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전통 돈차 재배지, 청태전의 고장 장흥을 가다

호남지역 최초의 차 재배지인 다도면茶道面을 포함해 고려시대 19개 소의 다소茶所 중 13개 소를 가지고 있었던 장흥, 이곳에 들러 불교와 함께 융성했던 차문화의 역사를 짚어봤다.


그토록 곱던 단풍도 추풍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계절에 찾아 간 곳은 전남 장흥이다. 장흥은 주변의 강진과 나주, 화순 등과 같이 해방 직후 우리나라 청태전靑苔錢의 생산과 판매의 중심지였다.
청태전은 우리나라 차 종류 중에서 돈차에 해당한다. 돈차가 청태전으로 불린 것은 1925년 일본의 나까오(中尾萬三, 1882~1936)가 장흥(관산면 죽천리)에 와서 돈차는 육우陸羽 다경茶經의 당나라 단차團茶와 같은 차라고 한 이후, 다시 이나바(稻葉岩吉,1876~1940)가 1937년에 장흥 유치면 보림사 쪽에 와서 이 차를 ‘청태전’이라 부른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
청태전은 장흥 일대의 보림사, 불회사 등 남도의 여러 자생 차나무 군락지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제조된 것인데, 이 차나무들은 비자림과 함께 숲을 이루고 있어 앞으로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큰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시대 때부터 떡차가 생산된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조선후기의 문인이었던 신위(申緯,1769~1847)가 초의스님에게 차를 선물 받은 후에 화답 편지글에서 청태전을 언급한 바가 있다.

“떡차 네 개를 보냈는데, 곧 손수 만든 보림백모차이다.”

여기서 보림백모차는 솜털이 난 어린 잎으로 만든 차로서, 이것이 청태전이다. 청태전의 형태는 지름 3.5cm, 두께 1cm의 크기로 찻잎을 채엽하여 구증구포하여 절구에 찧어서 틀에 박아 찍어낸다. 동그랗게 압축시켜 만든 후 중앙에 구멍을 뚫어 꾸러미처럼 꿸 수 있게 만든 차로서, 엽전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돈차’, 혹은 ‘전차錢茶’라고 하고 발효과정에서 파란색 이끼가 낀 것처럼 변한다고 하여 ‘청태전靑苔錢’ 이라고도 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소갈증이 나는 병에 오령산으로 치료를 한다고 되어 있다. 그 처방약은 곧 납다, 우전다, 다엽, 비파 등 찻잎을 사용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청태전을 왕에게 진상품으로 사용하는 곡우 전후의 작설차로 제조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민간에서는 상비약으로 다른 약재인 오미자, 생강과 함께 탕으로 끓여 마시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태전이 남도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장흥, 강진을 중심으로 민간에서 이용되었고, 당시 보림사 마당에서 많은 양의 돈차를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사실을 현지 조사에서 알게 되었다.

