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급난도>와 병서시 – 당대 명인들이 찬양한 형제간 각별한 우애

경상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에는 임진왜란 당시 월간, 창석 형제의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인 <형제급난도>와 관련 시문인 병서시가 수록됐다. 당시 선비들은 《시경소아》 〈상체〉편에 나오는 어귀인 할미새와 산앵두나무꽃을 차용해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했는데, 이는 병서시 뿐 아니라 민화 문자도 <제>자나 정자亭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형제급난도>를 중심으로 유교적 덕목 중 하나인 우애를 표현한 작품 및 정자 등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그림 속 감동적인 실화

<형제급난도>(도1)는 임진왜란 당시 월간 이전李㙉과 창석 이준李埈 형제의 충성과 우애를 소재로 중국 명나라의 화공이 그린 그림이다. <형제급난도>는 ‘형제급난도병서시兄弟急難圖幷序詩’ 첩장에 포함된 그림이다.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는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고 체재는 세로 29㎝, 가로 21.5㎝의 저지한장본楮紙韓裝本으로 1책 56판 112면의 첩장帖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첩장의 표지제목이 ‘형제급난도병서시’이고 표지 다음에 간지가 있고 제2정부터 제3정까지 주색단선朱色單線으로 곽廓을 그어 놓고 제2정 전면前面에 전자대자篆字大字로 <형제급난지도>라는 여섯 자로 표현하고 2정 이면과 3정 전면에 <형제급난도>가 있다. 제4정부터 56정까지는 <형제급난도>에 대한 병서시幷序詩가 수록되어 있다. 병서시는 <형제급난도>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월간과 창석 두 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던 중,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형제가 머물던 향병소鄕兵所에 왜군이 들이닥쳐 어쩔 수 없이 피신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때 창석은 곽란(급성위장병)으로 몸이 불편하여 거동이 곤란할 정도였다. 그는 형에게 “나는 병으로 죽을 몸이니 형이나마 피신하여 가문을 보존해 달라”고 하면서 월간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해 그 생명을 건지게 된다. 동생 창석이 160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이야기를 명나라에 전하자, 중국인이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작품의 필력은 매우 고졸한 편이나 장면의 묘사가 사실적이고 내용을 충실히 설명하기 위해서 월간으로 추정되는 인물 위에 백씨伯氏라고 기재해 놓았다. 이는 형이 동생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설득하는 장면, 동생을 업고 가다가 왜적을 물리치는 장면, 정상에 안전하게 피신하여 동생을 위로하는 장면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비록 두 면의 그림만으로도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이 보이고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느끼게 한다.

다수의 목판본

중국화공이 그린 필사본 <형제급난도>와 더불어 1652년 현손 증록增祿이 편집하고 목판본으로 간행한 <형제급난도>(도2)도 있다. 이 목판본은 규장각에 보관된 것도 있고 심지어 경매에도 나오는 등 다수가 전해지고 있다. 목판본 <형제급난도>의 내용도 중국의 화공이 그린 필사본을 그대로 판각한 것으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목판본을 통해서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은 화면의 하단에서 상단으로 옮겨가면서 그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림의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형제급난도>화면의 하단에는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의 막사와 창검기치가 표현되어 있어 왜군의 주둔지임을 알 수 있다. 왜군의 주둔지 위에는 월간과 창석 형제가 앉아서 의논하는 듯한 장면[兄弟論議]과 아우인 창석을 업고 왜적을 피해가는 장면[負弟急避](도3)이 있으며, 그 좌측은 동생을 업고 가다 왜군을 만나 대항하는 장면인데 월간이 업고 가던 동생을 내려놓고 왜적을 향해 활을 쏘며 격퇴하는 장면[當倭擊退](도4)이다. 마주한 두 명의 왜군은 창을 든 것으로 보이는데 하의下衣를 벗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왜군의 미개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 위로는 적을 물리치고 아우를 업고 산 정상을 향해 달리는 장면[負弟登高] 및 백화산 정상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하는 장면[山頂到達](도5) 등 모두 다섯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대 명인들이 작성한 병서시

