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문화의 확산과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도 1)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592년, 견본담채, 398.5×33.5㎝, 국립중앙박물관

▲(도 1) 이성길, <무이구곡도> 부분, 1592년, 견본담채, 398.5×33.5㎝,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경제적 여유를 지닌 신흥부민층이 민화民畵의 고객으로 등장한다. 주로 부상富商과 부농富農을 비롯한 기술직 중인中人들이 중심이 되었다. 양반계층에 들지 못했던 이들은 경제적 지위의 상승과 사회적 진출을 강화하면서 점차 양반문화로 눈을 돌렸다. 양반계층이 누리던 다양한 고급문화를 공유하고자 한 노력은 이들이 구매한 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양반문화를 향한 동경憧憬 어린 시선이 담긴 민화가 하나의 경향을 이루며 부상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주제의 하나가 민화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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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구곡도는 중국의 명산 무이산武夷山을 관류하는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그린 산수화이다. 사실 무이구곡도는 성리학적 교양과 정서가 충만해야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런 속성으로 인해 무이구곡도는 양반층의 감상 범위를 벗어나 대중화하기가 극히 어려운 그림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는 주로 무명無名 화가들의 민화로 그려지면서 저변을 확대해 갔다. 19세기에 새로운 민화의 화제로 오른 무이구곡도는 어떤 내력을 지닌 그림일까?

무이구곡도는 어떤 그림인가?

중국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무이산은 중국의 동남쪽 복건성福建省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이 산을 관류하는 120리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은 남송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가 살던 은거지로 유명하다. 주자의 학문이 원나라 때 관학官學으로 인정받자 무이구곡은 주자 학문의 발원지로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이후 여말선초에 전래된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에 큰 감동을 경험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주자는 무한한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주자의 자취가 서린 무이구곡은 성리학자들이 꿈꾸던 이상향理想鄕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16세기의 조선에 전래된 무이구곡도는 수많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것이 1592년 이성길李成吉이 그린 <무이구곡도>이다.(도 1) 무이구곡의 실경을 압축적으로 재구성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상향으로 여겨오던 주자의 유적을 그림을 통해 한눈에 살필 수 있다는 것은 유학자들에게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16세기의 조선에 들어온 무이구곡도는 19세기까지 꾸준히 유학자들의 전유물로 전해졌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무이구곡도는 큰 변화를 거친다. 이 시기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九曲을 마련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조선구곡의 조성과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어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와 도산도陶山圖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무이구곡도의 궤적은 16세기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의 마지막까지 주자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敬畏感을 교감할 수 있는 그림으로 그려졌다.

대중적 그림으로의 변모

무이구곡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도상의 정형定形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으로 그려지며, 대중화를 위한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대중화란 그림의 수요 계층이 늘어나고, 거기에 부응하기 위한 화가들의 그림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상을 말한다. 17세기 이전의 무이구곡도는 대부분 직업화가들이 그렸지만, 18세기 이후에는 화원과 사대부를 비롯한 무명화가에 이르기까지 화가의 층이 다양해졌다. 각 계층별 화가들이 무이구곡도를 그린 셈이 된다. 지식인층의 전유물로 여겨진 무이구곡도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으로 변모하면서 폭넓은 수요층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대중지향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그림의 한 사례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785년(정조 8) 작 《무이구곡도첩》에서 살펴보자.
이 《무이구곡도첩》의 그림들은 매우 독특하다.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擬人化하거나 희화화戱畵化시킨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우선 제2곡과 제8곡의 그림을 살펴보자. 제2곡의 중심 경물인 옥녀봉玉女峯은 경물景物이 아닌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도 2) 옥녀봉이 미인美人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모습에 비유하여 그린 것이다. 이러한 변형은 이전 시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제8곡에서는 인면석人面石과 묘석猫石이 눈에 들어온다.(도 3) 인면석은 서로 마주 보는 남녀의 얼굴을 형상화한 부분이다. 이목구비를 그리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인면’임을 알아 볼 수 있다. 묘석은 바위를 고양이의 형상으로 각색하여 그렸다. 무이구곡도가 지식이 있어야만 보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라는 점을 강조한 파격적인 구성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이러한 그림이 민화의 본격적인 등장보다 이른 18세기 후반기에 그려진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이구곡도첩》이 보여준 대중적인 성향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본격적인 민화로 그려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명화가의 그림인 가회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 10폭이다.(도 4) 이 두 점의 무이구곡도에는 약 백 년의 시간적 격차가 있지만, 그 사이에 대중화를 향한 많은 점진적인 변화의 단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가회박물관 소장 《무이구곡도》 양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병풍이라는 형식과 산수의 이미지를 고려할 때, 가회박물관본과 비교를 필요로 하는 자료가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계병 武夷九曲圖稧屛》이다.(도 5) 이 계병稧屛은 화원양식의 채색화이며, 묘사가 정교하고 색감이 화려한 궁중양식에 준하는 작품이다. 가회박물관과 영남대 박물관본 무이구곡도 그림은 화원양식과 민간양식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대비를 이룬다. 또한, 궁중회화에서 민화로 전이轉移가 이루어진 사례이기도 하다. 세련된 화원화가의 화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무명화가들의 그림에는 어떤 세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

