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이야기, 고사인물화

도 1. 파교심매도, 종이에 채색, 79.3×26.6cm, 선문대학교박물관

고사인물화는 옛사람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옛사람들을 기억하고 높이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으며, 그림으로도 그려졌던 것이다. 이들 옛이야기는 문학가들에게도 흥미로운 제재題材가 되었기 때문에 시詩나 문장에서 다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이야기는 대개 명시名詩·명문名文의 주제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문학과 회화로 재생산되어 작품화되어 왔다. 따라서 고사인물화는 문학과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그림은 시인 맹호연의 이야기를 그린 고사인물화이다(도 1). 고사故事란 ‘유래가 있는 옛날 일’을 말한다. 옛날 일은 사람이 만들었다. 고사인물화란 옛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고사인물화의 인물 이야기는 역사 속의 충신이나 현명한 정치가, 무공이 뛰어난 영웅에 대한 것도 있고, 시인·문장가 혹은 은둔한 선비나 현자賢者의 이야기도 있다. 이 밖에 공자나 주자와 같은 성현의 이야기가 다루어지는가 하면 효자와 열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실존했던 인물이 아닌 문학 작품 속의 인물이야기가 그림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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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 미술의 저변화와 민화 고사인물화

고사인물화의 유래를 더듬어 보면 중국 한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고사인물화의 한 예로 중국 서한西漢시대의 무덤에 그려진 <이도살삼사도二桃殺三士圖>(중국 하남성 낙양 소구 61호분 벽화)라는 벽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중국 제나라 경공景公이 계책을 써서 복숭아 두 개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던 세 선비를 제거하였던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고사인물화의 유래는 이처럼 오래되었다. 고사인물화는 궁궐 건물의 내·외벽에 벽화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병풍이나 가리개障子 형식으로 그려져 가옥의 내부를 장식하기도 하였으며, 두루마리나 화첩으로 꾸며져 감상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의 고사인물화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양기성梁箕星이 그린 <이교수리도圯橋授履圖>(도 2)는 화첩으로 꾸며진 고사인물화의 예이다. 이 그림은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책략가였던 장량張良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장량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기 위해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하비下邳(강서성 하비현)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에게서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전해 받았다고 전해진다. 장량은 이 과정에 노인이 흙다리 아래 강으로 벗어 던진 신을 여러 차례 주워주었는데, 이 그림은 장량이 신을 주워서 노인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장면은 장량의 고사인물화의 도상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고사인물화는 오랜 세월 반복 제작되면서 일정한 도상의 틀이 형성되었다.
이 그림은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이라고 하는 화첩에 수록되었다. 《만고기관첩》은 18세기 전반에 왕실에서 도화서의 화원들을 동원하여 제작한 서화첩으로 추정되고 있다. 양기성이 오늘날 잘 알려진 화사는 아니지만 18세기 전반 당시에는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던 도화서 화원이었다. 이 화첩에는 그림과 함께 해당 고사와 관련된 글이나 시가 마주보는 면에 쓰여있다. 장량의 고사인 경우는 원전原典인 『유후세가留候世家』 중의 해당 문구를 옮겨 적은 것이다. 그림과 텍스트를 나란히 펼쳐 보며 고사를 배우고 익히면서 그림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민 서화첩이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인 정선鄭敾과 김홍도金弘道도 장량의 고사를 주제로 고사인물화를 그렸다. 김홍도의 <이교수서도圯橋受書圖>는 8폭으로 구성된 고사인물화 병풍 그림 중의 한 폭인데 치밀하고 세련된 필치로 완성도 높은 예술성을 표출하였다(도 3).
이처럼 유명화가들이 담당하여 그렸던 고사인물화는 왕실과 상위 신분계층에서 향유하던 그림이었다. 고사인물화가 민화의 주요 테마가 된 것은 조선 말기 신분제도의 와해와 중인층의 성장, 이에 따른 상층문화의 저변화 및 미술시장의 확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화에서 다루어진 장량의 고사를 보면 김홍도의 <이교수서도>와 상당히 근접해 있음을 볼 수 있다(도 4). 산수 배경이 웅장하게 묘사되었고 계곡에 걸쳐진 흙다리가 경쾌한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그 위에 노인과 장량이 위엄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묘사력이 떨어져서 바위의 표현은 기하학적 도형이 어우러진 추상적 구성에 가깝고, 인물에서는 해학성이 엿보인다. 백묘법이 주를 이룬 가운데 인물과 단풍 든 나뭇잎, 먼 산 일부에만 채색이 가해져 색다른 효과를 자아내었다. 양기성이나 김홍도가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산수와 인물 표현으로 회화적 완성도를 추구했던 데에 비해 민화에서는 그 틀을 벗어난 자유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는 지배층이 요구한 격식과 격조에서 탈피한 대중화의 결과이다. 이는 또한 옛 고사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더 이상 상층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고, 서민 대중들이 공유하는 대중적 문화로 저변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충신·공신의 이야기를 그려 교훈을 삼다

