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 자락에 둥지 튼 장중한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

불보사찰 통도사의 위상을 상징하는 금강계단 전경

▲불보사찰 통도사의 위상을 상징하는 금강계단 전경

양산 통도사

통도사는 그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흔히 불가佛家의 세 가지 보물, 즉 ‘삼보三寶’라 해서 불佛·법法·승僧을 꼽는데, 통도사는 법보法寶사찰로 불리는 해인사, 승보僧寶사찰로 불리는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사찰로 불리며 삼보사찰 중에서도 맨 앞자리에 오는 명찰 중의 명찰이다. 소중한 문화유산과 정겹고 신비로운 이야기거리로 가득찬 거찰의 위용과 만난다.

해동의 영취산 자락에 펼쳐진 불보사찰

석가모니는 생전에 ‘영취산靈鷲山’이라는 그윽한 산에서 역사적인 법회를 열었다. 고대 인도 마가다 왕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동쪽에 있었다는 이 산에서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할 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곁에서 보좌하고 각 천왕天王과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중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의 사자후獅子吼에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다. 훗날 이 장면은 그림으로 그려져 석가모니의 법문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불화로 자리 잡는다. 이 불화가 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는 그림이다. 문자 그대로 영산, 즉 영취산에서 열린 석가모니의 장엄한 법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불전인 ‘대웅전大雄殿’의 벽면을 장식하는 후불탱화後佛撑畵로 쓰이거나 혹은 ‘영산전’이라는 불전에 단독으로 봉안되기도 한다. 이처럼 영취산은 석가모니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장식한 신령스러운 산이다.
그런데 인도에 있다는 영취산이 실은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이 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만든 우리나라의 유명한 옛 지도 <대동여지도>에 영취산이라는 지명이 8곳이나 나올 정도이다. 아마도 이것은 부처님이 다른 먼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 계시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믿었던 이 땅 사람들의 돈독한 신앙심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곳의 영취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산이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영취산이다.
양산의 ‘영취산’은 오랫동안 ‘영축산’ ‘취서산’ 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최근 양산시는 이중 가장 많은 이들의 귀에 익숙한 ‘영축산’으로 이름을 통일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영취산이 아닌 영축산으로 부른다. 그런데 이 산이 우리나라의 모든 영취산 중에서 가장 유명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바로 이 산 기슭에 ‘통도사’라는 이름 높은 거찰巨刹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통도사는 그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되어 있는 사찰로 유명하다. 흔히 불가佛家의 세 가지 보물, 즉 ‘삼보三寶’라 해서 불佛·법法·승僧을 꼽는데, 통도사는 법보法寶사찰로 불리는 해인사, 승보僧寶사찰로 불리는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사찰로 불리며 삼보사찰 중에서도 맨 앞자리에 오는 명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의 본사로 20여 곳의 산내 암자와 수 백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린 국내 최대의 거찰巨刹이기도 하다.

금강계단문
통도사 입구에 있는 부도밭 전경. 자작율사 이래 근대의 경봉선사까지 숱한 명승대덕을 배출한 통도사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장관이다.
용화전 서쪽에 서 있는 솟을 삼문. 해장보각의 정문이다
통도사 창건설화가 깃든 구룡지 전경
통도사 3층 석탑.영산전 앞에 서있는 신라양식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용화전 앞에 서있는 봉발탑. 용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스님들이 사용하는 발우모양의 석조물이다.  보물 제417호로 지정된 소중한 유적이다.
통도사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독특한 건축양식과 화려한 장엄이 돋보이는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불상이 없다.
통도사 전각의 벽면에는 서민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민화풍의 민간그림이 많이 발견된다.
 
