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王羲之 –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거위를 사랑한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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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의 명필 왕희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해서와 행서, 초서 등의 서체를 완성하여 書聖이라 불린 서예가이다. 왕희지로 인하여 글씨는 단순한 기록의 수단이 아닌 예술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귀족 문화가 꽃피었던 동진시대에 우아하면서 세련된 그러면서도 힘이 내재된 아름다운 서체가 왕희지에 의해 창조되었던 것이다. 왕희지는 자신의 서체를 완성시키는데 있어 거위가 헤엄치는 유연한 몸놀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거위를 사랑한 왕희지는 좋은 거위를 얻으려 애썼는데, 한 도사에게서 거위
를 얻어오려고 도교의 경전을 친히 써준 고사가 유명하다. 이 고사를 그린 그림이 왕희지가 글씨를 써 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왕희지환아도王羲之換鵝圖’이다.

동진의 명문 귀족 왕희지

왕희지王羲之(307~365)는 낭야琅琊(오늘날의 산동성 임기현) 출신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며, 동진 원제元帝(司馬睿, 317~322년 재위)시기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등의 관직을 지냈다. 우군장군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불리었다. 그의 부친인 왕광王曠은 회남태수淮南太守를 지냈고, 숙부인 왕도王導는 동진이 부흥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었다. 또 다른 숙부인 왕돈王敦 역시 군권을 장악하고 큰 세력을 형성하여,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한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진시대에 낭야 왕씨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진서晉書』 권98). 이렇듯 귀족 명문가 집안에서 출생한 왕희지는 관직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지만 동진의 귀족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를 누렸으며, 특히 성품이 맑고 고아하며 기품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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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蘭亭에서의 아취雅趣 있는 모임

왕희지의 고아한 성품과 아취 있는 삶을 대표하는 것이 난정에서의 모임이 아닐까. 353년(영화永和 9) 3월 3일에 왕희지를 비롯한 동진의 명사들 41명은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참고1) 참석자들 중에는 동진의 유명한 시인 사안謝安도 있었다. 이 때 참석자들이 지었던 시를 모아 시집을 엮으면서 왕희지가 서문序文을 짓고 그 글씨를 손수 썼으니 이것이 <난정서蘭亭序>이다. 이 난정의 모임은 이후 천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며 청아하고 고상한 문인들의 모임의 전범이 되었고, 왕희지가 쓴 <난정서>는 서예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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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거위 사랑

왕희지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였다. 어느 날 회계의 한 노부인이 거위를 기르는데 그 우는 소리가 좋다고 하여 찾아갔다. 그런데 왕희지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노부인은 거위를 잡아서 삶아 놓고 그를 기다렸다. 왕희지는 크게 실망하여 탄식하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산음의 한 도사道士가 좋은 거위를 여러 마리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과연 좋았다. 꼭 사고 싶다고 하자 도사는 《도덕경》을 써주면 거위를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왕희지가 흔쾌히 써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조롱에 거위를 넣어 신이 나서 집에 왔다고 한다. 이 내용은 동진의 역사책인 《진서晉書》 열전列傳 ‘왕희지전’에 수록되어 있지만(『진서晉書』 권80), 아무래도 왕희지의 거위 사랑에 얽힌 고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 이백李白의 <왕우군王右軍>이라는 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右軍本淸眞 왕희지는 타고난 본성이 청진하여
瀟灑出風塵 맑고 깨끗한 성정이 속세를 벗어났다네.
山陰遇羽客 산음에서 도사를 만나니
要此好鵝賓 거위를 좋아하는 손님 맞이하였네.
掃素寫道經 흰 비단에 도덕경을 쓰니
筆精妙入神 필법이 정묘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네.
書罷籠鵝去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
何曾別主人 어찌 일찍이 주인과 작별인사인들 했겠는가.

