 점선, 장화를 신은 듯한 관절 아래 다리 묘사와 움직임이 둔한 자세가 해학적이다. 소뿔과 발굽은 짙은 먹으로 마무리하면서, 무소를 골계미가 흐르게 표현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 중기의 새 양식이자, 16~17세기 소 그림과 딱 맞아떨어진다. 물가 벼랑에 짙은 농묵의 부벽준법을 활용한 절파풍 배경 표현도 당대 산수화 형식이 고스란하다.
이 그림에는 “수락옹이 그리다”라는 ‘수락옹사隨樂翁寫’ 행서체 4자가 화면 왼편에 분명하다. “즐거움을 따르는 늙은이가 그렸다”라는 의미이다. 김식의 아호로 짐작하기에는 양자의 필법에 차이가 있고, 배경 표현이 다르다. 무소의 이미지는 유사하지만, 수락옹이 농묵을 대범하게 쓴 배경에 비해 김식은 부드럽게 표현하는 편이다(도1과 도4 비교). 김식은 자를 중후仲厚, 호를 죽서竹西 혹은 퇴촌退村, 청포淸浦, 죽창竹窓 등이라 썼다. 김식과 유사한 소 그림을 그린 ‘수락옹’이 과연 누구일까 궁금해 찾아 나섰다.

도3 조선 소 9종, 《신편우의방》에서, 1580년 전주판본, 각 그림 10.5×2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수락옹은 연안김씨 집안의 김집

한참을 이것저것 여기저기를 뒤져보다, 반갑게도 ‘수락옹隨樂翁’을 만났다. 위창 오세창葦昌 吳世昌 선생이 집필한 《근역서화징》(계명구락부, 1928)의 <대고록待考錄>에 등장한다. 대고록은 ‘확인되지 않은 화가들을 늘어놓은 부록’이다. “隨樂翁 翎毛”라고 명기해 놓았다. 위창 선생이 이 수락옹의 무소 그림을 보았고, 그래서 수락옹의 장기를 영모화翎毛畵로 표기한 것 같다. 위창 선생이 수락옹의 화풍을 김식의 그것과 다르게 보았기에, <대고록>에 실어 후에 누군가 밝혀주기를 고대했을 터이다.
그리고 ‘수락옹’을 소 그림 화풍을 일으킨 김식의 집안에서 뒤져보았다. 마침 나는 1984년 《연안김씨족보》에서 김지와 김식을 찾아 생졸년과 조손祖孫 관계를 밝힌 적이 있었다. 이태호,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 金禔, 金埴-그들의 가정과 재세 년대>, 《選美術》 21, 선미술사, 1984
세종~성종 년간 명문 세도가였던 이들 집안을 살피니, 아호로 ‘樂’을 쓴 이가 여럿 보였다. 김지의 아버지로 김안로는 퇴재退齋나 용천龍泉이라는 아호 외에도, ‘희락당希樂堂’이라는 당호를 썼다. 김지의 증조할아버지이자 김안로의 할아버지 김우신金友臣은 성종의 세자시절 사부였고, 김안로는 아들을 성종의 부마로 보낸 뒤 권력을 행사했다 사약을 받은 고관이였다. 또 김안로의 부친 김흔金訢의 당호가 ‘안락당安樂堂’이어서 반가웠다. 김흔은 형 김심과 함께 김종직의 문인이자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호에 즐거울 ‘락樂’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수락옹’이 연안김씨 집안일 가능성을 점쳤다. 김식의 아호였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김식이 김안로의 ‘퇴재’를 따라 ‘퇴촌’이라 했으니, 오히려 김식의 형인 김집(金土集, 1576~1625)이 김안로나 김흔을 쫓아 ‘수락옹’이라 하지 않았을까? 김집은 진사시에 급제(1613)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근 삼백 년 잠시 잊혔던 화가를 찾아낸 것이다. 나는 40년 만에 ‘김지와 김식’ 논문과 자료들을 다시 펼치며, 새로이 ‘수락옹 김집’이라는 화가를 발굴했다는 기쁨에 이 글을 쓴다.
‘수락옹’을 뒤지는 과정에서, 또 ‘수락옹사隨樂翁寫’라 밝힌 다른 소 그림 <모자우도母子牛圖>가 손에 잡혀 무엇보다 반가웠다(도2). 사실은 첫 검색에서 같은 서명의 이 그림을 만났다. 김동진 박사의 명저 《조선의 생태환경사》(푸른역사, 2017)에 실린 도판이었다. 여기에도 김식의 전칭작으로 표기했다. 수락옹의 두 그림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두 작품은 16~17세기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서명이 분명한 소 그림이다. 당대 소 그림은 대체로 도장도 찍혀지지 않았거나 그림보다 훗날에 찍은 후낙관後落款이어서 전칭작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수락옹의 무소 그림 <수우도水牛圖>나 <모자우도母子牛圖>는 조선 중기 소 그림 형식의 대표로 삼아도 괜찮을 듯싶다.

