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단왕출행도>와 <호렵도> – ì²­ 두려워 않는 자신감, ‘호렵도’ 명칭으로




청의 수렵도가 조선에 전해진 시기는 청이 문화적 융성을 맞이한 강희, 건륭제 시기로 추측된다. 유득공이 1790년의 시에서 동단왕엽기도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이때 엽기도가 조선에 유전되었음은 알 수 있으나, 호렵도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자료상 호렵도라 칭한 시기는 1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생각된다. 호렵도에 대한 명칭이 달라진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이 시기 조선의 대청 인식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 임상선(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동단왕은 누구인가

동단왕은 거란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동단국東丹國’의 왕을 말한다.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와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의하면, 거란 태조는 926년 1월 발해 왕 대인선의 항복을 받고, 발해를 ‘동단’이라 하고 장자인 야율배(야율돌욕)를 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후 태조가 죽어 다음 황위를 장자인 자신이 아닌 동생(야율덕광, 태종太宗)이 거란을 이어받게 되자, 야율배는 불만을 품게 되고 이후 931년 동단국을 탈출하여 중원의 후당後唐으로 망명했다.
후당의 명종은 야율배에게 ‘동단’이라는 성과 ‘모화慕華’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얼마 뒤 다시 ‘이李’씨 성을 주고 ‘찬화贊華’로 개명케 했지만, 동단왕인 이찬화는 정변에 휩쓸려 936년 살해되었다. 동단왕의 성품은 독서를 좋아하고 그림, 음률, 의약 등에 정통했다. 오늘날 중국 요녕성 의무려산醫巫閭山에는 동단왕이 수만 권의 책을 읽으며 살았다고 하는 곳이 있고, 최근에는 그의 능도 발견되었다.


동단왕의 그림에 대한 평가

동단왕은 후당에서 생활하며 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생존 당시에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북송 11세기 중엽 유도순劉道醇의 회화사론적 저술인 《송조명화평宋朝名畵評》에서는 “고금에 번마로 삼을 만한 것은 수로 셀 정도인데, 호괴胡瓌는 그 육肉을 얻었고, 동단은 그 골骨을 얻었다 -《송조명화평》권2, 축수문 제3”며, 동단왕이 번마도 번마도番馬圖 중에서 ‘골骨’, 즉 말의 근력을 잘 표현했다고 했다.
유도순이 1059년 완성한 《오대명화보유五代名畫補遺》는 인물人物, 산수山水, 주수走兽, 화죽영모花竹翎毛, 옥목屋木, 소작塑作, 조목雕木의 7문门으로 나누고, 각 문은 다시 24명의 화가를 신神, 묘妙, 능能의 3품으로 나누어 평했다. 이 가운데 <주수문>의 신품 2인 중 한명이 동단왕이다.

“동단왕 찬화는 거란의 대성이고, 바로 야률덕광의 외척이며 말의 행동을 잘 그린 자이다. 양梁·당唐과 진晉 나라 초, 북변의 방술과 무역상들이 일찍이 솜씨가 정치한 찬화贊華의 그림을 얻어 경사京師에 오니, 사람들이 많이 금백金帛으로 저당을 잡았다. 내가 찬선대부 조공의 집에서 찬화의 그림을 봄애, 말의 골법이 굳세고 날래며 좋지도 않고 둔하지도 않고, 궁벽하고 거친 곳에서 걷고 달림의 모습이 적절하다. 그 단점은 채색이 보잘 것 없고, 인물이 작으니 이것이 그 허물이다.”
– 《오대명화보유》, 주수문 제2, 신품