화원양식 VS 민간양식

영남대박물관과 가회박물관의 무이구곡도의 양식을 서로 비교해 보자.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무이구곡도계병》과 같은 유형의 계병은 국가적인 행사를 기념하여 관료들이 제작한 경우가 많았고, 17, 18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 병풍은 1739년(영조 15) 6월, 중종비中宗妃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申氏의 복위로 인해 릉陵의 새롭게 단장하는 일을 맡은 도감都監의 관원들이 임무의 성공적인 완수를 기념하여 기념물로 제작한 것이다. 여러 점을 만들어 고위 관료들끼리 나누어 가졌고, 특별한 경우는 궁중에 올리기도 했다.
그림을 그린 화가는 궁중 화원으로 짐작된다. 병풍의 앞면에 그림, 뒷면에 서문과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해 두었다. 보통의 기록화처럼 행사나 연회장면을 그리지 않고, 그와 무관한 무이구곡을 주제로 삼은 것이 이례적이다. 궁중 화원동이 그린 무이구곡도에는 화려한 진채眞彩 양식이 돋보이며,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아마도 왕실이나 관료들의 주문에 의해 그렸겠지만,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무이구곡의 경관을 체험하게 한다. 그림의 보존상태가 매우 좋지 않지만, 기암절벽으로 구성된 이미지는 무이구곡의 특징을 극적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화원화가의 양식과 민간화가의 화풍은 ‘정교함’과 ‘간략함’이라는 극단의 양식을 취하여 무이구곡도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무명화가들의 그림은 전형典型을 답습하면서도 화원화가나 문인화가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특색을 갖추었다. 이와 비교할 가회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은 한 폭씩 완결된 그림을 10폭으로 구성한 것이다. 화면의 좌우로 들쑥날쑥 배치한 산형山形의 이미지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등간격의 선묘와 필획을 반복시켜 산세의 굴곡을 표현했다. 그리고 필획 사이에 태점이나 나무를 간략히 그려 넣기도 했다. 대단히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는 편의적인 화법이다. 또한, 이 그림에는 무이구곡의 지형적 특징에 대한 단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무이구곡도의 초기 양식처럼 각 경물의 명칭도 기록하지 않고, 상상의 경물로 채웠다.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조형적 표현이 특징이므로 여기에서 화격畵格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가회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주자가 지은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각 폭마다 적어 놓은 점이다. 무이구곡시를 읽으며 음미하는 것은 유학자나 교양인만이 접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무이구곡도병》이 지닌 무이구곡도로서의 고유성은 매우 약하지만, 무이구곡시가 들어가면 완결된 무이구곡도로 통용될 수 있었다. 시문은 소략한 그림의 내용을 보완해 주며, 시상詩想과 연계된 문인 취향의 정서를 불어넣는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가회박물관의 《무이구곡도병》은 민화로 그려졌지만, 그 수요층은 양반문화를 동일시하고자 한 신흥부유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화韓國化와 대중화大衆化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무이구곡도계병》과 같은 형식의 그림들은 시간이 지나면 고화古畵로 대접받으며 그림을 사고파는 유통공간으로 나왔을 것이다. 광통교廣通橋나 종로 일대의 지전紙廛이 유력하다. 지전으로 나온 고화들은 그 인근에 머물던 수많은 무명화가들의 모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전문적인 기량이 부족했던 무명화가들에게 화원양식은 언제나 좋은 학습의 대상이자 교과서의 기능을 했다고 본다. 이러한 원본을 두고 무명화가들이 소략하게 베껴 그린 그림들은 저렴하게 거래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민화 무이구곡도가 그려진 배경에는 언제나 신흥부유층과 양반문화를 향한 그들의 높은 열망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림 자체나 화격의 문제라기보다 어쩌면 양반문화가 반영된 그림의 주제였을지 모른다. 무이구곡도뿐만 아니라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금강산도金剛山圖 등의 전통적인 상류층 회화의 주제가 19세기 민화의 대중화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이구곡도가 회화사적繪畵史的으로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성과 때문이다.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한국적인 화풍으로 전환시킨 점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17세기 이후 구곡도의 현장을 중국의 무이산에서 조선의 명소로 바꾸어 그린 조선구곡도의 양식을 창출해 낸 성과였다. 두 번째는 양반계층의 전유물과 같았던 무이구곡도를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화의 양식으로 전환을 이룬 점이다. 즉 중국에서 수용한 무이구곡도는 한국화韓國化와 대중화를 거치며 독자적인 변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말기의 민화가 이루어낸 한국화와 대중화는 다른 주제의 그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값진 성취였다.

 

글 : 윤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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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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