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태호 교수의 미술사 여담 ⑪
근대 수묵산수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의 집안과 고향을 찾아

도2 이상범, <유경>, 1960년, 종이에 수묵담채, 75.5×342.5㎝, 리움미술관 소장



우리 땅의 향토적 정서를 독창적으로 그려낸 청전 이상범은 일명 ‘청전산수’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인적이 드문 산골 야산을 담은 화면에는 현대문명이 침식하기 전 한국의 강산이 펼쳐진다.
본디 조선 산하가 가졌던 원형을 전통 계승과 재창조로 찾아낸 것이 그의 크나 큰 업적일 것이다.

글 이태호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은 한국회화사에서 근현대 수묵산수화가로 우뚝하다. 조선 후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이후 한국미술사를 대표할 거장이다. 이상범의 산수화 작품들은 ‘청전산수’라 일컬어질 정도로 우리 땅의 향토적 서정을 개성적으로 표출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청전산수의 고즈넉한 풍경 그림은 급속한 산업화를 겪던 시절, 장년층에게 옛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까닭이다. 인적이 드문 산골 야산을 담은 화면에는 현대문명이 침식하기 전 한국의 강산이 펼쳐진다. 이처럼 본디 조선 산하가 가졌던 원형을 전통 계승과 재창조로 찾아낸 것이 청전산수의 대업이겠다(도1).


도1 청전 이상범의 말년 작업 모습, 누하동 청연산방 화실, 1960년대 말


Action Painting이나 All over painting 같은 운필의 청전산수

청전산수는 풀섶이 우거진 언덕, 시내가 흐르는 산등성이, 듬성한 미루나무들, 그 속에 허물어질 듯한 기와집이나 초가집, 고성과 성루, 개울가의 다리, 소를 몰고 가는 농부, 지게를 진 남정네, 머리에 짐을 인 아낙, 거룻배와 낚시질하는 노인 등 당시 시골에서도 사라져 가던 풍물을 담았다. 어린 시절 눈에 익은 고향에 대한 이상범의 추억이자, 옛 화가들의 산수인물화를 새롭게 번안한 소재들이다.
옆으로 긴 화면에 구사한 개성적 필묵법은 청전산수를 돋보이게 한다. 자유로이 속사한 농묵과 갈필로 전통적인 부벽준이나 절대준 형식의 암반과 언덕을 묘사했고, 미점준을 화면에 깔면서 땅에 드리운 그늘을 살려냈다. 붓끝을 세워서 리드미컬하게 풀섶과 나뭇잎을 묘사한 필법도 매우 독특하다. 비스듬히 운필運筆한 일정한 방향의 터치, ‘붓을 눌렀다, 들었다, 뉘었다, 세웠다’ 한껏 무르익은 이상범의 붓놀림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회화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전면 균질회화라 일컫는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을 연상할 정도이다. 이태호, <청전의 산수와 현대 한국화>, 《산수화 4대 가전》, 호암미술관, 1989.
청전산수의 향토적 서정성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유경(幽境)>(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 절정기 걸작으로 꼽힌다. ‘庚子秋 靑田’이라고 밝힌, 1960년 가을에 그린 제9회 국전 출품작이다. 전통 수묵 산수화 형식을 근대 회화로 재창조한, 형식미를 갖춘 대표작이자 3m가 넘는 대작이다. 1950~1960년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민둥산이자 이상범의 고향 풍광답다. 스산한 언덕풍경 풀섶에 그림자를 깔고 그 아래에 흐르는 개울을 수평구도로 잔잔하게 펼쳐놓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 붓질만이 화면에 넘실대며, 한 그루의 나무도 보이지 않는 개울가 언덕 능선표현에서 이상범의 숨결이 느껴진다. ‘외떨어지고 조용한 경치’라는 의미의 <유경>으로 제목을 단 점도 해거름이 고즈넉한 자연풍경의 감흥과 잘 맞아떨어진다. 어둠이 드리운 산언덕을 뒤로 한 채 소를 앞세우고 귀가하는 지게 진 농부가 강둑 길 그늘에 느릿하다(도2).


