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민화, 감성 트렌드로 무장하라

▲ 정영애 <행복>

오늘의 민화, 감성 트렌드로 무장하라

민화는 다른 어느 장르의 그림보다 설득력이 풍부하다는 게 큰 장점이다.
그러나 그 설득력을 효과적인 이 시대 언어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한두가지 기술적 이해와 방법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민화 창작의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최남숙

최남숙 <정>

시대별 트렌드 이해의 중요성

요즘 현대 민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과거에 사용되었던 도상을 그대로 인용해서 그려내고들 있지만, 그 도상이 생겨난 원 시대에서만큼의 설득력(감동)까지 가져오지는 못하는 게 문제다. 그저 그 도상을 통해 민화적 테크닉의 독특함을 다시 보는 정도의 공감대가 전부일 뿐이다. 과거를 향한 관념으로서의 표현 작품이 관람자로 하여금 그들의 현재 생활과 연관 지어 느끼는 감동(설득력)적 요인은 그만큼 작아질 수밖에 없다. 민화 화단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미술을 테크닉 또는 묘사력의 수준차 겨루기 정도로 여기는 미술적 오해에서 기인된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테크닉은 미술의 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 미술의 중심, 즉 미술의 생명성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전 세계의 현대미술가들은 테크닉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과거로부터 전해진 전통적 테크닉일 때는 그림을 관람할 때 그 테크닉이 성행하던 과거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 외에 다른 설득력으로 다가서기는 힘들다. 뿐만 아니라, 도상을 그대로 옮겨그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도상의 발생 시기적(조선 후기) 트렌드trend의 성향을 그대로 빌려다 쓰려는 방법도 미술적으로 그리 효과적이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매 시대의 트렌드 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시대별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이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 설득하려는 어법 사용은 오늘의 언어로서의 공감대 형성은 물론, 현재의 삶에 직접 연결시키는 감화, 감동력을 극대화시키기에 그만큼 유리하며, 또 사뭇 새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뻔하지 않은 것이 창작 민화의 필수 요소

민화를 창작하기 위한 트렌드 이해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부분도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일이다. 각종 문화사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다양하게 변화하며 탄생했던 트렌드들이 존재하지만, 원 모습 그대로 남아 흐르는 불변의 트렌드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성적 트렌드이다. 감성적 트렌드는 시대를 달리하더라도 변하는 법이 없다.
이러한 감성적 설득력이 인정받으려면 사람들의 서민적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삶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그 공감 방식으로 관람자를 배려해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매 시대마다 그것 때문에 공감적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기쁨과 사랑과 격려를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점이 미술에선 우리나라 서민 민화에 특별하게 많이 내재해 있어서 그야말로 특별한 힘이 된다. 그래서 순수미술가들조차 우리 민화를 자기네 그림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창작 민화가는 이 감동(설득력)의 원천을 내 것으로 붙잡아야 한다. 옛 도상들을 오늘날의 트렌드로 읽어내고 그 트렌드를 활용하여 창작을 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미술이론가들이 흔히 말하는 통시적(전통적) 공감대와 공시적 삶으로 육화된 공동체적 공감대가 화면에서 충돌하며 나타내는 긴장감이다.(이 부분을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기회가 되면 다시 설명하겠다.)
아무튼, 이 ‘설득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되 뻔하지 않게. 그렇다, 뻔하지 않게 만들어내는 게 창작민화의 관건이라 할 것이다. 수차 반복하는 말이지만, 뻔한 것은 새로울 수가 없다, 새롭지 않은 건 ‘새로워야 한다’는 창작 예술 제1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 ‘힘’으로써 역사를 통한 흐름과 동시에 동시대적인 넓이를 포괄적으로 조망하려는 자세를 취할 때, 그 의도가 감각적으로 잘 읽히기만 한다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움직여 그 작품 앞에 멈춰 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지금 저토록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리나라의 케이 팝K-Pop을 능가할 실용예술로서의 위상을 창출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케이 팝K-Pop이라고 하는 대중가요를 깊이 관찰하면 위에서 말한 힘·감동력·설득력을 얄미울 정도로 절묘하게 이용해서 청취자의 마음에 파고드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청각뿐만 아니라 현란한 현대적 장식을 갖춘 무대 배경과 그 앞에서의 현대적, 집합적 율동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감상자를 감동시킨다. 때로는 트렌드 이용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 놀라게 된다.
현대 사회에 맞춰 미술도 이런 부류로서 한 방향을 틀고 나아가며 기능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아직은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
엘리트적 지성을 앞세웠던 지금까지의 모더니즘 미술 이론으로서는 논리적으로 도무지 가능하지 못한 부분이었으나 이젠 환경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 틈새를 노려 키치 아트 이론을 앞세운 한 부류가 진군하는 걸 보라. 그러나 민화는 ‘역사적 느낌’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원초적 인간애 표현’이라는 천진난만함의 회화적 기술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식적 특성상 그들과는 많이 다른, 그들보다 한발 앞선 미술 형식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점들은 어쩌면 우리 창작민화가들에게 하늘이 주는 특별한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최남숙