도4 김식, <모자우도>, 17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90×44.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초기 수의학서의 소그림

나는 김동진 박사의 앞 책에서 ‘조선시대 생태환경의 변화로 사슴과 말이 사라지거나 축소되며, 소를 더 선호하는 풍조’에 대하여 눈길이 갔다. 명나라의 폐쇄 정책으로 강남 소의 수입이 좌절되자, 그 대신 덩치가 크고 힘센 오키나와 수우水牛를 가져왔던 점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무소를 조선소와 교배해 추위를 견디도록 육종하던 일에 대한 기록, 육우 수량의 폭발적 증가, 소고기의 엄청난 소비와 요리의 개발 등이 그러하였다. 1906년에 시행한 《조선 토지 농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소의 사육두수가 110만 마리였으니, 이와 버금가는 18~19세기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또 김동진 박사의 책에서 조선 초기 《조선우마의방朝鮮牛馬醫方》에 등장한 여러 소에 대한 이미지도 확인했다. 《조선우마의방》은 건문建文 원년(1399) 조선에서 발간된 소와 말에 대한 수의학서이다.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책은 《신편우의방新編牛醫方》과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을 합본해 만력 8년(1580) 전주에서 재발행한 판본인 즉, 일본에서 인쇄한 복간본이다. 이를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수집해 놓았고,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한적실에 전한다.
《신편우의방》은 목판본이지만, ‘형상과 털색으로 소를 보는 법’인 <상우형상급모색론相牛形狀及毛色論> 항목에 여러 소가 묘사되어 있다. 흑백 선묘의 황소, 흰소, 사슴 반점의 얼룩소, 검정소 흑우, 청우靑牛 등 각각의 이름과 간소한 평가를 곁들여, 9종을 늘어놓았다. 머리에 흰 무늬가 있는 ‘불효두不孝頭’와 흰 머리의 검정소 ‘상문喪門’은 좋지 않은 흉종凶種으로, 머리가 노란 흰 소를 우왕牛王으로 여겨 대길종大吉種으로 기술하기도 했다(도3). 이들은 수락옹의 물소형 그림 이전 사례로, 어쩌면 4세기 안악3호분 외양간의 황우, 흑우, 백우 등 고구려 소를 계승한, 지금 우리가 그 가치를 높게 인정하는 한우의 원조 격이다.

도5 이경윤, <기우취적>, 17세기, 종이에 수묵 33.7×51.4㎝,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17세기 조선을 살던 무소의 리얼리티