도3 이상범 생가 언덕에서 본 공주 정안 들과 천태산경, 사진 이태호


이상범의 고향, 공주 석송리 풍광과 유적

청전 이상범의 고향은 충남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정안 휴게소 바로 동쪽 아래이다. 아버지 이승원은 이곳에서 세 아들을 낳았고, 광무 원년(1897) 9월 21일 막내 이상범이 태어났다. 이상범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인 1898년 2월, 아버지 이승원이 세상을 떠났고, 이상범은 석송리 안말 마을에서 10살까지 지냈다. 1906년 어머니 김해김씨가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상경했다고 한다.
이상범 생가는 공주의 큰 산 무성산이 감싸고 동향한 산기슭, 반달 모양을 이룬 작은 마을에 있었다. 이곳 석송리 안말은 너른 들판에 정안천이 흐르는 풍광을 굽어보는 안온한 마을이다. 지금은 마을 위로 논산·천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마을 앞으로도 포장도로가 놓이면서 옛 정취는 사라졌다. 정안천은 북쪽에서 공주 중심으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이다. 생가터는 안말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들과 강이 열리고, 건너편에는 마곡사가 위치한 태화산과 천태산이 남북으로 병풍처럼 전개되는 명소이다(도3). 이곳이 온화한 기질과 성격, 부드러운 산세의 화풍을 키운 작가의 터전이다. 앞의 <유경>처럼 이상범이 평생 그린 완만한 능선의 언덕과 산세는 이곳 풍경과 오버-랩 되기도 한다.


(위) 도4 인조가 행차한 유적 석송동천의 석송정과 비, 멀리 이상범의 고향 안말이 보인다. 사진 이태호, 2023.
(아래) 도5 바위글씨 石松洞天



마을 남쪽 모퉁이 언덕에는 바위 덩어리들이 들과 토산에 이색을 띠고 유별나다. 큰 덩어리 바위 면에 비스듬한 행서체로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는 음각 글씨가 눈길을 끈다(도4, 도5).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남쪽으로 피신하던, 인조 임금이 공주에 진입하던 도중에 이곳에서 휴식하며 쓴 것으로 전해온다. 임금이 잠시 머문 장소를 기념해 지역 유림들이 바위 글씨 곁에 석송정을 건립했다. 사라졌던 정자를 1989년에 복원했고, ‘조선인조대왕 석송동주필사적비 朝鮮國仁祖大王 石松洞駐蹕史蹟碑’를 세우기도 했다. 마침 바위 언덕 아래에 소나무 한그루가 석송동천의 이름과 지명을 알려주려 자라 있다. 지금의 젊은 소나무는 인조가 쉬면서 보았던 400년 전 것의 손자쯤 되겠다. 석송동천이 새겨진 바위가 외송과 어울린 언덕, 인조가 머물렀던 기념공간을 그려보았다(도6).


도6 이태호, <석송동천 바위와 소나무>, 2023.3, 면지에 수묵 스케치, 24×64㎝


독립지사를 배출한 전주이씨 집성촌

이곳 석송리는 이기한(李綺漢, 1868~1941)과 이병림(李秉霖, 1889~1919) 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충청지역 기미 3·1운동의 발원지로 알려진 곳이다. 마을 앞들에는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기한 선생은 1919년 4월 1일 공주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병림 선생은 이날 일본인 순사의 총탄에 산화했다. 두 독립지사는 전주이씨 ‘무림군파茂林君派’이다. 이상범의 집안은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에 해당한다. 마침 무림군과 덕천군은 정종 임금의 왕자였다. 덕천군은 정종의 10남, 무림군은 15남이었다.
석송리에는 두 계파가 어울려 집성촌을 이루었던 듯하다. 이상범의 생가는 이기한 지사가 살던 집의 바로 언덕 위 왼쪽에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건에 이상범도 연유되어 고초를 겪은 일은 석송리 출신다웠다. 그런데 1940년대에 들어 친일 활동으로, 그 정신이 훼손되었다고나 할까.