최남숙 <와이파이>

맹목적 관념 언어, 트렌드를 거스르는 요인

두 번도 없을 것 같은 이 기회를 어떻게 선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길을 따르려면 먼저 넘어야 할 큰 문제의 산이 가로막고 있다. 바로 ‘맹목적 관념 언어의 척결’이다.
동양 예술에서 관념이란 국어사전적인 뜻과는 좀 다르게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대개는 실제가 아닌 이상추구理想追究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과 개성을 중요시 하는 현대라는 시대적 처지에서 보면 그러한 표현 기법이 현대미술에 맞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조선 후기에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 시대는 아직도 관념적 소통이 지배적일 때였다. 사대부는 아직도 동양적 자연주의(신선 사상적 관념)에 깊이 매료된 문화를 양산해 내었고, 민중은 사대부가 누리던 문화를 선망하며 닮아갔다. 당연하게 모든 미술은 관념적 세계를 드러내기에 바빴다. 삶에 육화된 세계가 아닌 마음속에 동경하는 세계, 즉 뜬구름 잡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식의 막연한 관념적 세계가 그들의 예술 목적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담긴 높은 정신세계를 표현한 이상적 자연경관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당시 산수화의 화제畵題로는 자연스럽게 소상팔경도가 그 선망의 중심이 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소상팔경이란 다름 아닌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현에 있는 동정호洞定湖 남쪽의 소강瀟江과 상강湘江 주변의 여덟 가지 승경勝景으로,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소상팔경도이다.
소상팔경을 처음 창안한 사람은 북송시대 문인이자 화가였던 송적宋迪으로, 그가 낙양에 유배생활을 하던 중 소상강瀟湘江을 여행하면서 본 풍경으로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그 시작이다. 소상팔경은 총 길이가 1.200km에 이를 뿐 아니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소상팔경을 찾아가 본다는 것은 여행이 어려웠던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 중국 내에서조차 팔경을 찾아가 본 사람이 드물었으며, 고려와 조선조를 통틀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기록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상팔경을 묘사한 소상팔경도는 산수화의 대표적 화제畵題로, 중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다. (민화 속 산수화의 전개/윤열수/2016경주민화포럼 발표논문집 中) 결국 당시에는 화가를 포함한 지식인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비체험적非體驗的 이상세계, 즉 관념 세계를 동경하면서 문학이나 미술 작품에 표현했었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이상을 좇으며 사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과거 시대에는 얼마든지 관념의 지배를 받으며 살기에 충분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정보도 어둡고, 아직은 그다지 과학적이지도 않았고, 교통이나 통신 또한 지금과 같질 않아서 그만큼 비현실적 이상세계가 삶 속에 들어올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옛날에 활약하던 이상적 사고방식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그건 그때에 적용되었던 것에 불과하다. 현대에 와서까지 그대로 사용한다면, 미술 이해의 깊이가 아직은 얕은 일부 계층 사람들에만 작은 부분 유효할지언정 첨예함을 좇는 오늘의 시대인에게는 오히려 털어내야 하는 짐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동양화 화단의 70~80년대에 남종화풍의 관념산수화가 대세였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모든 산수화가가 다 관념에 의한 정경을 그려내었고, 실경이라 하는 그림들까지도 거의 다 운무雲霧를 이용하여 신비감을 주려는 관념 산수화적 방식으로 그렸다.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집집다의 거의 모든 거실 벽에 조선식 관념산수 그림이 걸렸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산수화가들 중 관념산수화 생산을 업으로 삼는 이는 일부 싸구려 상업화가 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산수화 부문까지도 이제는 막연한 의미의 관념을 뒤로 하고 이 시대적 트렌드를 따르려는 것이다. 산수화 부문 역시도 아직 제 자리를 찾아낸 건 아니지만 말이다. 물론 필자는, 현대적 이상주의의 관념 언어방식까지 싸잡아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정영애