수락옹과 17세기 화가들의 무소 그림들이 상당히 많이 전한다. 적어도 고구려 때부터 이어온 한반도형 소들을 제치고 남방에서 새로 들여와 육종한, 힘지고 덩치 큰 수우水牛인 무소가 조선 소의 중심을 차지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김동진 선생은 《조선의 생태환경사》 다음으로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위스덤하우스, 2018)를 펴냈다. 농사일로 부려먹고, 잡아먹으며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했던 소의 활용과 변화를 조선의 역사를 읽으려 시도한 역작이다. 여기에서 소를 함부로 잡아먹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7세기부터는 하루 천 마리 이상 도살했으리라는 추정치를 제시한 점도 눈에 띄었다. 책의 제목처럼 소는 그야말로 ‘조선을 움직인 동력이었다’ 이를 만하다. 최근 강명관 교수는 ‘성균관과 반촌의 조선사’라는 부재를 붙여 《노비와 쇠고기》(푸른역사, 2023)라는 책을 내며, 조선 후기 소고기 육식의 발달을 밝혔다.
나도 그랬지만, 그동안 대부분의 미술사가는 김지, 김식, 이경윤, 이징 등 조선 중기 소 그림 표현방식을 중국 무소나 화보에 의존한 스타일로 치부했다. 관념적 회화로 넘겼다. 그런데 조선시대 소에 대한 새 정보는 ‘수락옹’을 대표해 16~17세기 유명 화가들이 그린 소 그림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도록 주문하는 것 같다. 당대 무소 그림은 임진·병자 양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소와 관련한 문화가 뿌리를 내렸던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여러 소 그림이 인기를 얻었고, 스타일을 정착시켰다고 여겨진다. 실제 동시기 중국의 소 그림들을 뒤져봐도, 수락옹이 그린 무소의 양식은 여간 잘 보이지 않는다. 수락옹류의 소 그림은 조선 전기 육종에 성공한 무소를 그린, 17세기 회화의 사실적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무소 그림 외에도 조선 중기에는 소 등에 탄 아동이나 피리를 부는 동자가 그려진, 불교적 도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목동이 잃은 소 찾기와 기르기, 그리고 떠나는 과정을 서술한, 십우도十牛圖 심우도尋牛圖 목우도牧牛圖처럼 불교에서 깨달음 찾기와 관련된 화제이다. 소를 타고 대금 부는 소년을 설정한 김식의 <기우취적騎牛吹笛>(간송미술관)이나 <모자우도>(국립중앙박물관, 도4), 이경윤 작품으로 추정되는 <기우취적>(간송미술관)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도5).

도6 조영석, <송아지와 어미소>, 《사제첩》, 18세기, 종이에 수묵, 20×24.5㎝, 개인 소장
도7 어미소의 젖을 먹는 송아지

18세기 한우다운 외모로 변모한 사생화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시기 소 그림의 사생화 전통이 서며, 우리 눈에 익은 한우의 형태가 뚜렷해졌다. 18세기 전반 영조 시절 그러한 소 그림의 이미지는 풍속화의 선구인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나 관아재 조영석, 화원 남리 김두량, 진경산수화의 완성자인 겸재 정선 등의 작품에 등장한다.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 단원 김홍도나 긍재 김득신 등의 풍속화에도 실감 나게 생활공간의 소가 그려져 있다. 쟁기질을 비롯해서 소등에 탄 가족이나, 나뭇짐을 지고 소를 앞세우거나 올라탄 목동 등이 그 예이다.
이들 가운데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의 《사제첩麝臍帖》에 포함된, 젖을 짜는 어미 소와 송아지를 그린 <채유도>나 젖을 빠는 <송아지와 어미소>가 조선 황소의 사생화로 대표작이다. 영조 시절 겸재 정선과 도타운 친분의 조영석은 ‘산천초목, 인물이나 옛날과 지금의 의관과 생활 용기와 사회 법도에도 밝고 능통해야 좋은 그림이 되고 유용한 기예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라며 회화의 사회적 효용성을 간파했다. 따라서 ‘대상을 직접 상대하여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라는 ‘즉물사진卽物寫眞’의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던 문인화가이다. 李泰浩·兪弘濬, <관아재 조영석의 회화>, <관아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유홍준·이태호 공동기획, 《관아재 조영석》, 동산방, 1984. ; 이태호, 《풍속화(하나)》, 대원사, 1995.
지금의 스케치북으로 생활풍속을 사생한, 《사제첩》의 소, 개, 닭 그림 등 동물 소묘에는 현장 묘사의 맛이 물씬 난다. 특히 <송아지와 어미 소>는 어미의 젖을 빠는 송아지를 보면서 직접 스케치한 듯 현실감이 물씬하다(도6, 도7). 그런데 황소의 외모가 17세기 무소 형태와 상당히 달라졌다. 두 뿔이 작아지고 앞을 향해 있으며, 머리가 큰 편이어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아 보인다.