1604년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은 경향의 유명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고 이를 소재로 하여 시문을 청했는데, 이 시문이 ‘병서시’이다. 형제애를 찬양한 이들은 이호민李好閔, 차천로車天輅, 손기양孫起陽, 이수광李睟光, 이안눌李安訥, 류근柳根, 정백창鄭百昌, 신흠申欽, 정경세鄭經世, 이민구李敏求, 조경趙絅, 이경석李景奭 등 27명의 당대 명인들이다. 이 병서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첩장의 4정부터 56정까지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붙여놓았다.
《형제급난도병서시》에 나오는 문인들의 글을 통해 ‘체화’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우복 정경세가 <형제급난도> 뒤에 쓴 발문을 보면 이들 형제가 얼마나 우애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전李㙉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확실하면서도 지키는 바가 있다하고, 잘 모르는 사람은 착하기는 하나 무능하다한다. 이것은 이전의 평상시 행실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내가 이전와 더불어 이웃하여 산 것이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였는바, 이전에 대해 잘 알기로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가 능히 난리에 임해서도 겁내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음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나는 참으로 이미 잘 알고 있다.

– 중 략 –

내가 이전을 보건대 그 우애友愛의 마음은 겉부터 속까지 털끝만큼도 거짓으로 꾸밈이 없으며,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어느 한순간이라도 끊어진 적이 없었다. 동생 이준李埈이 일찍이 폭허증暴虛症을 앓아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 여러 달 동안 낫지 않고 있었는데, 이전이 밤낮없이 함께 거처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은 채, 때맞추어 음식을 먹이고 약재를 조제하였으며 때맞추어 잠자고 일어나게 해 끝내 완전히 낫게 하는 데에 이르렀는바, 그 지극한 행실이 신명에게 미더움을 받은 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생生과 사死가 갈리는 위태롭고 절박한 즈음에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호응하는 듯하고 취하고자 하면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았던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한가. 이전의 행실 가운데에 미칠 수 없는 것은 특히 이런 점에 있다. 나는 이 그림을 보는 자가 혹 제대로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짐짓 드러내어 써서 이전에 대해 논하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평소에 순수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고 창졸간에 수립한 바는 바로 그 마음을 미루어 나간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본관은 연안.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는 오언배율五言排律의 시로써 월간 창석 형제의 우애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대 집안 형제간에 우애가 좋으니 [君家好兄弟]
대의는 연한 가지 소중히 여기었지 [大義重連枝]
전란이 일어날 땐 피란을 하였었고 [避地軍興際]
왜적이 핍박할 땐 신명을 보전했지 [全軀賊逼時]
막내아우 바야흐로 질병에 걸렸으니 [季方嬰疾病]
맏형이 어찌 차마 떠나려고 하겠나 [長肯忍分離]
칼날의 앞에서도 두렵지 않은지라 [冒刃何曾畏]
혼자서 활 쏘면서 버티어 냈었지 [彎弓獨自支]
성의에 감동이 되었다고 말할 뿐 [只言誠意感]
그림이 기특한 건 믿기지 않았네 [未信壯圖奇]
기러기 그림자는 서로가 연접했고 [鴻鴈影相接]
할미새는 울면서 다 같이 따라가네 [鶺鴒鳴共隨]
형제 위해 기도한 건 옛이야기 돼버렸고 [祈哀聞古者]
오늘날은 형제간에 욕한 것만 보았었지 [怒罵見今玆]
심간이 내킨 대로 분기할 뿐이지 [但倚心肝奮]
어떻게 수족이 손상되게 하겠는가 [寧敎手足虧]
시랑이 같은 적도 도리어 달아나니 [豺狼還却走]
틀림없이 귀신이 도와준 것이로세 [神鬼定扶持]
무력을 가지고도 당할 수 없는데 [武力誰當此]
서생이 이와 같이 하였단 말인가 [書生乃若斯]
한 사나이가 우주에 이름나니 [一夫名宇宙]
천고에 버금가는 남아였지 [千古次男兒]
칼자루 만지면서 세 번을 감탄하니 [撫劍增三歎]
볼수록 내 생각을 자아내고 남았지 [看來起我思]