도7 석송리 안말 이상범 생가(위)와 독립지사 이가환 가옥(아래 파란 지붕)



2012년 이곳 석송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본 이상범의 생가는 공주 정안의 유명한 밤나무 숲이 우거진 빈터였다. 6년 뒤 2018년에 다시 찾으니 누군가 터를 넓히고 집을 짓고 이사와 살고 있었다(도7). 올해 충남역사연구원에서 이상범 평전을 의뢰받고 세 번째로 방문하니, 공주시가 안내 설명판을 세워 놓아 반가웠다. 이번에는 석송동천과 3·1 독립운동 유적지를 확인했다. 더불어 이상범의 부친 이승원 행적을 새로이 보완했기에 여기에 그 일부를 미리 선보인다.
이상범이 전주이씨 왕실의 후예 ‘덕천군파’로 밝혀진 것은 삼성미술재단이 1997년 ‘한국의 미술가’ 시리즈로 《청전 이상범》 화집을 발간했을 때이다. 이상범 집안이 제공한 《전주이씨 덕천군보全州李氏德泉君派》(1993)에서 확인했던 것 같다. 이번에 아버지 이승원(李承遠, 1849~1898)의 가계를 왕실 족보에서 찾았다. 소략하나마 《선원계보璿源系譜》의 속편으로 1902년에 인쇄한, 활자본 《선원속보璿源續譜》 ‘덕천군파德泉君派’ 9권에 올라 있다. 이상범의 부친이 덕천군의 14세손이니, 이상범은 15세손이 된다(도8).
덕천군은 조선 2대 임금인 정종定宗의 열 번째 왕자 후생(厚生, 1379~1465)으로, 덕천군파는 효녕대군파와 비교될 정도로 20만 명가량 번창했다. 묘역과 사당이 현재 세종시로 편입된 장군면 태산리에 위치하고, 연기, 공주, 홍성 등 충청지역에 집성촌이 집중한 편이다. 여담이지만 덕천군의 생모는 성빈誠嬪 지씨池氏로, 고려말 무장으로 권세가 지연(池奫, ?~1377)의 딸이다. 지연은 세 딸을 정종과 그 큰형에게 시집을 보내 태조 이성계와 겹사돈을 맺었다.
덕천군파가 배출한 서화가로는 조선 후기 소론계열로 원교체圓嶠體라는 조선 서풍을 일으킨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그의 두 아들 이긍익과 이영익이 손꼽힌다. 신한평이 1775년에 그린 <이광사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어쩐지 무인다운 기개가 넘친다. 또 조선말 문인화가 석범 이건필(石帆 李建弼, 1830~?), 현대 추상화가 이봉상(李鳳祥, 1916~1970)이 덕천군파 족보에 보인다. 이들은 모두 덕천군파에서 제일 큰 집안을 이룬 ‘함풍군파咸豊君派’로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1577~1640)의 후손이다.


