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공귀족이 사냥하는 그림 호렵도(胡獵圖)

도1. <호렵도>12폭 병풍, 19세기, 지본채색, 각 폭 91×49㎝,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도1. <호렵도>12폭 병풍, 19세기, 지본채색, 각 폭 91×49㎝,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소장

그림의 전파 경로를 통해 당시의 전반적인 문화 교류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청나라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그림, 호렵도가 18세기 이후에 조선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의 군사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후 민화로 그려지면서 군사적인 이유가 희박해지고 19세기에 조선에 불기 시작한 벽사·길상적인 염원이 호렵도에 나타났다. 이것은 시대적인 문화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호렵도胡獵圖’라는 용어

호렵도는 그림의 내용상 청나라의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도 1). 호렵도라는 용어는 한문을 그대로 풀이하면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 사대하고 있으면서도 청나라 왕공귀족을 오랑캐라 했을까? 그 이유는 소중화사상 小中華思想에 집착하고 있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한족 중심의 사상체계에서 봤을 때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오랑캐이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의 풍조에는 청에 의한 두 차례 침략에 대한 반감과 청을 세운 만주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업신여기는 배청사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치욕을 되갚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지만, 현실은 사행을 통하여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호胡라는 용어는 차츰 호야, 호빵 등의 사용례에서 보듯이 만주족뿐만 아니라 중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6.25 이후 미국을 양키라고 하면서 양키와 미국을 동일하게 본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그려진 호렵도는 중국에서 온 사냥하는 그림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호렵도는 언제부터 그려졌는가?

호렵도가 언제부터 그려졌는지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있다. 18세기에 김홍도가 가장 먼저 그렸고, 19세기 말까지 유행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먼저 김홍도가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렸다는 기록은 조재삼趙在三(1808~1866)이 지은 『송남잡지松南雜誌』에 ‘김홍도가 처음으로 <호렵도>를 그려서 오도자吳道子의 만마도萬馬圖와 함께 명예를 날렸다’고 되어 있다. 김홍도가 처음으로 <호렵도>를 그렸다는 사실로 보아 18세기 후반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기록은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인데 여기에는 ‘김홍도가 평생의 득의작인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를 그렸는데 8폭 병풍이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김홍도가 그렸다는 <음산대렵도>는 두 기록의 내용상 호렵도와 동일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림의 내용이 거친 황야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연결식 병풍이었다고 한 점과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음산대렵도>를 다른 사람들이 본떠 그리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19세기에 김홍도 풍의 호렵도가 유행한 것과 두 기록의 내용을 연결하면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기록은 『내각일력』에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祿取材에 호렵도를 시제로 출제하였다는 기록이다. 무려 3차례나 나오는데, 『내각일력』이 왕실의 직속기관인 규장각의 일기라는 점과 자비대령화원이 임금 직속의 특별한 화원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호렵도는 당시 화원이라면 모두 잘 그려야만 했던 그림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이인문 등이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에 호렵도로 등위에 올랐던 기록은 이후의 내용과 연관한다면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내용이다.

부연사행을 통해 호렵도의 원형인 청대 수렵도의 수용

청나라의 이국적 풍취가 나타나는 그림인 호렵도. 왜 조선 후기인 18세기 이후에 주로 유행하였을까? 조선 후기 중국과 문화교류의 일반적인 형태를 참고하여 분석하면 연행燕行에서 청 황실의 사냥 모습을 중국 현지에서 보고 듣기도 하고, 당시에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사냥그림을 구입하거나 연행의 일원으로 참여한 화원들이 모사하여 귀국함으로써 조선 후기에 왕실과 민간에도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에 사신단을 파견하는 일은 병자호란 이후 163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후 1874년까지만 치더라도 모두 870행이 있었다. 이러한 사행에 있어 화원의 파견은 1645년 이후 대개 그림의 재능을 인정받아 도화서에 오래 근속하여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으로 임명된 화원 또는 1년 동안 녹취재 통계상 최우수 화원이 절행에 차출되었고, 별행의 경우는 정사가 추천한 화원 1명을 사행에 포함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부연사행의 화원은 나이가 어리고 총민한 화원을 뽑아 취재를 보게 하여 1년 통계상 최우수 화원을 병조兵曹 소속으로 1명을 차송하였다.
부연사행 참여 화원의 기록에서 중요한 사실은 김홍도와 이인문의 사행 관련 기록과 그 시기이다. 『승정원일기』정조 13년(1789) 8월 14일에 보면 김홍도가 화원의 자격이 아니라 정사의 군관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내각일력』의 기록에서 호렵도를 잘 그린 것으로 기록된 이인문의 경우는 1795년과 1796년의 사행에 수행화원의 자격으로 2번 참여한 사실이 『내각일력』정조 19년 12월 15일과 정조 20년 12월 15일조에 “赴燕畵員 李寅文”이라 되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김홍도와 이인문은 부연사행에 참여함으로써 연경燕京(북경)에서 청대 수렵도를 접하였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수행화원 또는 군관으로 사행하였던 화원들의 임무는 하명 받은 특별한 그림을 그려오는 것과 중국 현지의 중요한 그림들을 모사하거나 구입하여 오는 것이었다. 당시 화풍의 주류를 가장 잘 이해했던 도화서 화원이 중국 회화를 접촉하고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형상화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청대 화풍을 조선 후기에 8전파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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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왕실 수렵도 <목란도>