우애를 상징하는 할미새와 산앵두나무꽃

시에는 형제애를 상징하는 시어들이 여러 곳에 있다. ‘연 한 가지’는 한뿌리에서 이어진 가지라는 뜻으로 형제자매를 비유하고, ‘기러기 그림자는 서로가 연접했고’라는 의미는 형제가 기러기처럼 질서 정연한 것을 비유한다. ‘할미새는 울면서 다 같이 따라가네’는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 것이다. 이는 《시경소아詩經小雅》 〈상체常棣〉편에 “할미새가 높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어려움의 구제에 나섰도다. [척령재원鶺鴒在原, 형제급난兄弟急難]”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 소疏에 “할미새는 마땅히 물가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높은 언덕에 있으니 안락한 장소를 잃은 것이다. 이는 사람이 안식처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것과 같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서로 구제해 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어에서 나오는 할미새는 척령鶺鴒으로 표현되는데, ‘鶺鴒在原’은 할미새가 노는 언덕(벌판에 있다고 해석하기도 함)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형제가 도와준다는 뜻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새이다. 실제로 할미새는 한 마리가 떠나거나 위급한 상황이 되면 시끄럽게 울며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댄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할미새의 위급행동을 보고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했다. <형제급난도>란 명칭도 《시경소아》 〈상체〉편의 위 구절에서 따온 것을 알 수 있다. 할미새와 같이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꽃으로 산앵두나무꽃[棣華]가 있다. 《시경소아》 〈상체〉편에 “상체의 꽃이여, 꽃받침이 환하게 빛나는구나.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 [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는 어귀를 자신들의 시구에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시경소아》 〈상체〉편에 나오는 어귀들을 차용해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했다. 여기서 ‘상체지화常棣之華’를 줄여 ‘체화棣華(산앵두나무꽃)’를 이름으로 하는 정자를 지어 형제가 거주하면서 공부하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집안이 번창하기를 혹은 번창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시경소아 상체 편을 시각화한 작품들

한편, 민화 문자도 <제>자에 할미새와 산앵두나무꽃이 등장하는 것은 《시경소아》 〈상체〉편의 내용을 확실하게 시각화하여 서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산앵두나무꽃이 형제간의 우애를 가리키는 이유는 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체화를 이름으로 하는 정자亭子와 문자도 <제悌>자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체화당
경북 상주시 청리면에 있는 체화당(도6)은 <형제급난도>의 주인공인 월간月澗 이전이 노년에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체화당은 월간 이전의 셋째 아들 이신규가 1632년(인조 10) 9월에 건립했는데 월간 선생은 집을 짓고 나서 손수 ‘체화’라는 편액을 걸고 늘 이곳에 거쳐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체화당을 지을 당시 월간선생은 75세, 창석은 73살이었다고 하니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다.

② 체화정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있는 체화정(도7)은 영조 37년(1761) 진사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그 후에 그의 조카인 용눌재慵訥齋 이한오李漢伍가 노모를 체화정에 모셔 효도하였고 이에 감동한 순조가 효자 정려旌閭를 내린 바 있다. 체화정은 이민적이 형 옥봉 이민정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로 유명한데, 이로 보아 정자 앞 연못의 이름을 ‘체화지棣華池’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체화정은 단원 김홍도의 흔적이 남아있다. 단원이 1766년 안기찰방安奇察訪을 마치고 한양으로 귀경하다가 체화정의 서재에 ‘담락재湛樂齋’라는 편액을 써 주었다. ‘담락’이란 《시경》에 실린 시에서 인용한 말로 형제간에 화합해야 진정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원이 찰방 시절 어울리면서 잘 알고 있던 이만적 형제의 체화정에 ‘담락’이라는 글을 남기고 떠난 것은 이들의 우애를 김홍도가 대구對句로 응답한 것이다.