정영애 <인연>

삶 속에서 육화되고 체화된 표현 언어의 중요성

한편, 문학 중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의 산문이나 소설’보다 ‘내용의 상징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우리 회화와 매우 흡사한 시학詩學에서는 이 관념성에 대해 어떤 견해를 보이는지 살짝 엿보자. 이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논문이 많이 있지만, 본 글의 권위를 위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대 시인인 김춘수 선생(1922~2004)의 견해를 한 토막 발췌한다. 아래는 ‘비유와 관념’이라는 김춘수의 ‘시론詩論’ 중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메시지는 상대(시詩에서는 독자)를 구속한다. ‘전달’에는 강요라는 작용이 은연 중 섞이게 된다. 그러니까 플라톤적인 시(관념의 시-의지의 시)는 독자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 자기 사상(관념) 쪽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필자 주: 관념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관념 표현 방식을 따르게 되면,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요시하고, 동시다발적 다수 담론까지를 중시하면서 개체적 자유를 존중하려는 현대 예술의 독소가 될 수 있다는 것. 즉 ‘예술에서는 도덕성이나 사회성이 교훈적인 것보다 우선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메시지라고 할 수가 없게 된다. 피지컬physical한 시가 메시지를 배제함으로써 독자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시가 예술을 떠날 때 시는 산문이 된다. 우선 시가 되고 난 뒤에 관념이 있어야 한다. 관념이시를 압도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 산문이 된다. 자유시自由詩건 정형시定型詩건 시의 형태를 빌렸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메시지를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경우, 이미지는 시에서 위축되고 랜섬John Crowe Ransom의 말을 빌리면 “과학적인 기록(진술)”이 된다. 이미지를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서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적인 것. ‘서술적 이미지’란 배후에 관념을 거느리지 않는, 그대로의 외부 정경묘사나 심리묘사가 돼 있는 이미지를 말한다.
-관념이 없다는 것은 관념의 수단이 되고 있지 않다는 뜻- 즉 이미지가 그 자체의 목적이 되고 또한 순수하다. ‘비유적 이미지’란 배후에 관념을 거느리고 있는 이미지를 말한다. 이미지가 관념의 수단이 되고 있으니, 이미지가 불순해진다.
*필자 주: 여기에서 ‘비유적 이미지’란 시작법詩作法의 최대 방법론으로 여기는 은유적 비유법을 말함이 아닌, 관념적 이미지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됨. 그러나 외연外延이 내포內包의 긴장감을 부여한다면 좋은 시詩라고 할 수 있다.
현대예술에서는 몽환적이고 막연한 관념(이상)보다는 삶 속에서 육화되고 체화된 표현 언어를 사용할 것을 강하게 권유한다. 그래야만 다양다급多樣多急한 이 시대의 무한적인 위협 요인들과 스트레스 바닷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의 삶 속에 깊이 있는 정서적 개입의 개연성이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본 인용 시론 부분의 관념은 표현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시학적 저해라는 걸 밝히고 있지만, 역시 현대미술에 관념적 설명은 그다지 적합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한다.
우리 민족 전통 미술인 민화적 독특성이 화면 가득히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창작민화라는 이름으로 현대인 삶의 모든 힘듦과 괴로움을 달래주고, 마음 가득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격려를 제공하는 관람자의 진정한 친구로서의 의지를 세운 모습! 내가 꿈꾸는 창작민화 작품세계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앞서 말한 대로 관념을 넘어서서 시대적 삶 속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체득한 체험적 감성언어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유효한 예술적 트렌드를 내 몸에 맞는 옷으로 체화해야 한다.
민화란 본디 고차원적 테크닉보다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맑고 순진무구한, 전혀 꾸밈없는 발상을 중히 여겼던 감성적 설득력을 무기로 쓰던 미술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두고 아마추어 미술이었다며 아무리 깎아내리려 한다 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 고차원적 천진난만함이 우리 민화의 특별한 힘이었다는 것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터이니 비아냥거리는 자가 오히려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계속)

영한사전에서의 키치Kitsch란, ‘저속한 작품’ 또는 ‘공예품’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겉으로 봐서는 예술작품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싸구려 상품이 바로 ‘키치’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서나 내용을 담고 있는, 미적 수준에서는 한없이 저급한 통속적인 그림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지금의 키치는 미적으로 저급하거나 조악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특수한 장르일뿐 아니라 자본주의 문화 일반,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기존의 예술이 간과한 삶의 실체로서의 가벼움, 무의미, 통속성을 미적 형식이나 내용으로 받아들인 작가들에 의해 키치적 예술은
오늘날 진정한 예술이 표방하는 방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키치는 대단히 모호해졌고 복잡해졌다. 대중의 저급한 예술
적, 문화적 취향을 가리키는 키치의 출신 성분은 엘리트 비평가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1960년대 등장한 팝아트로 인해(대표적
예술가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통, 마릴린먼로 등과 같은 대중문화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낸) 반복과 단조로움, 권태감을 자아
내는 세상의 시시한 것들, 저급 예술 또는 대중문화를 고급 예술의 진영으로 국제적인 성공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성공은 미학적 양식으로 전유된 키치의 영향력이나 의의를 정당화하기엔 충분한 사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약>

 

글 : 정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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