근대기 화가 이도영李道榮(1884~1933)이 그린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참고2)는 이백의 「왕우군」이라는 이 시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 화폭의 왼쪽 상단에 적힌 제시題詩가 이백의 시를 적은 것이다. 왕희지는 동자를 거느리고 연못가에 서서 헤엄치는 거위를 바라보고 있다. 조선 말기에 특히 왕희지의 고사를 그린 그림이 유행하였는데, 이백의 시를 근거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백이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한 시가 한 편이 더 있는데, 하지장賀知章을 송별한시, 「송하빈객귀월送賀賓客歸越」이다. 하지장은 태자빈객을 지낸 시인으로 이백의 시적 재능에 탄복하여 그를 ‘하늘에서 귀양 온 신선謫仙’이라고 일컬었던 장본인이다. 다음은 수도 장안에서 고향 월주越州로 떠나는 그를 송별하며 이백이 지은 시이다.

鏡湖淸水淸波 경호의 맑은 물결 일렁이는데
狂客歸舟逸興多 광객이 배타고 돌아가니 고상한 흥취 많구나.
山陰道士如相見 만일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應寫黃庭換白鵝 응당 황정경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

시詩와 술로 교유하는 막역한 사이였던 하지장을 남쪽 회계 지방으로 떠나보내며 이백은 왕희지의 고사를 떠올렸고, 그래서 ‘산음의 도사를 만난다면 …
황정경黃庭經을 써 주고 흰 거위와 바꾸리’라고 노래하였는데, 이는 하지장이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던 서예가이고, 도교에 심취해 도사道士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지장을 노래한 이 시로 인하여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왕희지가 거위를 얻으려고 도사에게 써 주었던 것이 『황정경』이라고 오인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경전을 써주고 거위와 바꾸다

<황정환아도黃庭換鵝圖>(참고3)는 김종회金宗繪라는 정조 연간에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 그린 왕희지의 고사 그림이다.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림이니 민화는 아니지만 『황정경』을 써주고 흰 거위와 바꾸었다는 이백의 송별시를 주제로 한
그림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 제목이 이를 말해준다. 연못가 나무 아래에서 왕희지는 책상에 앉아 붓을 들고 글씨를 쓰고 있다. 옆에는 오사모에 단령의 관복을 입은 인물이 부채를 들고 구경하고 있다. 연못에서는 거위가 헤엄치고 있다.
중앙에서 활동한 이름 난 화가들의 고사인물도는 민간 수요의 그림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왕희지의 고사를 그린 고사인물도가 민화에서도 눈에 띈다. <서파농아도書罷籠鵝圖>(도1)는 이백의 <왕우군> 시 중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화폭의 왼쪽 상단에 적힌 그림 제목은 ‘글씨 다 쓰고 거위를 조롱에 넣고 가니(書罷籠鵝去)’의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왕희지는 책상 앞에 앉았는데 책상 위에는 붓이며 벼루, 비단 두루마리 등이 벌려 있다. 왕희지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와 그 뒤에 우거진 대나무의 모습은 흡사 불상의 광배와도 같이 묘사되어 서성書聖 왕희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듯하다. 왕희지가 앉은 맞은편에는 그에게 글씨를 부탁한 도사가 앉아 있고, 그 아래쪽에 거위가 두 마리 보인다. 이 그림은 연한 담채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박한 풍취를 보인다. <왕희지환아도>(도2)는 바위 위에 앉아 비단 두루마리를 펴고 붓을 들어 경전을 베껴 쓰고 있는 왕희지와 그를 바라보는 한 도사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책을 들고 있는 동자와 차를 끓이는 동자가 보이고, 연못가에는 거위 두 마리가 시선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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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書聖 왕희지를 숭앙하다

문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 시詩와 서書는 문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교양이었다. 글씨를 다만 기록의 수단이 아닌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왕희지는 해서와 행서, 초서를 완성하며 서성書聖으로 숭앙되었고, 그의 서법은 문인들이 본받고자 한 궁극의 전범이었다. 왕희지의 거위 사랑은 그의 고아하고 진솔한 인품과 맞물려 문인들이 공유하고픈 멋과 풍류로 천수백년을 회자되었던 것이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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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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