도8 1903년에 발간한 《선원속보 덕천군파》 권9, 14세 이승원 집안


이상범의 부친, 조선말 무관을 지낸 이승원의 행적

이상범의 부친 이승원李承遠은 ‘덕천군파’에서 규모가 비교적 적은 ‘장연공파長淵令派’에 속한다. 《璿源續譜》 ‘德泉君派’ 卷9, 1902. 이 왕실 족보에 의하면, 이승원은 “헌종 때인 기유(1849년) 2월 19일에 태어나, 무과에 급제해 군수 벼슬을 지냈다. 무술(1898년)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내기內基에 썼다. 부인은 능성구씨 구응조具應朝의 딸로, 을사(1845년) 9월 7일에 태어났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이승원의 묘소는 ‘내기’, 곧 살던 마을인 ‘안말’에 마련했다는데 찾지 못했다. 이승원의 부친과 집안 산소는 홍성 잠방동潛方洞에 있었다. 이들 묘소 위치로 미루어 볼 때, 이승원은 충청지역 선조先祖를 따라 공주에 터전을 마련한 듯하다. 1892년 절충장군 공주진영장公州鎭營將으로 부임하면서 김해김씨와 재혼한 뒤 이곳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안말’ 마을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선원속보》에 따르면, 이승원의 부친 이면희(李勉曦, 1816~1881)는 진사시에 급제하고 벼슬은 도정都正을 지냈다. ‘도정’은 종친부와 돈령부의 당상관으로 왕실의 종친宗親에 한하여 임명한 관직이다.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진사 이면희는 이상범의 친할아버지이다. 이상범의 손녀로 미술사를 전공한 이승은 선생에게 확인하니, 이승원의 친동생 이응원李應遠의 후손들 일부가 근래까지 공주에 살았다고 일러준다. 그런데 《선원속보》에는 ‘능원能遠’이라 쓰여 있다.
이상범의 부친 이승원은 무관으로 활동한 기록이 상당하다. 고종6년 종9품 의소묘 수위관(懿昭墓守衛官, 1869.2.7)이 첫 벼슬로 검색된다. 의소(懿昭, 1750~52)는 사도세자의 큰아들이다. 왕세손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위를 동생인 정조가 승계했다. 의소묘는 안산 남쪽(현재 아현동 중앙여고 부근)에 썼고, 1949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했다.
이승원은 고종17년 선전관(1880.12.29), 부사과(1884.윤5.5)를 거쳐, 친군전영초관(親軍前營哨官, 1885.4.14)으로 6품직에 올랐다. 훈련원첨정(1886.8.6), 친군장위 영영관(1888.4.29)을 거쳐 종6품 외관직에 나가 평해군수(1890.1.29.)에 이어 칠원현감(1890.8.8.)으로 고을 수령을 역임했다. 공주진영장(1892.7.30)으로 오르면서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을 받았다. 내금위장(1893.3.26.)과 오위장(1893.7.26)을 거쳐 첨지중추부사(1893.8.4)에 올랐다. 친군총어영협여파총(親軍摠禦榮挾輿把摠, 1894.8.4)에서 종2품 전주중군(全州中軍, 1894.3.15.)으로 관료 생활을 마무리했던 모양이다. 《승정원일기》 전주중군 시절에는 1차 동학농민혁명을 마무리하는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맺어졌기에, 이승원이 전주 진영 사령관으로 어떤 역할을 하였을 법하다. 평양으로 부임하려다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에 대한 정부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승원의 행적은 왕실 후손인 데다 유능한 무신으로 순탄했던 관료 이력이다. 칠원현감 시절 고종 15년(1891)에 지역 유림의 지원과 더불어 향교를 대대적으로 중건한 업적이 《함안읍지》에 기술되어 있다. 현재의 대성전, 명륜당, 풍화루 등 칠원향교는 이승원이 복원한 대로 남아 있다(도9). 또 진주목에서 가진 경상도 무과 초시 때마다 참시관參試官으로 참여했다. 《各司騰錄》 <慶尙監營啓錄>, 1891.2.16./10.3~4
무신으로 이승원의 품위는 공주진영장에서 내금위장으로 상경한 직후, 1893년 4월 충청감사 조병호의 장계에 잘 드러난다.


(위) 도9 칠원향교 전경, 사진 이태호, 2023. 3 / (아래) 도10 평해향교 태화루 아래 비석들, 사진 이태호, 2023.3



“전 공주진 영장 이승원은 씩씩한 장수의 풍모를 지닌 데다 사리에 밝아 여섯 달 동안 진에 있으면서 일 처리가 훌륭하였음으로, 온 경내에서 칭송하여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고종30년 4월 8일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평해군수를 지낸 직후, 이방吏房이 조성한 이승원 송덕비가 평해에 전한다. 이 ‘군수 이승원 영세불망비’는 현재 평해향교 안 태화루太和樓 누각 아래 옮겨져 있다. 13기 가운데 순찰사 김성규와 향교직원 손영복을 제외하고, 배열해 있는 평해군수 영세불망비는 11기이다(도10). 왼쪽 두 번째가 이승원 송덕비이다(도11, 도12). 화강암으로 높이 99㎝, 너비 38.5㎝, 두께 7.3㎝이다. 앞면의 비문과 군수에 대한 칭송 글은 아래와 같다. 《울진의 금석문》에서 재인용, 울진문화원·한국수력원자력 울진원자력본부, 2012.

