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조선 책거리>展을 기념하며

한국의 정물화, 책거리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 <조선 책거리>展이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에서 내년 4월 말까지 개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는 물론 미디어아트부터 팝아트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작가들이 책거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 3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민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 시점에 한국의 정물화 ‘책거리’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고자 한다.

글·사진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특임교수, 한국민화학교 교장)


정물화라고 하면 화가별로 유명한 오브제가 떠오른다.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꽃과 과일, 룰란트 샤베리(Roelant Savery)의 꽃병, 샤르댕(Jean Baptiste Siméon Chardin)의 부엌, 폴 세잔(Paul Cézanne)의 사과와 오렌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해바라기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정물화인 책거리의 오브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책과 물건일 테다. 책이 주인공이라면 물건은 엑스트라다

글로벌한 그림, 책거리의 탄생

조선시대는 학문과 책을 중요시하는 유교 국가였으며, 책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고 책을 발판으로 출세했으며 책으로 세상을 다스렸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는 책이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일차적인 기능에서 확장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예술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 계기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 청나라로부터 수입된 천주교 및 통속적인 책들이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할 조짐을 보이자, 이를 규제하기 위해 어좌 뒤에 책거리 병풍을 펼쳐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낭만적인’ 이벤트를 벌였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귀족들 사이에는 오히려 고전이 아니라 책과 더불어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도자기와 물건들을 과시하는 도구로서 책거리를 활용했다. 책거리 안에는 서양에서 건너온 자명종, 회중시계, 거울, 양금 등 물건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은 서양의 선원근법과 음영법으로 표현되었다. 고요한 동방의 나라 조선에서 글로벌한 그림이 이렇게 탄생했다.




책거리의 변모

초창기 책거리에 등장하는 물건은 주로 붓, 먹, 종이, 벼루 등 선비들이 사용하는 문방구였다. 이것은 실용적인 물건이라기보다는 학문을 펼치는 도구였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검소함을 중시하여 사치한 물건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고 하여 지나치게 물건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허리쯤인 1592년부터 1636년까지 연거푸 4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념적인 사회 풍조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향으로 바뀌었고, 실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200여 년간 책거리는 왕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국민이 즐긴 조선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자리를 잡았다. 정조가 가장 아낀 궁중화원인 김홍도가 책거리를 잘 그렸고 고관대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전하지만, 아쉽게도 실물로 확인되지 않았다. 19세기에는 궁중화원 이형록이 책거리로 이름을 떨쳤다. 이름을 이응록과 이택균으로 두 번이나 바꾼 그는 조화로운 구성과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책거리를 창작했다.
19세기 궁중의 책거리가 민간에 확산되면서 당시 사람들의 삶과 밀착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요지경으로 변신했다. 한국의 물건과 생활용품이 늘어나고 화조, 산수 등 다른 제제와 조합하면서 한국적이며 복합적인 그림으로 탈바꿈했다. 외형은 정물화이지만, 그 내면에는 에로티시즘, 여성의 서재, 길상적인 상징물 등 당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깃들어져 있다. 민화 책거리는 궁중화 책거리와 달리 스토리텔링이 뛰어나고 규범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책거리는 한국회화 가운데 구성미가 뛰어난 그림이다. 궁중회화 책거리와 민화 책거리의 구성 방식이 달랐다. 궁중회화 책거리에서는 책장에 책과 물건을 진열하는 그림이 주류를 이뤘고, 민화 책거리에서는 탁자나 서안 위에 책과 물건을 배치하거나 책과 물건을 컴팩트하게 조합하는 방식이 유행했다. 한국미술은 구성미에 대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세밀하게 분할된 자개 조각으로 거대한 구성을 표현했고, 조선시대 민가의 벽면은 그 짜임이 조화로우며, 평범한 여인들이 정성껏 바느질로 만든 조각보는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비롯한 드 스틸파(De Stijl)나 구성파(constructivism) 못지않은 놀라운 구조적 세계를 펼쳤다. 민화 책거리는 직선의 구조적 짜임에 다양한 패턴으로 장식되어서, 조선시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고리타분하지 않고 현대적인 감성이 돋보인다.