유도순은 동단왕이 말의 행동을 잘 그렸는데 골법이 굳세고 날래며 둔하지도 않고 궁벽하고 거친 곳에서 걷고 달림의 모습이 적절하나, 채색이 보잘 것 없고 인물이 작은 것이 허물이라 평했다.
북송 선화(1119~1125) 연간인 1120년에 궁정에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을 기록한 《선화화보宣和畫譜》에는 위진魏晋에서 북송北宋까지의 화가 231인, 작품 6,396점을 20권에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번족番族 5인의 한명인 동단왕의 그림은 ‘중화中華의 의관衣冠이 아니고, 모두 그 풍토의 옛날 풍습’이라며 동단왕이 거란의 ‘귀인貴人, 추장酋長을 많이 묘사’했다고 밝혔다. 작자는 ‘동단왕의 말은 오히려 살이 쪘고, 필筆은 굳센 기운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당시 어부御府에 동단왕의 작품 15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쌍기도雙騎圖> 1점, <엽기도獵騎圖> 1점, <설기도雪騎圖> 1점, <번기도番騎圖> 6점, <인기도人騎圖> 2점, <천각록도千角鹿圖> 1점, <길수병구기도吉首並驅騎圖> 1점, <사기도射騎圖> 1점, <여진엽기도女真獵騎圖> 1점이라 했다. (《선화화보》권8, 번족)


동단왕의 그림들

① <동단왕출행도>
동단왕의 작품 중 현존하는 작품으로 <동단왕출행도东丹王出行图>(도1)가 유명하다. 《선화화보》에 <출행도>가 없지만 <엽기도>, <번기도>, <인기도>의 일종인 듯하다. <동단왕출행도>는 낙관은 없고, 그림 뒤에 ‘세상에 전하길 동단왕이다 [世传东丹王是也]’라는 글이 있어 동단왕 이찬화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말 탄 인물이 중심이다. (도1 부분도) 그림에는 6명의 사람과 7마리의 말이 있고, 6명이 각각 말을 타고 있다. 6명의 얼굴 모습, 의복, 장식이 서로 다르며 이것은 신분의 차이를 나타낸다. 사람들은 모두 귀걸이를 하고, 모자를 쓰고 있지만 형태는 다르다. 한족漢族과 달리 머리 뒤로 머리를 기르고 있다. 6명의 인물 중 앞에서 세 번째가 동단왕이며 그는 말 위에서 오른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왼손은 오른손목 위 소매 속에 있다. 얼굴은 앞을 향하고 있지만 약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인물이나 말의 묘사가 세밀하고, 채색이 매우 화려하다. 인물이나 말의 배치 구도도 좌우가 잘 균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말은 적당히 살이 쪘고 좌우를 둘러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언제든지 달릴 수 있는 모습이다. 말의 몸체와 목, 넓적다리 부분의 채색은 북송 시대에 시작되어 널리 사용된 선염渲染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말의 안장 뒤에 늘어진 장식 줄은 4개인데, 앞의 세 번째 사람, 즉 동단왕만이 5개이다. 동단왕이 탄 말의 코와 귀는 원래의 모습이 아닌 ‘코를 찢고, 귀를 짼 모습(이비열이梨鼻裂耳)’을 하고 있다. ‘이비’는 콧구멍을 넓혀서 말이 뛸 때 폐활량과 운동량이 늘어나도록 하고, ‘열이’도 말이 달릴 때 바람이 소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하는 행위이다. 이비열이는 송대 동유董逌의 《광천화발廣川畫跋》권4의 <서호괴번마도書胡瓌番馬圖>에 의하면 중원이 아닌 번족, 즉 거란족의 말인 ‘번마番馬’의 특징이었다.

② <동단왕천각록도>
동유董逌가 1095년부터 1124년 사이에 쓴 글을 모은 《광천화발廣川畵跋》은 북송 말의 화원 화풍과 남송 초로 이어지는 회화 흐름을 알 수 있는 화론서畵論書이다. 작품에 대한 고증과 감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회화 창작과 기법의 원리 등을 미학적 시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책에 《선화화보》에 동단왕의 그림으로 소개된 <천각록도>로 보이는 <동단왕천각록도東丹王千角鹿圖>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비각祕閣에 이찬화의 그림이 있는데, 녹각鹿角이 곧게 갈래지어 나온 것이 비탈에 덩굴이 서로 얽혀 자라고, 길이가 그 몸에 3배이고, 뿔에서 난 무리가 숲같다. 그러므로 화록畫錄은 천각록千角鹿이라 부르는데, 그 실상은 뿔이 위로 가로로 난 것이 많은 것이다. 숭녕崇寧 4년(1105), 비각秘閣에 그 그림을 거두어들이라 조서를 내렸는데, 사자使者가 그 형상을 의아해 해, 그 설명을 찾았다. 옛날 비슷한 것이 있어, 그 이름으로 묻는 바에 갖출 수 있었다. 생각건대 물음에 내가 말한 것이 미치지 않는가. … 도서道書에는 머리 다섯인 사슴이 있는데 그 뿔이 10개이니, 모두 옛날에는 이상한 사슴이다. 이 그림은 거의 상서로운 조짐에서 나온 것인가 삼가 적는다.”
– 동유, 《광천화발廣川畵跋》