“군수 이공승원 영세불망(郡守 李公承遠 永世不忘)”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을 도와주니 은혜가 산과 같네. (손름보경損廩補檠 혜금등천惠金等阡)
온 고을이 칭송하면서 백성은 훌륭한 수령을 얻었다고 말하네. (여송일경輿頌一境 민유이천民有二天)”

뒷면에는 “경인 8월 이방 황문조 庚寅 八月日 吏房 黃文祚”라고 밝혀놓았듯이, 1890년 8월 이방 황문조가 비문을 쓰고 이승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1890년 정월에 평해군수로 부임해 이해 8월까지 짧은 근무 기간이었음에도 백성들의 칭송을 담은 영세불망비의 조성은 황실 후예에 대한 배려일까 싶기도 하고, 좀 이례적인 듯하다.


도11 군수 이승원 영세불망비 앞면, 1890.8


이상범의 형제와 후손들

이상범의 첫 연보 정리는 1972년 유작전 때, 이구열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청전화집》, 동아일보사, 1972 여기에 이상범의 고향과 부친이 밝혀지고, 어머니 김해김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상경해 ‘생활 극빈’이라 명기하였다. 그런데 족보의 부친 이승원 집안과 무관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그리 생활이 곤궁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왕실의 후예로 조부가 진사시에 급제해 관직을 받았고, 부친이 무신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고위직에 올랐던 점만으로도 그렇다. 당시 이상범 집안이 공주에서 상경해 도성 안으로 정착했음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선원속보》 덕천군파에 의하면, 이승원은 첫 부인 능성구씨와 사이에 아들 상덕象悳을 두었다. 이상덕은 1887년생으로 이승원이 한양의 훈련원첨정 시절에 태어났다. 이상덕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경력經歷을 지냈다. ‘경력’은 중앙군 부대인 오위도총부에서 행정업무를 맡던 종4품직이다. 이태 뒤 1889년에 이승원은 다른 여인에게서 서자 상목象穆을 얻었다. 이상범의 맏형 이상덕은 아들 건희建喜를 두었고, 이건희의 후손은 등록되어 있지 않다. 1902년에 완성된 《선원속보》에 이들은 나와 있는데, 이상범 형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선원속보》에 등제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을 터이다.
1993년에 발간한 족보 《전주이씨 덕천군보 全州李氏 德泉君派》에 부인 김해김씨가 낳은 상만, 상무, 상범 세 아들이 올라 있다. 이상범의 큰형 이상만은 측량학교, 둘째 형 이상무는 보성고보에 진학했다. 이상범은 사립계동학교를 마치고 진학하지 않은 채 서화미술회 서화과정에 들어가, 화가의 길을 갔다. 둘째 이상무가 금광업으로 청진동의 큰 부자로 성장했고, 집안 경제를 일으켰다. 이상범의 누하동 화실 청연산방도 형 덕으로 마련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상덕의 큰아들로 이승원의 장손 건희는 보이지 않고, 두 아들 건형과 건태, 두 손자 용하와 윤하 이름이 올라 있다.


도12 군수 이승원 영세불망비 뒷면, 1890.8



1993년 족보에는 이상범의 네 아들 건영, 건웅, 건호, 건걸은 물론이려니와 손자 승하, 석하, 일하까지 올라 있다. ‘영웅호걸’이라 이름 지은 게 인상적이며, 무관 할아버지를 둔 집안답다. 건영과 건웅 사이에 딸 건진을 두었으며, 이건진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동농 김가진(東農 金嘉鎭, 1846~1922)의 손자와 혼인했다. 김가진은 안동김씨 선원 김상용의 후손으로, 인왕산 아래 장동의 뿌리 깊은 세족 출신이었다.
이상범의 재능을 이어받아, 후손 가운데 화가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수묵화가였던 이상범의 큰아들 건영은 월북해 활동했다. 막내 건걸이 청전산수 화풍을 승계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상명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지냈으며, 청전화숙인 청연산방을 지켰다. 큰아들 건영의 딸 인하, 둘째 아들 건웅의 아들 승하, 건걸의 딸 승은이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나왔고, 외손녀가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승하가 현재 중진 화가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모두 미술사를 전공한 이승은 선생과 인터뷰하며 받아적은 내용이다.

이태호 |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및 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 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다산숲 아카데미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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