현대의 책거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책거리를 현대에 소환한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한국의 팝 아티스트들이었다. 1960년대 미국의 뉴욕을 중심으로 불기 시작한 팝아트의 물결은 한국 미술계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 처음에는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이텐슈타인(Roy Lichtenstein) 등 미국 팝아트의 자극을 받았지만 점차 한국적인 팝아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몇몇 팝아티스트들은 ‘한국적인 팝아트’의 방향성을 책거리, 산수화, 화조화 등 조선시대 민화의 현대적 해석에서 찾았다. 홍경택, 홍지연, 김지평, 김민수, 곽수연 등은 특히 책거리를 중점적으로 다룬 팝아티스트들이다. 홍경택의 작품은 홍콩옥션에서 선풍을 일으키면서 책거리라는 정물화의 국제적인 관심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에는 조선시대 민화가 다시 유행하는 복고적인 열풍이 일었다. 주부들이 취미생활로 200여년 전의 그림을 모사하는 작업이 그 불씨를 지폈다. 점차 민화의 시장이 커지면서 미술대학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은 아티스트들도 대거 민화에 참여하게 되었고,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현대 민화가들은 책거리 특유의 구성적 짜임에 현대의 책과 물건으로 바꾸는 방식을 즐겼다. 여기에 민화 특유의 밝은 채색, 화려한 패턴 등 감각주의적인 장식으로 덧입혔다.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 <조선 책거리>展

현재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 책거리>展에서는 책거리로 작업하는 팝아티스트, 민화가, 수묵화가, 디지털 아티스트 등 여러 부류의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전통 책거리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보여주고자 한다.
책거리 전시회는 200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미와 학문(Beauty and Learning)>이란 제목으로 처음 열렸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국회화사 전공자들 외에는 책거리라는 모티브가 낯설었던 시기였다. 이 전시회는 책거리 세계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좋은 기회였다. 필자는 2013년 경기도박물관 박본수 학예사에게 책거리 전시를 제안하여 이곳에서 책거리 특별전을 열었다. 2016년에는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과 함께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문자도, 책거리 전시회를 기획했고, 2016년 9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다트머스대학 김성림 교수와 함께 뉴욕의 찰스왕센터(Charles Wang Center), 캔자스대학의 스펜서미술관(Spencer Museum), 클리블랜드미술관(Cleveland Museum)에서 열린 책거리 미국순회전을 기획했다.
일련의 책거리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에 책거리 열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부터 한국에서 일기 시작한 민화의 관심은 까치호랑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 중심에는 민화연구가 조자용의 역할이 컸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민화 호랑이 그림을 응용한 호돌이(Hodori)를 마스코트로 삼은 것은 이러한 열기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30여년 동안 현대 민화의 황제 자리를 차지했던 호랑이 그림은 새롭게 떠오른 책거리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번 전시 <조선 책거리>展은 2019년 8월, 서울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 ‘책거리 Today’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대구 인당뮤지엄에서 열렸고, 2021년 3월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전시로 이어졌다. 이어 5월에는 프랑스 낭트에서 벌어진 ‘한국의 봄’ 축제의 메인 전시회로 초대를 받았고, 이를 시작으로 파리 프랑스한국문화원, 마드리드 스페인한국문화원 전시 등 유럽 순회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조선 책거리>展은 이 유럽 순회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재 그림이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이 책을 통해서 살아가는 독특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책거리는 단순한 정물화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상한 또 다른 풍속화다. 더욱이 책거리의 짜임새는 한국회화의 구성미가 얼마나 다채롭고 창의적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국에 책거리란 독특하고 아름다운 정물화가 있다는 사실을 정물화의 본산인 유럽에 널리 알리는 것이 이 전시회의 목적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다음과 같다. 고가민, 곽수연, 김남경, 김민수, 김생아, 김영식, 김영희, 김채원, 남정예, 류민정, 문선영, 박소은, 박수정, 박대성, 소소영, 손유영, 송민호, 신윤주, 엄진아, 이돈아, 이두원, 이수아, 이영실, 이지선, 이화영, 정재은, 정학진, 최서원, 홍경택, 홍경희. 전시는 내년 4월 말까지 이어진다.

정병모 | 한국민화학교 교장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8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로 29년가량 재직했다.
한국민화학회와 ㈔한국민화센터 창립에 공을 기여했으며,
한국민화학회 회장 및 ㈔한국민화센터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있으며 최근 《한국의 채색화》
시리즈를 펴냈다. 현재 한국민화학교(TSOM) 교장이다.

저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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