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 세계를 홀리다 – 세계미술사 속에 펼쳐진 책거리

우리 그림 세계를 홀리다
세계미술사 속에 펼쳐진 책거리

지난해 여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서예박물관의 재개관을 기념하는 두 번째 전시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 문자도文字圖·책거리冊巨里>가 열려 조선 후기의 채색화 전시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전시되었던 작품 중에 다수의 책거리 병풍들이 ‘The Power and Pleasure of Possessions in Korean Painted Screens(한국 채색 병풍에 나타난 소유의 힘과 즐거움)’이라는 제목의 순회 전시를 통해 현재 미국에서 선보이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현대화랑의 후원으로 경주대학교 정병모 교수와 다트머스 대학 김성림 교수가 기획한 미국 순회전의 첫 번째 전시는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찰스왕센터(Charles B. Wang Center)에서 열렸다. 찰스왕센터의 전시는 궁중 책거리 및 민화 책거리와 함께, 특별히 책거리를 모티브로 다양한 해석을 보여주는 여러 현대 작가들의 작품 등 총 35점의 책거리가 어우러져 18세기에서부터 21세기의 한국 책거리 문화를 통시적으로 볼 수 있는 화려한 전시였다.
미국 내 두 번째 전시는 4월 15일부터 6월 11일까지 캔자스대학교의 스펜서미술관(Spencer Museum of Art)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의 개인 소장가들과 여러 미술관들의 궁중 책거리 및 민화 책거리 13점과 함께, 스펜서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회화 및 도자기, 공예품 등을 전시하는데, 최근에 한국에서 복원을 마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도 공개되었다.


미국 내 첫 책거리 학회 큰 호응

특별히 이 전시의 개막과 연계하여 4월 14일과 15일 양일간에는 Paintings in Brilliant Colors: Korean Chaekgeori Screens of the Joseon Dynasty(화려한 채색화 : 조선시대 책거리 병풍)라는 제목으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스펜서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 어썸스와 필자가 함께 기획한 이 학회는 미국 내에서 열린 첫 책거리 학회이며 캔자스에서 열린 첫 한국미술사 학회로서, 수준 높은 논문발표와 심도 있는 질의응답을 통해, 책거리의 세계미술사적 넓이와 한국미술사적 깊이를 드러내어 큰 호응을 얻었다.
학회의 시작은 미국 내 한국미술사학의 개척자인 UCLA(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미술사학과의 부르글린트 융만(Burglind Jungmann) 교수가 맡았다. 융만 교수는 “Chaekgeori: Court Culture and Foreign Inspiration in Joseon Painting(책거리: 조선회화의 궁중문화와 외래영향)”이라는 기조 강연에서 조선후기 궁중 회화에 나타난 중국 청황실을 통한 서양화 기법의 선택적 수용과 한국적 변용을 강연하였다. 융만 교수는 19세기 조선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채색 병풍의 대표적인 예인, 1868년 신정왕후의 회갑잔치를 그린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 곤륜산의 여신 서왕모의 생일잔치를 그린 요지연도瑤池宴圖, 당나라 장군 곽자의의 생일잔치를 그린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용상의 뒤를 장식하는 일월오봉도一月五峯圖 병풍의 용도와 양식, 세부 묘사를 비교분석함으로써, 책거리병풍도 같은 맥락 안에서 제작된 그림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습득한 서양화 기법과 정물화 사조가 한국인의 취향과 관심에 맞게 궁중 책거리 병풍에 적용된 것과, 나아가 실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던 책거리가 현대적으로 추상화되는 양상도 조명하였다.


책거리의 기원과 의미를 다시 되짚어본 시간


이튿날 이어진 네 개의 세션에서는 각각의 주제에 따라 책거리의 기원과 확산에 대한 다각도의 논의가 이어졌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Chaekgeori in Global Context(책거리의 세계적 맥락)라는 주제 아래 다트머스 대학의 조이 켄세스(Joy Kenseth) 교수, 세인트 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크리스티나 클루트겐(Kristina Kleutghen) 교수, 프린스턴 대학의 제롬 실버겔드(Jerome Silbergeld) 명예교수가 발표를 하였다. 켄세스 교수는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만연했던 예술품 및 희귀 동식물의 수집과 전시 취미를 보여주는 박물관과 살롱 내부의 기록화들과 책장을 사용한 정물화들 통해 책거리의 서양적 기원을 제시하였다. 클루트겐 교수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거쳐 중국 청황실 내부 벽장식에 사용한 통경화通景畵라는 벽화 장르를 소개하며, 황제의 명상과 휴식을 위한 공간에 투시원근법을 사용한 눈속임기법으로 그려진 이러한 통경화가 청황실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를 암시하는 회화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실버겔드 교수는 18세기 후반 조선의 왕, 정조를 통해 정치적이고 민족적으로 더욱 부각된 책거리의 유행을 유럽의 박물관과 공공 도서관 문화와 연결하여, 대중을 위한 학문적, 문화적 공공 기관들이 없던 시대에 그 정치적, 문화적 역할을 표방하고자 차용된 책거리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두 번째 세션은 “Books and Things in Chaekgeori(책거리 속의 책과 기물들)”라는 주제로 고려대학교 방병선 교수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고연희 교수가 발표하였다. 방병선 교수는 조선후기 궁중 책거리에 나타나는 중국 도자에 대한 연구에서 조선후기 왕실과 상류계층의 문방 수집 열풍과 중국 골동품 애호 현상을 소개하고, 궁중 화원인 장한종과 이형록의 책거리에 재현된 다양한 기물들을 실제 중국 청대 도자기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과 변형을 분석하였다. 고연희 교수는 책거리의 주된 소재인 책에 다시 주목하여 중국의 유교경전 및 시와 소설들 뿐만 아니라 조선 학자들의 글과 책거리 소장가들의 기록이 적힌 부분들을 소개하며, 책거리가 독서를 권하는 교육용으로, 개인적인 취향과 욕망의 표현으로, 또한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음을 밝혔다.


