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닐곱

시. 박철
그림. 조여영

나는 믿는다
내가 세상을 향해 처음 주저앉아 있을 때
코 끝 가득 안개를 퍽퍽 피워내며
잘 한다 잘 한다
신작로를 지나가던 그 당나귀가
제 머리 쓰다듬다 곁눈질로 고개 끄덕여
내게 하던 말을

나는 믿는다
내가 세상을 향해 처음 꽃을 피울 때
그 당나귀가 갈기를 세워 먼 곳을 가리키며
내 고향 당국 여천은 바람도 좋지
나는 거기서 지붕 위를 마구 뛰어다녔네
그러나 이 말은 여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갈기로서 가리키던 수없이 많은 곳 보다
젖은 입술로 모르스부호 찍어가며
가픈 숨으로 전하던 그 말에 비하면

내가 겨우 마음의 집 한 채 마련했다 싶을 때
어느 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당나귀 발톱처럼
우리는 모두 나조차 두텁게 사랑한다 믿지만
밟힌 듯 힘에 겨워 눕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내 믿음 속의 짐을 하나 생각한다
잘 한다 잘 한다
어린 날 전혀 알지 못하던 한 거인이 신작로를 지나며
내게 해준 숨 가픈 그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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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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