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순의 도를 구현한 명재상 이윤伊尹

도 3. , 종이에 담채, 56.5×35.9cm, 선문대학교박물관
이윤伊尹

민화 고사인물화 중에는 군왕의 초빙을 받아 그로 하여금 천하를 얻게 한 개국공신 혹은 국가의 중흥을 일으키게 한 명재상의 이야기가 종종 다루어지고 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중국 상고시대의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강태공의 고사가 대표적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유명했던 인물로는 상나라가 세워질 때의 개국공신인 이윤伊尹의 고사가 있다. 그는 들에서 밭을 갈다가 군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예로부터 어진 재상의 본보기로 손꼽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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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5. 이 그림은 순임금이 역산에서 밭을 갈던 고사를 그린 것으로 이윤의 고사를 다룬 그림과는 다르다. 그러나 맹자의 왕도정치를 표방한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들에서 밭 갈다가 재상으로 발탁된 이윤

이윤에 대한 이야기는 『맹자』의 「만장장구萬章章句」상편에 나온다. 맹자의 제자인 만장이 이윤에 관해서 묻자 맹자는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농사지으면서 요순의 도를 좋아하여 그 도를 실천하며 살았었다”고 하였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예로부터 이상적인 군주로 숭앙되어 왔고 요순시대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졌던 태평성대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이윤은 바로 이 요순의 도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옳은 의리 혹은 옳은 도리가 아니면 천하의 녹祿을 모두 준다고 해도 돌아보지 않았고 말 4,000필을 매어 놓아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옳은 의리요 옳은 도리가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거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초야에 묻혀 은거한 이윤의 소문이 후에 상나라를 세우게 되는 탕왕湯王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이에 탕왕은 사람을 시켜 폐백을 가지고 가서 이윤을 초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윤은 전혀 욕심이 없었다. “내가 어찌 왕의 폐백을 받겠는가. 밭에서 농사지으면서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하며 고사固辭하였다. 탕왕이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니 이윤은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고
“내가 초야에 묻혀 홀로 요순의 도를 즐기기보다는 이 군주로 하여금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되도록 만들어 온 백성으로 하여금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이윤은 탕왕을 도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이었던 걸傑을 치고 상나라를 세우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아 만인을 위한 왕도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왕도정치란 바로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무력이나 강압이 아닌 덕으로써 어진 정치를 베푸는 것을 일컫는다.
천하를 책임지고자 한 성인
이윤의 인물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말해주는 평은 맹자가 말한 “임성任聖”이라는 칭호이다. ‘임성’이란 천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성인이라는 말이다. 유신의 들에서 밭을 갈던 때에 이윤은 홀로 도를 실천하며 스스로 자족하여 사는 개인적 삶을 좇았지만, 이후 마음을 돌려 출사하여서는 천하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공적인 삶을 택하였다. 군주를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지 못하면 스스로 부끄러워 시장에서 종아리 맞는 것과 같다고 여겼고, 가장家長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자신의 죄라고 여겼다. 후에 탕왕이 죽고 나서 폭정을 일삼는 태갑이 왕이 되었을 때도 이를 깨우쳐 끝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인도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존경을 받았다. 위로는 탕과 태갑을 저버림이 없었고, 아래로는 천하에 배반됨이 없이 자신의 무거운 소임을 다하였다고 하여 ‘임성’이라 칭해진 것이다.

