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경 작가의 문 연작 현대민화 – 생생하고 성스러운 세계의 자각

문이 열리면 성性은 무한한 에너지로 빛난다. 태초의 생명이 움트는 에너지,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에너지, 순수한 시절을 표현하는 에너지가 다채로운 색감으로 펼쳐지는 그림들. 오는 6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될 오순경 작가의 〈문의 연작〉이다. 이 가운데 그녀가 꼽은 4점의 작품과 함께 상상의 문을 열어본다. (편집자 주)


문, 그리고 얼굴 없는 여인들

나는 작품에서 여인의 나체를 많이 그려왔다. 그림 속에 비친 성적인 에너지가 가장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생명력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문을 소재로 다양한 현대민화 작품을 작업했다. 이러한 작품을 모은 〈문의 연작〉 전시를 준비하면서 봄을 맞이했다.
열리고 닫히는 움직임으로 연결과 단절을 표현할 수 있는 문. 나에게 문을 연다는 것은 여성성을 드러내는 행위인 동시에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대표작에는 열린 문 너머의 두 여인을 고귀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다.(도2)(도3) 그러나 몸을 살짝 비튼 채 앉아있는 그녀들의 표정은 알 수 없다. 얼굴 없는 여인들로 실존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이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기려고 했다. 발칙한 상상이 다가 아니다. 그림 앞에서 떠올리던 얼굴이 친근해진 순간, 성에 대한 자각과 에로스 감각이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작년 11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제7회 한국민화전업작가회 회원전을 통해 선보인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옻지에 먹으로만 바림한 문 안에 원색의 여인들은 굉장히 양가적이다. 그림 속 여인들은 전모氈帽(조선시대 때 여성들이 외출용으로 사용하였던 쓰개)나 아얌(조선시대 때 부녀자들이 쓰던 방한모)으로 머리를 꾸미고 있지만, 몸에는 아무것도 차려입지 않은 모습이다. 왼쪽 여인은 기녀인 반면, 오른쪽 여인은 바둑을 두는 양반집 규수를 표현했다. 벗은 여인들 뒤에는 사랑방을 장식하던 책거리를 분해했고, 아래에는 봉황의 무리를 그려 넣어 고결한 의지를 표출하고 싶었다. 특히 신경 쓴 것은 육색肉色이다. 분채를 되게 만들어 전통적인 색보다 얼룩덜룩하게 채색했다. 옻지를 거칠게 만드는 밑작업에도 공을 들였다. ‘버리는 종이가 많아야 뭐라도 나온다’는 것이 내 작업의 기본 원칙이었고, 종이와 안료에 대한 지속적인 실험이 예술적 양심의 기준이라고 여겼다.

문이 열려야 보이는 풍경

2015년부터 문을 소재로 작업을 시작했고, 가나문화재단의 후원을 계기로 작년 여름 석달 간 파리에 있는 시떼데자르 스튜디오에서 몇몇의 작품을 그렸다. 그곳에서 느낀 원색의 아름다움을 문과 여인, 상상 속 동물이 등장하는 그림에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문만 그린 작품들도 있다. 〈문의 연작〉에서 가장 먼저 작업된 작품(도1)을 보면, 문이 금문錦紋(단청문양 중 여러 색으로 꾸민 연속무늬)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림에서 표현된 금문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뜻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길상문이다. 그 안에 장구하고 광활한 에너지를 담고 싶었다. 그러나 무한한 시공간에 떠있는 문은 닫혀있다. 태초의 생명, 혹은 우주의 시작점일 수 있는 문은 양수나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띄며,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고 있다. 금선으로 처리된 문의 외곽은 저편의 빛이 틈새로 새어나오는 것이다. 문이 열려야 보이는 풍경은 보는 이의 상상에 따라 달라진다.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민화

작품에 상상 속 동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속상한 기린씨〉(도4)는 동심을 담은 세레나데의 작품이다. 기린麒麟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물로, 사슴과 소, 말을 합쳐놓은 모습이다. 평소 온화한 성격이지만 싸울 때는 용맹하다고 한다. 그런 기린이 마음과 마음을 꿰어, 달토끼에게 닿기 위해 다리를 놓고 풍선을 띄운다. 전체적으로 알록달록하게 표현된 색감과는 달리 고백에 실패한 기린의 속상함에 해학적인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심과 세레나데.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개념이지만, 달토끼를 사모하는 기린의 구애 현장을 평면적으로 그려내자 동화가 펼쳐졌다. 작품 안에는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을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던 내가 있었다. 동심의 세계를 그리며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웠다.
6월에 있을 전시에서 선보일 작품에는 3D 그래픽을 이용하거나 콩댐(콩즙을 한지에 발라 질기고 윤이 나게 만드는 전통방법)을 접목한 작품도 있다. 그림 속 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저마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늘 새롭다.


글, 그림 오순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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