③ 문자도 <제悌>자의 ‘형제급난’과 ‘할미새’
민화에는 특이하게도 문자도란 화목畵目이 별도로 있다. 문자도는 문자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의미인데 조선시대의 통용 문자인 한자를 잘 디자인해서 그림으로 만든 것이다. 문자를 그림으로 그린 목적은 윤리 교육의 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자도 중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가장 유행했던 문자도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의 여덟자로 유교국가의 윤리를 집약한 유교문자도이다. 여덟자 중에서 <제>(도8)는 소재가 척령(할미새)과 ‘형제급난’인데 이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의 소재인 《시경소아》 〈상체〉편에서 유래한 것은 동일하다. ‘효제충신예의염치’중 ‘효제’는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군자는 근본에 힘쓰고, 근본이 서면 길이 생겨난다. 효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한데서 유교의 가치 중에 으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효에 관해서는 여기서 별도 언급이 없더라도 조선시대를 지배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유교문자도가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면 《소학小學》과도 관련이 있다.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소학》 5권에는 양문공의 가훈家訓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문공가훈楊文公家訓, 왈동치지학曰童穉之學, 부지기송不止記誦. 양기양지양능養其良知良能, 당이선입지언위주當以先入之言爲主. 일기고사日記故事, 불구금고不拘今古, 필선이효제충신예의염치등사必先以孝第忠信禮義廉恥等事, 여황향선침如黃香扇枕, 육적회귤陸績懷橘, 숙오음덕叔敖陰德, 자로부미지류子路負米之類, 지여속설只如俗說, 변효차도리便曉此道理, 구구성숙久久成熟, 덕성약자연의德性若自然矣.

양문공의 가훈에서 말하기를 어린이의 배움은 기억하고 외우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타고난 지혜와 재능을 기르고 마땅히 먼저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날마다 옛 일을 기억하여 어제와 옛날에 구애받지 아니하되, 반드시 먼저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신하의 도리와 예절과 의리와 청렴함과 부끄러움 등의 일로써 해야 한다. 황향이 베갯머리에서 부채질을 한 것과 육적이 귤을 품은 것과 숙오가 남몰래 덕을 쌓은 것과 자로가 쌀을 지고 온 고사 같은 것을 풍속의 이야기처럼 들려주면 이 도리를 깨달을 것이니 오래오래 이루어지고 익으면 덕성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따라서 《논어》와 《소학》의 깨우침을 여덟글자의 문자로 나타내는 유교문자도가 만들어졌다. 그 문자도 중에서 <제>자의 유교적 가치가 형제간의 우애라는 덕목인데 이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고전을 인용하여 회화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문자도 <제>의 기본적인 도형은 ‘弟’와 ‘悌’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전자의 경우 글자의 상단에 두 마리의 할미새(척령)는 마주보는 도상이고, 후자의 경우는 글자 좌측 마음심⼼자 변에 두 마리의 할미새가 마주보고 있다. 문자도의 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림 소재를 통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경우는 대개 16자로 구성된 화제를 보고 그림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했다.(도9) 도9의 화제는 “春深喬木 鶺鴒和鳴 日暖風和 常棣花幷”(봄이 깊어 작은 나무에 할미새가 사이좋게 우네, 날은 따뜻하고 부드러운데 산앵두꽃 같이 피었네.) 이 시는 《시경소아》 《상체》편의 ‘척령’과 ‘상체’를 소재로 한 새로운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화제의 그림들이 많다는 것은 당시 형제간의 우애를 다룬 시들이 많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교적 가치 담은 회화와 문자도

<형제급난도>와 문자도의 <제>자 등은 <시경소아>의 <상체>편을 회화로 그려 시각화한 것이다. 이처럼 형제간의 우애를 그림으로 나타낸 배경으로 <형제급난도>의 경우에는 실제 있었던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후손이 목판으로 널리 배포했던 것이고, 문자도 <제>자의 경우 중국의 복록수와 같은 길상문자도에서 영향을 받아 유교적 통치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정조대에 국민교육서인 《오륜행실도》발간을 통한 오륜의 시각화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 이상국 ((사)한국민화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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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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