호렵도의 연원으로 추정되는 청나라 황실의 기록화인 <목란도>는 그 규모가 전체 길이 60m, 세로 49㎝로 다른 청대 궁정회화보다 방대하다(도 2). <목란도>는 강희제가 만든 황실 수렵장인 목란위장에서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에서 만주족의 상무적尙武的 정신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의 작품구성은 제1도 행영行營, 제2도 하영下營, 제3도 연연筵宴, 제4도 위렵合獵까지 4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1도부터 제4도까지 전체적인 줄거리는 북경에서 황실 사냥터인 목란위장으로 출발하여 이동하는 과정과 목란위장 인근의 숙영지에 도착하여 궁장을 설치하는 장면, 숙영지에서 행사를 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목란도의 핵심인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인 위렵을 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란도>에는 청나라가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을 시행하는 전 과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청나라 수렵도는 대개 <목란도>에 나오는 중요한 장면을 요약하여 그리거나 일부분을 그린 것이다. 수도박물관 소장의 청대 수렵도 중 <타렵도> 12폭 통경병(도 3), 고궁박물원 소장 <청고종 위렵도>(도 4)등이 그것이다. 이중 <타렵도> 12폭 통경병은 조선 후기 병풍형식으로 그린 호렵도와 작품구성이 거의 동일하다.

호렵도가 유행하게 된 이유

18세기에 호렵도가 전래된 이유 중 하나는 이국적 풍취가 나는 그림에 대한 문화적인 호기심이고, 또 하나는 청나라의 기마전술을 본받기 위한 감계용으로 채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은 18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가진 배청사상과 사신들이 연행을 통해 접촉한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따로 놀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오랑캐의 문물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문화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청나라의 서화 골동의 수집이 당시 지식인과 부유층 사이에 유행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만주족 풍속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렵도뿐만 아니라 청나라 병사의 모습을 그린 김윤겸의 <호병도>(도 5), 심사정의 <출렵도>, 김홍도의 <낙타>(도 6), 김후신 <출렵도>, 강희언의 <출렵도>등 변발에 청나라 복장을 한 외국인의 풍속에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렵도의 용도가 감계용이라는 근거로는 정조의 군사정책인 기마전술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정묘년, 병자년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영·정조대에는 국방 전술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임진왜란까지는 기마전술이 주된 군사전술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통해서 일본의 조총에 기마전술이 무력함을 느꼈고 명나라의 지원군이 구사하는 전술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라는 무예지에 기초한 보병전술로 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보병전술로 군사전술을 변경하였다. 그런데 청의 기마 부대에 의해 두 번의 호란을 당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나니 기마전술에 맞서기 위해 다시 기마전술을 조선의 주된 전술로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무예보도통지』라는 무예지를 만들었고 장용영 등 기마 부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마전술은 정조 당시의 모든 문무관리에 적용되어 기마전술에 숙달되어야만 문무관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렵도는 이와 같이 18세기 도입될 당시에는 이와 같은 심오한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에 전래된 호렵도가 20세기 초까지도 유행하였다는 근거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생존했던 예대기芮大畿(1845~1918)가 남긴 『균곡유고筠谷遺稿』 卷之一, 題 胡獵圖가 있다. 이 글에 보면 민간에서 장식 병풍으로 호렵도가 널리 유행하였고, 무인들은 이를 모임의 장소나 집안을 장식하는 병풍으로 선호하였다고 되어있다.

호렵도 용도의 변화

호렵도가 전해진 초기에는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다가 그 후 군사적인 용도로 군사훈련장의 벽화나 무인들의 모임 장소를 장식하는 용도 등으로 전이된 것으로 보인다. 민간에도 저변화되어 장식용과 길상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단계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호렵도의 주인공은 대개 왕자나 귀족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호렵도에서 주인공으로 왕공귀족이 아니라 장수를 뜻하는 ‘수자기帥字旗’가 게양되어 있거나, 군문을 뜻하는 원문轅門, 장수의 명령을 전달하는 데 쓰이는 군기인 ‘영기令旗’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수자기가 그려진 작품의 예로 건국대 소장 <호렵도> 10폭 병풍이 있고(도 7), 원문이라는 깃발이 게양된 막사에 주인공이 앉아 있는 작품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호렵도> 8폭 병풍에서 볼 수 있다(도 8).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이후의 호렵도 중에서 주인공이 왕공귀족에서 장수로 바뀐 경우로 볼 수 있다. 제주도 관덕정에 벽화로 된 호렵도가 남아있다. 제주도 관덕정은 제주도 관찰사가 군사훈련을 시키던 곳. 이는 호렵도가 군사시설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을 보여준다.
호렵도가 민간에서는 주로 벽사·길상의 기복적 용도나 장식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다. 호렵도胡獵圖에 등장하는 호인胡人들의 용맹스러움으로 인하여 잡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 액운과 잡귀를 쫓는 벽사적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벽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호렵도의 예로 합천 해인사 명부전 출입문 좌우 상인방에 그려진 벽화와 개인 소장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가사리와 해태를 들 수 있다(도 9). 명부전이라는 장소적인 상징을 고려한다면 벽사적인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민화에서 호렵도는 길상적인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민화 호렵도에 육아백상, 기린, 해태, 백호, 원숭이 등 서수가 소재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소재의 상징을 출세, 성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수들이 그려진 호렵도는 길상을 염원하는 그림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호렵도라는 그림의 전파 경로를 통해 당시 청과의 전반적인 문화 교류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청나라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그림이 18세기 이후에 조선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의 군사정책과 관련이 있고, 이후 군사적인 이유가 희박해지고 민화로 그려지면서 19세기에 조선에 불기 시작한 벽사·길상적인 염원이 호렵도에도 나타났다는 것은 시대적인 문화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글 : 이상국(가회민화박물관 부관장/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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