복잡하고 독특한 구조, 장엄한 아름다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서기 646년이라고 한다.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가지고 왔는데, 이 사리의 일부를 통도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봉안하면서 사찰을 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통도사는 창건 당시부터 불신佛身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불보사찰의 위상에 걸맞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 것은 불교의 극성기였던 고려 초의 일이었다. 현재 통도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석조 유물들의 대부분이 고려 초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조선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창重創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웅장한 위용을 갖추었다.
통도사로 가는 길은 그윽한 영축산 자락으로 오르는 길이다. 영축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큰 내를 이루어 입구 멀찍이 부터 이미 예사롭지 않은 절경을 이룬다. 통도사는 이 물줄기의 흐름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절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면 통도사는 곧바로 유서 깊은 거찰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많은 전각들이 가로 세로로 지붕을 맞대고 얽혀있고, 안쪽으로 진입하는 길은 길고도 아득하다. 이름난 거찰 중에서도 이만한 위용을 느끼게 하는 사찰은 흔치 않다. 현재 통도사 내에 있는 전각殿閣은 12개의 법당法堂을 포함 모두 80여 동에 이른다.
이렇게 전각들이 많고 경내가 복잡하다 보니, 사찰의 구조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통도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찰인데도 신라 시대에 정형화된 일반적인 가람배치의 양식을 거의 따르지 않고 있다.
대개 우리나라의 산중거찰들은 일주문에서 시작해 남문, 중문, 법당을 지나 강당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각殿閣들이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지며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테면 중심축이 남북 방향인 것이다. 주요 전각들도 이 중심축을 향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통도사는 동쪽에서 진입해 서쪽을 향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양이다. 중심축이 남북이 아닌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요 전각들이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 동향東向 사찰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뜻밖에 주요 전각들은 중심축의 방향과는 달리 남향南向을 하고 있다. 가람배치의 큰 줄기인 ‘주축主軸’은 동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주요 전각들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있는 것이다. 전각들의 방향을 부축副軸이라고 할 때 주축과 부축이 동서와 남북, 즉 직각방향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람배치를 편의상 ‘직교형直交型’ 가람배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직교형 가람배치를 따른 사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통도사의 가람배치가 여느 직교형 사찰의 그것과도 크게 다른 것은 부축이 무려 3개씩이나 된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3개의 독립된 남향사찰이 동서방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있는 셈이다. 이 3개의 독립된 사찰 영역을 진입 방향인 동쪽에서부터 각각 ‘하로전下爐殿’ ‘중로전中爐殿’ ‘상로전上爐殿’으로 구분해 부르고 있다. 이 세 영역은 모두 독자적인 법당을 가지고 있어 통도사에는 주불主佛을 모시는 법당도 여럿이다. 즉 하로전은 영산전靈山殿, 중로전은 대광명전大光明殿, 상로전은 대웅전大雄殿이 각각의 영역을 대표하는 중심 전각이다.
이렇듯 독특한 가람배치에서도 통도사의 오랜 연륜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하루 아침에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멀리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실로 오랜 세월을 두고 중건과 중창을 거듭하는 동안 차근차근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통도사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무엇보다 이러한 구조를 눈에 익혀야 한다.