<동단왕천각록도>는 사슴의 뿔이 덩굴처럼 많이 난 형태이고,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청나라 강희 연간(1661-1722)에 장정옥과 진정경이 편찬한 《어정패문운부御定佩文韻府》에도 동단왕 이찬화의 <천각록도>가 동단왕 생존 시대에도 기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③ <동단왕인견도>
청나라의 서화감상가인 변영예卞永誉(1645~1712)는 이찬화의 <동단왕인견도東丹王人犬圖>의 ‘인물이 정성情性을 얻은 것이 기묘하다. 동단의 이 그림은 그 형태가 극진할 뿐 아니라 사람과 개가 서로 익숙’하다고 평했다. 아울러 이 그림에 조맹부의 제문이 아래와 같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당나라 호괴胡瓌는 용필用筆이 청清하고 원圓하고, 그 아들 건虔은 필筆을 아버지를 이어받아 익혀서 굳세다. 단 청환清圜은 미세하게 아버지보다 못할 뿐이다. 오대의 찬화는 형사形似에 깊이가 있으니, 대개 토풍土風의 습관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앞의 선배들이 필은 장기壯氣가 부족하다고 논한 것이 믿을 만하다.”
– 《서화휘고書畵彚考》 권40, 화10, 후오대

또한 송대 사람들은 동단왕과 호괴胡瓌의 번마도가 좋으나 재실齋室에서 감상할 것은 아니라고 했다. 변영예卞永誉가 생존한 시기에 동단의 <인견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선화화보》에 언급된 동단왕의 작품으로 스톡홀롬 동아시아 미술관에 <여진엽기도女真獵騎圖>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 그림에 무사를 태우고 질주하는 말의 날쌘 모습, 얼굴과 앞가슴의 붉은 털이 달린 마구가 보이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고려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일부와 유사하다고 한다.
– 홍선표,〈말그림의 역사〉,《조선시대회화사론》

④ 조선에 전래된 동단왕의 그림
동단왕의 그림 중 <엽기도>는 조선에 적어도 18세기 후반에는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유득공이 1790년 열하熱河(오늘날 베이징 북쪽의 승덕承德의 옛 이름)를 다녀온 뒤 남긴 기록인 《열하기행시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복건장군福建將軍 (이름은 괴륜魁倫이고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이며, 완안完顔의 후예이다)

복건장군은 흰 살결에 또한 멋진 수염 있고
다섯 자의 활을 당기고 글 짓는 것도 배웠다네
중원의 학사들 서로 웃지마오
나는 동단엽기도를 사랑한다네 (장군은 시화에 능하다)
– 유득공,《영재집》권4, 열하기행시

유득공이 열하에 있을 때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인 복건장군으로부터 흰 부채에 시와 낙관을 받았는데, 이것을 본 연경燕京의 명사들이 좋지 않다고 했다. 이에 유득공은 복건장군의 글씨와 그림이 좋고 복건장군의 인물됨도 걸출하여 좋아할만하다며,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 유득공이 좋아한다고 한 <동단엽기도>는 바로 동단국의 왕이었던 야율배가 그린 그림인데, ‘말타고 사냥하는 그림’이다.
유득공이 사랑했다는 그림은 명칭으로 미루어 《선화화보》에서 동단왕의 그림으로 소개한 엽기도의 일종이거나 혹은 앞의 <동단왕출행도>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득공이 <동단엽기도>를 사랑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1790년 열하에 가기 이전에 이미, 이 그림을 조선에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호렵도胡獵圖>와 조선 전래

현재 국내에서는 조선의 호렵도의 기원, 호렵도의 등장 시기, 최초의 호렵도 작가 등에 대하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 가운데 호렵도의 기원은 고려 말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혹은 조선시대 청나라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호렵도>의 ‘호胡’라는 명칭이 조선시대에는 여진족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후자의 주장과 같이 청나라와 관련이 깊을 듯하다.