도8 김홍도, <경작도>, 《병진년화첩》, 1796년, 종이에 수묵담채, 26.6×31.4㎝,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정조 시절 김홍도의 소 그림으로는 쟁기질 풍속도가 떠오른다. 풍속화첩 가운데 두 마리의 겨리소 <쟁기질>과 1796년에 그린 《병진년화첩》(삼성미술관 리움) 중 호리소의 <경작도>가 대표작이다. 이들 황소는 조영석이 사생한 것과 유사하다. <경작도>는 김홍도의 필력이 가장 무르익은 시기의 <소림명월도> <옥순봉도> 등 걸작이 포함된 《병진년화첩》에 포함된 풍속도이다(도8). 개울가 잡석 언덕에 봄물 오른 느티나무에 까치 한 마리가 집을 짓는 듯하고, 그 아래 두 양반네가 담소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너머에 호리소의 쟁기질 장면이 전개된다. 언덕에는 뒷모습의 삽살개가 쟁기질을 구경하고, 그 오른편으로 새참 보퉁이 두 개가 놓여 있다. 작은 화면에 농촌의 봄맞이 정경을 가득 담은 풍속도이다.
쟁기질하는 황소는 멍에에 눌린 목, 가벼운 발동작의 일하는 자세, 그리고 양 뿔의 좌우가 살짝 다르게 자란 양각 등이 명쾌하다. 디테일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김홍도의 탁월한 묘사 기량을 한껏 뽐냈다. 일하는 황소의 벙긋한 미소년다운 표정, 그리고 쟁기질하는 노인 농부의 무념무상 도인다운 표정과 자세는 풍속화의 거장 김홍도의 예술적 매력을 어지간히 발산한다.

도9 작가미상, <황소>, 19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담채, 20.9×15.9㎝, 개인 소장

조선 후기 황소의 변모와 정착을 보여주는 또한 소품으로, 19세기 전반경의 미공개작 <황소> 그림을 최근 반갑게 만난 적이 있다. 황소의 뿔, 등 주름, 장화 신은 듯한 앞 다리 등을 보면 17세기 무소의 유전자가 엿보여 눈길을 끈다. 작가 미상으로 그림 상단에 ‘세속의 밖에서 노닌다’는 의미의 ‘유방지외遊方之外’라는 양각 도장 한 방이 달랑 찍힌 수묵담채화이다(도9). 배경에 담채와 옅은 먹의 갈필 처리는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41)의 화풍을 연상케 한다. 지난 ‘미술사 여담’ 12회에서 살펴봤듯이 ‘유방지외’도 여행 스케치를 즐긴 정수영의 인생을 떠오르게 한다. 코뚜레를 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소는 아닌 듯하다. 어눌한 묘사에 멍한 소의 표정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방외인方外人의 초상을 연상하게 한다. 화가도 이 황소를 닮았을 법하다.

도10 <백자 희준>, 17세기, 높이 18.3㎝, 길이 27㎝, 간송 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17세기 무소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처럼 담채 형식에서 선묘의 묘사 방식으로 바뀌며, 18세 기 이후 소의 모습도 변한 듯하다. 양각이나 몸집은 남방에서 온 무소의 성징性徵이 거의 사라진 듯하며, 지금 우리 눈에도 익은 누렁이 한우에 가깝다. 17세기까지 조선 땅의 주종이던 무소가 사라졌을까? 아니면 우성으로 유지되던 열대지방 무소의 유전자가 조선 땅에서 100년을 더 견디며 바뀐 결과일까? 이렇게 변모해 정착한 18세기의 황소 이미지는 이후 19~20세기로 이어졌다. 그 결과는 1950년대의 박수근이나 이중섭의 소 그림부터 이종구의 그것까지 한우의 외양에 잘 드러나 있다.
다음 호에는 17세기 <백자 희준>을 중심으로, 그 이전 초기 양상과 18세기 이후 궁중에서 쓴 청동 희준의 조각미를 함께 살펴보겠다(도10).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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