앞에서 장량의 고사를 다룬 <이교수서도>를 보았는데, 이처럼 왕조 창건의 공신이나 충절을 다한 신하의 고사는 고사인물화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어진 주제였다.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진 태공의 고사가 일반에 가장 익숙한 주제일 것이다. <태공조위도太公釣渭圖>는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하는 태공太公을 만나 그를 발탁하였고, 이어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게 되었던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도 5).
<소무간양도蘇武看羊圖>는 한나라의 충신으로서 흉노의 땅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던 소무의 이야기이다(도 6). 흉노는 그가 흉노에 투항하도록 온갖 회유와 협박을 가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한나라를 향한 충심을 버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멀리 북해北海 기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양을 치며 살았고, 19년 만에 극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고사를 그린 것이다. 소무가 처음 흉노 땅에 갈 때 한나라 황제가 내린 정절旌節(왕명을 받은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表示로 주던 의장)을 가져갔는데 유배생활 동안 늘 그것을 지니고 있었고, 고국에 돌아올 때는 정절에 달려있던 털이 모두 빠져 대만 남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그림에서 정절을 받쳐 들고 있는 소무의 도상이 확인된다(도 6).
<이윤경신도伊尹耕莘圖>에 그려진 이윤은 상나라 초기 탕왕에게 발탁되어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유신씨 땅에서 농사짓고 있었는데, 그가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는 정보를 들은 탕왕이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그를 초빙하였고, 이윤이 마침내 탕왕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는 고사이다. 부열축암도傅說築巖圖는 상나라 때의 현신賢臣인 부열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부열은 원래 죄인으로 부암傅岩에서 성을 쌓고 있었다. 당시 상나라 왕이었던 무정은 꿈속에서 성인聖人을 만났는데,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그림으로 그려 닮은 사람을 찾도록 하였다. 마침내 부암에서 그림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바로 부열이었다. 부열은 재상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한다.
충신·공신을 주제로 한 고사인물화는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할 줄 아는 현명한 군주, 또 때를 기다릴 줄 아는 현자의 모범을 제시한 그림으로서 교훈이 되도록 그려진 것이었다.

은일·고사高士의 이야기에서 고결한 성품을 본받다

때를 만나면 현명한 재상으로서 혹은 뛰어난 책략가로 군왕을 보필하겠지만, 난세에 처한 경우 은일고사의 삶이 최고의 이상으로 숭앙되었다. 고사인물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와 <허유세이도許由洗耳圖>라 할 수 있다. <상산사호도>는 한나라 고조漢高祖 때 섬서성의 상산에 은거하던
네 노인의 고사이다(도 7).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角里先生의 네 은사가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이들은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어서 사호四皓라고 불리었다. <허유세이도>는 요堯 임금으로부터 재상의 자리를 권유받은 허유許由가 귀가 더럽혀졌다고 하며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는데, 마침 소를 끌고 지나던 친구 소부巢父가 더럽혀진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그보다 상류로 올라가서 소에게 물을 먹였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도 8). 북송 시대의 은일고사隱逸高士인 임포林逋의 고사를 그린 <고산방학도孤山放鶴圖>도 적극적으로 다루어진 주제이다. 임포는 학문이 깊고 성품이 고결하였는데 항주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둔하여 매화와 학을 벗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임포는 시인으로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고결한 선비로서 세인의 사랑을 받았다.