장흥 보림사의 청태전

보림사는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 말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파의 사찰이다. 선종을 배운 승려 체징이 통일신라 말 헌안왕(신라47대왕 857~861)의 권유로 860년에 창건하였다. 보림사는 중국 선종을 이끌었던 혜능이 있었던 곳으로, 혜능이 보림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주불전인 대적광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254호)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보림사를 창건한 보조선사 체징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중국의 백장회해선사에서 서당지장선사, 도의선사, 염거화상을 이은 보조체징선사가 보림사를 창건함에 앞서 헌안왕께서 경주에 처음 모시고자 할 때 약과 차를 선물로 보내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859년 당시 차가 많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음차문화라기 보다 약으로 음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지 답사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듣기로는 보림사 주변에 있던 마을은 여러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군사물자로 많은 양의 청태전을 만들었다는 기억을 하고 있는 문병길씨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시절에 할머니가 청태전 제다법을 익히도록 권유했기 때문에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하여 당시 제다법의 전통성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했다. 보림사에 차나무가 자생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지만, 1916년 나주 불회사 경내에 차밭을 조성하고, 1919년 장흥 보림사 주변에도 차밭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보림사 주변 비자림 숲에 2,000여 평의 차나무가 있으므로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그리고 보림사에서 이용한 차는 당시에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이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제다방법을 보림사 스님들에게 알렸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덖음차가 아닌 떡차, 즉 청태전으로 알려진 차였음이 분명해 진다.
다산이 차에 대해 설명한 것 중에 “무릇 차는 두 종류가 있는데, 편차와 산차가 그것이다. 편차는 쪄서 만든다.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편차는 떡차를 말하는 것이고, 산차는 가루차를 말하는 것이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 〈호남사종 湖南四種〉(정민<조선의 차문화>)에도 다산의 구증구포九蒸九曝 제다법을 볼 수 있다.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우전’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일세
…
초의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시대 19개 소의 다소茶所 중 13개 소가 장흥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장흥에서의 청태전 생산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비자나무 향기 가득한 불회사

만추의 가을단풍이 바람을 못이겨 비자림에 하나 둘 내려앉는 시간에 들른 덕룡산 중턱의 불회사는 초의스님이 출가한 운흥사와 운주사의 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침류왕 때인 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갑사를 창건하고, 이어서 다도면 덕룡산 동쪽 기슭에 불호사를 세운 것이 시초라 한다. 이 절은 백제의 불교 전파 경로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찰이다. 정조22년(1789)에 화재로 불탄 이후, 1800년대에 다시 지으면서 불호사를 불회사로 고쳤다.
불회사는 비자나무숲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와 조선시대 다성으로 불리는 초의스님이 출가한 운흥사를 가까이 두고 있는데, 불회사 인근 다도면茶道面은 백제 때의 임금께 진상한 차를 재배하였던 데서 유래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최초의 차 재배지로 알려져 있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비치는 대웅전의 아름다운 자태와 덕룡산의 홍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은 나그네의 시름을 잊게 하였다.

조선의 차로 알려진 떡차

장흥의 청태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모로오까 다모쓰諸岡 存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저술한 《조선의 차와 선》(1939)에서 청태전을 소개한데서 비롯됐다. 이 책은 일제시대 우리 차문화를 현지답사하고 저술한 것으로, 이 책이 나온 이후 ‘청태전’이 다시 수면위로 떠 올랐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에서 1939년 2월에 한 봉지에 들어있는 60g의 녹차를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라는 상표로 순천, 광주 등 이 일대 장터에서 팔았다고 한다. 당시 상인이었던 이한영씨는 한 꾸러미에 지름 4.2센티, 두께 9센티의 크기로 100개를 꿴 돈차를 팔았다고 했다. 모로오까 다모쓰諸岡存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가 남도의 촌락 답사를 통해 조선의 전통 토산차인 청태전을 찾아 기록한 것은 우리나라 현대 차문화의 실태 파악과 함께, 향후 차문화 산업의 발전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하겠다. 땅거미가 질 무렵, 마지막 답사지인 운주사로 바삐 이동했다. 운주사는 20여 년 전의 모습과 달리 많이 변모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종류의 석불, 석탑은 여전히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채 신비스러운 형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에 석불, 석탑이 각 1천 구씩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 불상들의 양식적 특징을 보면,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 모양, 어색한 표정 등이 운주사 불상만의 독특한 형식으로,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운주사 주변은 불교와 함께 유목민족의 영향으로 돈차를 즐기는 차문화가 융성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한 편으로는 우리나라 차문화가 중국, 일본에 비해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몽골군의 약탈과 전쟁 중에도 조세를 바쳐야 했던 어려움으로 인하여 차밭을 불태우고 차농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견해가 맞는지 단언하기 어려우니, 운주사는 풀리지 않는 비밀을 많이 가지고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신비한 절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글 , 사진 박금희 (경북과학대학교 문화재관리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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