①김홍도의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
‘호렵도’라는 명칭은 순조 12년(1812)과 순조 15년(1815) 《내각일력內閣日曆》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의 녹취재祿取才 기사에 등장하고,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차비대령화원 이번 봄의 녹취재 재차(2차)시험은 인물과 호렵도로 하였고 성적은 삼중일에 이효빈, 삼중이에 김득신, 삼중삼에 이인문, 삼중사에 허용, 삼하일에 김건종이었다.
– 《내각일력》 순조12년(1812) 정월 26일

즉, 1812년 화원들의 시험 주제에 호렵도가 있고, 호렵도의 화문은 인물문에 속한다고 보았다. 또한 조선의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린 이는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誌》의 기록을 근거로 김홍도로 보고 있다.

《권유록倦游錄》에 이르기를 “풍단馮端이 일찍이 유여경의 <새상塞上> 시를 적었는데, ‘우는 화살 곧게 위로 일천 척을 솟구치니, 하늘 고요하고 바람 없어 그 소리 참 메말랐네, 푸른 눈의 오랑캐들 삼백 명 말 탄 병사, 모두 금빛 재갈을 쥐고 구름 향해 바라보네’ 라 하였다. 객에게 일러 가로되 ‘가히 병풍에 그려 넣을 만하다’” 하였다. 경솔하여 금나라와 원나라의 화가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홍도가 처음으로 이러한 그림을 그려서 오도자吳道子의 만마도萬馬圖와 명예를 드날렸다고 한다
[倦游錄曰 馮端嘗書柳如京塞上詩 鳴骹直上一千尺 天靜無風聲正乾 碧眼胡兒三百騎 盡提金勒向雲看 謂客曰 可圖屛障 率致金元之禍世 我國金弘道始爲圖 與吳道子萬馬圖 共馳譽云]”
– 조재삼, 《송남잡지》

그런데 호렵도 명칭과 최초의 작가에 대해서 약간의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조재삼이 1855년경 편찬한 《송남잡지》의 내용은 북송 시대 장사정張師正(1016-?)의 《권유잡록倦游雜錄》의 기록을 인용한 것인데, 위 기록은 몇 부분으로 나뉜다. 유여경의 시 <새상>을 바탕으로 남송 시대 사람들이 병풍을 만들었다는 내용, 그리고 김홍도가 앞의 <새상>에 바탕한 그림을 그렸다는 조재삼의 언급으로 나눌 수 있다. 남송 시대 사람들이 그린 병풍의 내용은 바로 유여경의 시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즉, 오랑캐 병사들 3백명이 금빛 재갈을 한 말을 타고 있고, 이들은 하늘 높이 구름을 향해 쏜 화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3백명의 말 탄 군사를 표현했다면 응당 병풍의 형태였을 것이고, 일부 군인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그림을 명나라 양신楊愼(1488-1559)은 《단연총록丹鉛總錄》에서 ‘번마’ 혹은 ‘번마호아蕃馬胡兒’라 하였다.
유여경의 본명은 유개(柳開, 947-1000)이고, <새상> 시가 묘사한 ‘벽안호아’ 대상은 아마도 거란족일 가능성이 높다. 유개가 탁주涿州, 하북河北, 대주代州, 흔주忻州 등과 관련된 일을 한 점과 당시 북송이 이 지역에서 접하던 상대가 거란이었기 때문이다. <새상> 시는 즉, 거란의 군사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한 시라 할 수 있다.
위 《송남잡지》의 내용에서 화자가 여러 명이기 때문에 각 화자의 말과 그 출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손님에게 일러 말하기를 가히 병풍으로 할만하다 [謂客曰 可圖屛障]’(송 강소우, 《신조황조류원》권제35, 풍태부. 1145년 편찬)까지가 풍단의 말을 인용한 《권유록》에 있는 내용이다. ‘금나라와 원나라의 화가 이르렀다 [率致金元之禍世]’는 구절은 명나라 양신楊愼(1488-1559)이 “송나라 사람이 화살 쏘는 오랑캐를 좋아했으나 결국은 금과 원에게 망하는 화가 있었다 [宋人愛圖鳴骹(射箭)胡兒 卒有金元之禍]”(《단연총록》권12, 사적류, 번마호아)고 한 말을 조재삼이 인용한 것이고, 이 말은 1614년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있다. ‘김홍도가 처음으로 이러한 그림을 그려서 오도자의 만마도와 명예를 드날렸다고 한다 [我國金弘道始爲圖 與吳道子萬馬圖 共馳譽云]’고 한 내용은 당시 그러한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조재삼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재삼이 조선에서는 김홍도가 처음으로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고 한 것은 그 자신이 19세기 중반 김홍도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그린 그림이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라고도 함)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음산대렵도>의 작자가 공민왕恭愍王이라면 대렵하는 주체는 아마도 당시가 원나라임을 고려할 때, 거란족이 아니라 몽골족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김홍도가 그린 그림은 <음산대렵도>와 계통이 다른 <호렵도>일 것으로 생각된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김홍도의 <음산대렵도>는 ‘거칠고 누른 황야에서 활시위를 올리며, 짐승을 쫓는 모습이 혁혁하여 마치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앞의 조재삼이 언급한 김홍도가 그린 그림의 주제는 3백 명의 오랑캐 병사들이 말을 타고 있고, 하늘 높이 구름을 향해 화살을 쏘니 날 짐승이다. 그러나 서유구가 지난날 소유했던 그림은 활시위를 올리며 짐승을 쫓는 모습이고, ‘음산대렵도’라고 제목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래서 조재삼이 《송남잡지》에서 김홍도가 그렸다고 한 그림은 음산대렵도가 아니고, 호렵도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호렵도는 《송남잡지》 편찬 이전인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이미 그 명칭이 통용되고 있었다.