왕도정치를 베풀라는 가르침

이윤의 고사를 그린 그림은 대개 이윤이 밭을 갈고 있고 탕왕이 보낸 사신들이 그를 찾아온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민화 고사인물화에 즐겨 다루어진 주제이지만 원래는 일반 회화에서 다루어지던 것이다. 이윤의 고사를 그린 현존작 중 가장 앞선 것으로는 18세기 초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 양기성이 그린 <이윤경신도>가 있다.(도 1) 이윤경신伊尹畊莘이란 이윤이 신 땅에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만고기관첩》이라고 하는 다양한 고사인물화가 포함된 서화첩 중에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 제작하여 감상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서화첩이다. 그림 속에 이윤은 머리에 밀짚모자를 쓰고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맨발을 한 채 밭을 갈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관복을 갖춘 탕왕의 사신이 공수 자세로 서 있고 그 옆에는 패물을 들고 있는 시동이 보인다. 근경의 우거진 나무와 원경의 첩첩이 이어진 산의 모습이 자연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의 고사인물화는 이렇듯 농사지으며 은둔의 삶을 살고 있는 이윤을 탕왕이 초빙하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은둔의 삶에서 만인을 위한 왕도정치의 길로 들어선 중요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화폭의 맞은편에 이 이야기의 텍스트를 필사한 서폭이 나란히 배치되어 짝을 이루고 있다. 이는 『맹자』의 「만장편」 중의 핵심 구절을 적은 것인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서예가인 윤순尹淳의 필적이다.
“내가 밭에서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이 이 군주로 하여금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되도록 하는 것만 하겠는가”라 쓰여 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 이윤의 고사가 주는 메시지는 어진 재상을 알아보고 기용할 줄 아는 혜안을 갖추라는 교훈일 것이다. 훌륭한 신하가 있어야 왕도정치를 베푸는 성군이 될 수 있고, 현자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현명한 군주가 되어야 하니, 인재를 얻으려면 내 몸을 먼저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은둔과 출사의 이상적 경지를 제시한 그림

강태공이 위수에서 낚시질을 하며 은둔의 삶을 살다가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세웠다면, 이윤은 유신의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의 부름을 받고 상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이윤과 태공망은 종종 나란히 언급되었다. 이들은 또한 은둔과 출사의 이상적 경지에 이른 인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논어에서 말한 “세상에서 물러나 숨어 살면서 자신의 뜻을 추구하고, 세상에 나아가 의를 행하여 자신의 도를 펼친다[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민화를 소비하던 일반의 사람들에게 이윤의 고사는 바로 이 은둔과 출사의 이상을 보여준 그림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쓰임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추구하고, 출사의 기회를 맞았다면 이를 세상에서 널리 실행하라는 가르침이다.
민화에서 그려진 이윤의 고사인물화를 보면 소를 몰고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전형을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이윤경신도>(도 2)에서 이윤은 소를 앞세워 쟁기질 하고 있고, 그 뒤에 그를 초빙하고자 폐백을 들고 찾아온 탕왕의 사신 둘이 있다. 원경의 산 아래에는 이윤의 집으로 보이는 소박한 초가가 배치되었다. 산수와 인물이 비교적 충실하게 묘사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신야궁경도莘野躬耕圖>(도 3)는 조금 더 단순화되었고 탕왕의 사신들도 생략되었다. 산과 나무의 표현이 좀 더 도안화되어 재치있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가회민화박물관의 <신야경전도>(도 4)에서 이윤은 밭을 갈다가 쟁기를 잠시 내려놓은 모습이다. 인물에 비해 산수의 비중이 커서 운치 있는 분위기의 산수화 한 폭처럼 보인다.
그런데 동일한 도상이지만 다른 고사를 담은 그림이 있으니 유의해 둘 필요가 있다. 가회민화박물관의 고사인물도 8폭병풍 중에 <역산질우도歷山叱牛圖>(도 5)라는 그림이 있다. 중앙에 소에 쟁기를 메고 밭을 가는 인물이 그려져서 얼핏 이윤의 고사를 그린 그림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 그림은 순舜임금이 천자가 되기 전 역산歷山에서 농사짓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면류관을 쓴 순임금과 그를 수행한 수많은 신하가 화면 상단에 그려진 점이 차이점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순임금의 이 고사도 『맹자』 만장편에 이윤의 고사와 함께 나온다. 순임금이 밭을 갈며 덕을 행했던 경지와 이윤이 밭을 갈면서 요순의 도를 행하고자 했던 경지는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그림이 모두 맹자의 정치사상을 핵심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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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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