불보사찰의 상징, 금강계단의 위용

그러나 이렇듯 복잡한 구조, 수많은 전각에도 불구하고 통도사 전체를 상징하는 으뜸가는 법당은 사찰의 정점이자 상로전의 중심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대웅전이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조선 인조 임금 때인 1645년에 다시 지은 이 건물은 지붕의 형태가 丁자를 이루고 있어 진입 방향인 동쪽에서는 물론 정면인 남쪽에서도 팔작지붕의 합각면이 보이는 독특한 구조가 특징이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15칸 규모이다. 건물에는 4방향에 각각 다른 편액이 걸려 있는데,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북쪽은 적멸보궁, 남쪽은 금강계단이다. 어느 것이 진짜 당호堂號인지 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금강계단의 주인공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므로 진입방향인 동쪽에 붙어있는 ‘대웅전’이 공식적인 당호일 것이다.
그런데 우물마루가 깔린 널찍한 법당 안에는 화려한 불단佛壇만이 있을 뿐, 그 위에 있어야 할 불상이 없다. 대신 북쪽 벽면에 장방형의 커다란 창이 나있고, 그 창 너머로 통도사의 상징이기도 한 금강계단이 보인다. 불상 대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부처의 신골身骨인 진신사리 이상으로 부처를 상징하는 대상물이 어디 있겠는가.
계단戒壇이란 본래 승려에게 불교의 계율을 수여하는 의식, 즉 수계의식受戒儀式을 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여기에 계율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이 금강계단이다. 금강金剛, 즉 다이아몬드 같이 단단하고 견고하게 계를 지키고 보존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2층의 넓은 기단 위에 앙련과 복련으로 이루어진 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가장 흔한 부도형식의 하나인 이른바 ‘석종형石鐘形’ 부도를 올려놓은 매우 간단한 모양이다. 사방을 불상, 천인상, 신장상 등으로 장식하고 계단 전체를 화강암 난간으로 둘러 위엄을 더했다. 그러나 창건 이래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까지 수많은 중수를 거듭했기때문에 처음 모양도 이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삼국유사>에 “2층으로 되어 있는 단의 위층 중간에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이 보여 처음 모습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도사에는 연륜에 걸맞게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으나 그 대부분은 18~19세기의 뛰어난 불화들이어서 경내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문화재급 유물유적으로는 중로전 용화전 앞에 세워져 있는 보물 제471호 ‘봉발탑’과 개산조당 앞에 서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석등, 하로전의 법당인 영산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 정도만을 꼽을 수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귀중한 문화재는 입구 근처에 있는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영취산 울린 부처의 사자후, 지금도 들리는 듯

minhwa1508204고려시대의 석조유구로 추정되는 ‘봉발탑’은 통도사가 자랑하는 가장 독특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스님의 밥그릇인 발우鉢盂 모양을 하고 있으나 정확한 쓰임새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불교에서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장치를 일컫는 용어이므로 ‘봉발탑’이라는 이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관음전 앞에 있는 석등도 조성 수법 등이 이 봉발탑과 비슷한 점이 많아 두 석조유물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로전의 법당인 영산전 앞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 계단형의 층급을 이루고 있는 옥개받침 등 전형적인 신라탑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아담한 불탑이다. 다소 완만한 처마의 반전과 4개로 이루어진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신라 말 혹은 고려 초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밖에 문화재급 유산은 아니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옛 흔적의 하나가 상로전 대웅전 서쪽에 있는 예쁘고 자그마한 연못 ‘구룡지九龍池’이다. 말끔히 다듬은 화강암으로 호안석을 두르고 물 위로는 아치형 다리를 놓은 원형의 연지蓮池로 통도사의 창건설화가 깃들어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통도사의 절터는 본래 연못이 있던 자리였는데, 그 연못에는 9마리의 못된 용이 살고 있었다. 문수보살로부터 이곳에 절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자장율사는 용들을 모두 내쫓고 연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 그때 다른 용은 모두 달아났으나 눈이 먼 한 마리의 용만은 절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간청했다. 자비로운 자장스님은 연못 한 귀퉁이를 남겨 그곳에 용을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이 연못이 바로 구룡지이다. 통도사 사적기 중의 하나인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史蹟略錄>에 전해지는 설화이다.
통도사는 이처럼 수많은 유형의 문화유산과 숱한 이야기가 담긴 옛 흔적들로 가득 찬 경건하면서도 정겨운 도량이다. 그러나 통도사의 진정한 매력은 그 무엇보다 부처의 몸 자체를 뜻하는 불보사찰로서의 상징성에 있다. 북벽 창 너머로 금강계단이 가득 들어차는 대웅전에 들어서 번잡스런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조용히 정좌해 보라. 아득한 시절, 영취산 중턱을 울렸던 석가모니의 사자후가 깊은 침묵의 소리를 타고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글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사진 : 이주용(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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