《지정연기》에 호렵도라는 명칭 최초로 등장

1804년(순조4)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원재명元在明이 쓴 《지정연기芝汀燕記》에 ‘호렵도’라는 명칭이 처음 보인다. 원재명의 수행원의 한명이었던 이의성(李義聲, 1757-1833, 자는 계명季鳴)이 1805년 북경의 유리창에 있는 채봉이란 사람의 집에서 호렵도를 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학구의 이름은 채봉蔡封이고, 강서 각산覺山 사람이다. 여러 가지 각법으로 도장을 잘 팠고, 또 점치는 것을 좋아했다. … 좌우에 서화와 도자기, 골동품들이 많고, 벽에는 호렵도胡獵圖가 있었다. 이는 서양 사람이 만든 것인데, 수묵水墨의 농담이 얼핏 보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였으나, 자세히 보면 세밀하기가 가을 털에도 들어갈 듯했다. 사람이 다니는 것이 개미만 하고, 말이 다니는 것이 콩알만 한데, 털과 머리카락과 귀와 눈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니, 참으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그림의 값어치가 정은正銀 40냥이라 하였다. 그림을 빌려 와서 관사에 있는 일행들에게 두루 보여주자, 신기하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의성, 《지정연기芝汀燕記》, 1805년 정월 초2일

이의성은 당시 이름난 화가였기 때문에 채봉의 가게에서 그림을 보고 바로 그것이 호렵도임을 알았다. 이 그림은 사람과 말이 다니고 있고, 그 크기가 매우 작으나 털과 머리카락과 귀와 눈이 모두 살아 움직이는듯하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이 개미만 하고, 말이 콩알만 한 것으로 미루어 다수의 인마가 그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의 작자가 서양인이라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이 어디인지 의문이다. 서양인이 종래의 중국의 번마도, 엽기도 계통의 그림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그림 배경이 서양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혹은 이의성이 본 그림의 인물이 서양인 같은 요소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살펴본 송나라 유여경柳如京의 시 <새상>의 3백 명의 기병이 ‘푸른 눈의 오랑캐(벽안호아碧眼胡兒)’라 하듯이 이들이 푸른 눈을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의성이 번기도의 인물의 눈이 푸른색인 것을 서양인이라 여긴 것이 아닐까. 어쨌든 계명이 유리창에서 본 그림을 호렵도라 하였고, 원재명元在明도 《지정연기》에서 이를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이 사행 이전에 이미 호렵도라는 명칭이 조선에서 통용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건륭제 상무적 기풍을 고취하기 위해 등장한 수렵도