책거리의 대중화에 대한 의견 발표도 이어져

세 번째 세션에서는 캔자스대학의 마샤 하우플러(Marsha Haufler) 교수와, 크리스 어썸스 큐레이터, 그리고 클리블랜드 미술관의 임수아(Sooa Im McCormick) 큐레이터가 조선후기 채색 병풍의 실질적인 예들을 소개하였다. 하우플러 교수는 조선후기에 북방의 중요한 도시인 평양을 소재로 그린 병풍들을 양식적으로는 궁중화풍, 문인화풍, 민화풍으로 분류하고, 도상적으로는 평양의 실경을 그린 지형학적 그림, 평양을 이상화한 그림, 특정한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평양 그림으로 나누어, 평양 병풍이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어썸스 큐레이터는 스펜서미술관의 수장고를 정리하던 중에 발견하여 지난해 서울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에서 복원을 하고 국립고궁박물관에서도 전시를 한 바 있는 곽분양행락도의 소장경유와 복원과정을 밝히고, 곽분양에 대한 중국미술의 다양한 표현에서 파생된 또 다른 양식을 보여주는 스펜서의 곽분양행락도가 전형적인 19세기 초의 궁중병풍 표구양식을 보존하는 작품임을 설명했다. 임수아 큐레이터는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소장의 궁중 책가도 속의 여러 가지 문방 기물들과 꽃꽂이 등에 나타난 상징성과 의미를 해석하며, 명말 사대부들의 취향을 흠모했던 청황실의 문화가 조선 책거리에도 반영되었음을 시사하였다. 더욱이 클리블랜드 책거리에 그려진 인장은 궁중화가 이형록(이응록)의 또 다른 이름인 이택균으로 판독되어 그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마지막 세션은 “Chaekgeori for the People(민중을 위한 책거리)”이라는 제목으로 궁중 책거리에서 민화 책거리로 이행되는 조선말기 책거리의 대중화에 대해 김성림 교수, 대영박물관의 엘레노아 현(Eleanor Hyun) 큐레이터, 경주대학교 정병모 교수가 발표하였다. 다트머스대학 김성림 교수는 책거리 화가의 입장에서 민화 책거리 구도의 반복되는 패턴을 분류하고, 초본에 기록된 안료의 이름과 실제 채색을 비교하여 책거리의 제작과정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사항들을 펼쳐보였다. 엘레노아 현 큐레이터는 민화 책거리라는 장르의 분류를 20세기 초 일제시대에 일어난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과 연결하여 설명하며, 화원들이 그린 궁중책거리와 작가를 알 수 없는 민화책거리의 구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책거리의 작가, 양식, 기능과 소비에 대해 이분법적인 분류를 초월한 통합적인 이해와 분석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정병모 교수는 민화 책거리에서 드러나는 기발한 양식의 파격과 다양한 도상들의 상징성을 소개하면서, 현실과 상상의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민화 책거리의 환상적인 매력과 생동감 넘치는 해학을 보여주었다.


오늘 8월,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마지막 미국 순회전


미국 순회 전시의 마지막은 8월에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찰스왕센터와 스펜서미술관에서 전택균의 책거리 병풍이 함께 공개된다.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다”
20세기 초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파이프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문장은 18세기에 정조가 신하들에게 책거리 그림을 보여주며 한 말이다. 조선후기 책거리 병풍은 청황실을 통해 수용한 서양화 양식의 눈속임 기법을 적용하여 책과 기물들을 사실적이고 입체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실제의 책과 기물들의 장식효과를 대신하였다. 게다가 창덕궁 내에 왕실 도서관 규장각을 세워 바른 정치를 위한 학문과 연구를 장려하고 인재를 양성했던 정조의 책사랑은 책거리 병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책거리는 왕실 밖으로 흘러나가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삶과 바람과 해학이 질퍽하게 녹아든 책거리로 재탄생하여 독특한 회화 장르를 형성하였다. 이렇듯 동서양을 잇는 역동적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조선 땅에 꽃을 피운 책거리가 이제 다시 세계 곳곳의 무대 위에서 그 가치를 발하며 세계미술사 속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중요한 미술 양식으로 부각되고 있다.

글 이정실(Jungsil Jenny Lee, 캔자스대학 한국미술사 교수)
이미지 제공 스토니브룩 대학 찰스왕센터, 캔자스대학교 스펜서미술관, 다할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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