시인·문장가의 이야기를 담아 시의詩意에 젖다

문치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 명시名詩·명문名文의 문학가는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문학가들의 행적과 다양한 일화는 그들의 주옥같은 시문과 함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문학가의 이야기로 가장 널리 다루어진 고사인물화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고사를 그린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이다(도 1). 그는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이른 봄이면 파교를 건너 눈 쌓인 산속에 매화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육조시대 동진東晋의 은일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이야기도 즐겨 다루어졌다. 도연명은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포부를 품고 관직에 나아갔지만 관직생활이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한 인물이다. 자신의 은거의 삶을 표현한 그의 문학작품인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직접 농사짓고 전원을 거니는 삶에서 자족감과 초월적 정신세계,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그의 인생관이 반영되어 많은 문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애송되었다. 도연명이 소나무에 기대어 나무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담은 <무송반환도撫松盤桓圖>는 「귀거래사」의 내용을 다룬 것이다(도 9).

대중 소설을 주제로 대중적 미술로 나아가다

조선 후기에 통속 소설이 유행하면서 독자층이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인기 있었던 소설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소설적 요소가 가미된 명나라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가 있었다. 아울러 삼국지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고사인물화도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이를 <삼국지도三國志圖> 혹은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라고 한다. <삼국지연의도>는 주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핵심 장면을 모은 병풍 형식으로 그려졌다. 삼고초려三顧草廬, 도원결의桃園結義, 장판교전투長板橋戰鬪, 적벽대전赤壁大戰 등이 포함되었다. 이 그림은 장판교에서 장비가 고함으로 조조군을 물리쳤다는 ‘장판교장비長坂橋張飛’를 그린 것이다(도 10). 회화 양식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을 대하듯 간략하고 어눌하면서도 해학적인 표현을 드러내 흥미를 끈다.
중국소설을 주제로 한 <삼국지도>와 함께 김만중의 한글 소설 「구운몽」을 다룬 <구운몽도>가 민화에서 다루어져 고사인물화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주인공 성진 스님이 꿈속에서 여덟 선녀를 부인으로 얻어 펼쳐지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인데, 결국 인간의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결말이다. 무엇보다 선계仙界와 용궁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이야기 전개가 민화로 다채롭게 표현되어 그림에서도 화려하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연출되었다. <구운몽도> 중의 <석교> 장면은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다. 주인공인 성진이 석교 위에서 팔선녀를 만나는 장면이 그려졌다. 복숭아꽃을 꺾어 팔선녀에게 던지니 그것이 여덟 개의 옥구슬로 바뀌어 팔선녀들이 그것을 주워 하늘로 날아가는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이렇듯 대중 통속 소설이 민화 고사인물화의 주제가 되어 널리 제작되고 감상되었던 것은 상층문화의 저변화와 함께 한편에서는 새로운 대중문화가 생성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수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표현

고사인물도는 주제가 다양한 것만큼이나 화풍도 다양하다. 수묵담채에서 구륵진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기법이 사용되었다. 대개 산수배경의 묘사와 어우러졌는데 한 면에 여러 장면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핵심적인 한 장면만이 묘사되어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을 띠기도 하였다. 그림에 따라서는 파격적인 구도와 경물 간의 비례 파괴, 반추상화된 산수의 표현 등 풍부한 상상력과 기발한 표현법을 사용하여 독특한 미의식이 돋보인다. 각 인물이나 산수를 묘사한 필치가 어눌하여 어린아이의 그림을 대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능숙한 필치로 대상의 특징을 잘 표현한 그림도 있다. 대체로 간략한 묘사와 다채로운 채색이 특징이다.

고사인물화,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고사인물화가 제작되고 감상되었던 조선시대에서 구한말까지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에게 이들 그림에 담긴 주제는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 노인이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으면 대번에 태공임을 알아보고 이에 관한 고사를 떠올렸을 것이고,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사람이 그려진 것을 보고는 도연명인 것을 알아보고 그가 지은 「귀거래사」를 줄줄 읊어댔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림만 제시되면 그 바탕이 된 텍스트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한국인은 이러한 한자 문화의 전통과 단절되어 더 이상 이들 고사를 떠올리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림과 텍스트가 단절되어버린 것이다. 산수와 인물이 어우러져 매력적인 그림 세계를 펼쳐 보였던 고사인물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반쪽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이에 제안을 해본다. 그림 속에 한글 텍스트를 불러들여 그림과 내용이 모두 이해되도록 하면 어떤가. 고사인물화는 원래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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