호렵도가 청 왕실의 상무적尙武的 의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은 이미 학계에서 언급한 바이다. 청의 강희, 건륭제가 입관 이후 청 본래의 만주족 가치와 민속, 역사를 확립하고자 당시 청조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상무적 기풍이라 생각하고, 이를 진작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만주족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 《만주원류고》이고, 상무적 기풍을 강조하기 위해 1년 한 번씩 일정 기간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이동, 이곳에서 생활하고 대규모 사냥 활동을 했다. 청대 수렵도의 대표작인 <목란도木蘭圖>는 바로 이러한 강희, 건륭제의 상무적 기풍을 고취하려는 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에서 목란도를 비롯한 수렵도에 호렵도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청의 목란도와 같은 수렵도가 조선에 전래된 것은 청이 중원을 차지하고 문화적 융성을 맞이한 강희, 건륭제 시기일 것이다. 앞의 유득공이 1790년의 시에서 ‘동단엽기도’라 한 것에서 이때 이미 엽기도는 조선에 유전되었으나, 호렵도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 자료상으로는 정조 말년 혹은 순조 초년인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서 청의 만주족이나 이전의 거란족, 여진족의 엽기도를 호렵도라 칭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 명칭의 변화가 나타난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시기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청은 건륭제(1736∼1796)의 전성 시기가 마감되는 시점이고, 조선에서는 문예부흥의 군주 정조의 치세 후반이었다. 만주족은 청을 건국한 후, 한족들이 자신들을 ‘오랑캐[夷]’라 멸시하는 행위를 금하고, 이전의 요·금·원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침은 건륭제가 1778년 《사고전서》를 편찬할 때 중요한 기준의 하나이기도 했다. 즉, 송인宋人의 요금원遼金元에 대한, 명인明人의 원元에 대한 책의 내용에 ‘적국敵國’이란 말이나 온당하지 않은 어구는 《사고전서》 편찬시 수정하도록 했다. 이러한 청의 분위기는 조선에서도 전해졌을 것이고, 또한 참작하였을 것이다.


정조 시대에 호렵도 명칭 본격 사용

《사고전서》가 발간되고, 곧이어 건륭 시대도 마감하고, 특히 정조 시대 후반경 문예와 국력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호렵도라는 명칭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호렵도는 그 후 조선의 공식적인 기록에도 등장한다. 이미 학계에 소개된 바와 같이, 순조 12년(1812)과 순조 15년(1815) 《내각일력內閣日曆》에 호렵도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이밖에 이유준李有駿이 동지정사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연행을 다녀오며 쓴 연행일기인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에도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인 1848년 11월 17일 의주부義州府 백일원에서 본 풍경이 한 폭의 호렵도라 했다.

“말 탄 군사 40명은 모두 화려한 안장과 비단 언치를 얹어서 군장軍裝이 선명했다. 주위를 두어 바퀴 달리기를 마치자, 여러 기생 중에 말을 잘 타는 자 10여 명이 또 고삐를 날리며 튀어나와 창을 휘두르고 칼을 놀렸다. 그 경쾌하고 매서운 모습은 완연한 한 폭의 호렵도胡獵圖였다.”
– 《몽유연행록》

이를 통하여 19세기 중반에는 호렵도라는 그림 형식이 약간 변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즉, 이전의 호렵도가 사냥하는 말 탄 사람이 주 대상이었다면, 이때에는 말을 탄 사람에 기생도 등장하는 등, 원래의 수렵의 의미와는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 호렵도가 민간에 확산되며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고 있는 현상을 시사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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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선 |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원

동아시아고대사 및 역사교육을 전공했으며 역사와교육학회 회장이다.
주요 논저로는 《발해사 바로읽기-발해사 쟁점과 연구》, 《동아시아의 역사분쟁-한중일 역사교과서의 비교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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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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