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좌담회 – ‘화조도 Today’를 기다리며

 

지난해 민화계를 뜨겁게 달군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회로는 단연 지난 여름 서울 동덕아트갤러리와 대구보건대학 인당뮤지엄을 순회하며 열린 ‘책거리 Today’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경주대 정병모 교수가 기획하고 월간<민화>가 주관한 이 전시회는 ‘민화 Today’라는 큰 타이틀 아래, 현대민화가 거둔 성과를 민화의 주요 화목별로 점검해 가는 참신하면서도 획기적인 기획전이다. 지난해 큰 화제를 모은 책거리에 이어 올해는 민화의 화목 중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조도’를 메인 테마로 선정했다. 오는 8월에 오픈될 전시회를 앞두고 민화 Today전을 처음 기획한 정병모 교수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미술평론가 조은정 교수를 초청, 화조도 Today전의 의의와 현대 민화화단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과제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민화의 현주소를 한눈에 조망하는 민화 Today 프로젝트

유정서 지난해 이 자리에 계신 정병모 교수님 기획, 월간<민화> 주관으로 열린 특별기획전 <책거리 Today>는 여러 면에서 민화 전시회의 새로운 전형으로 기억될 만큼 주목받는 전시회였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애초 밝혀드린 대로 이 전시회는 ‘민화 Today’라는 큰 타이틀로 계속 진행될 시리즈의 첫 번째 순서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 테마로 ‘화조도’가 선정되어 오는 8월, 지난해와 같은 스타일로 <화조도 Today>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 전시회를 앞두고 많은 분들의 관심에 부응하고, 내친 김에 이 전시회의 보다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민화화단의 방향, 혹은 과제 등을 짚어보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늘 모신 두 분은 민화와 일반 미술, 양쪽에서 명실공히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이론가들이십니다. 먼저 <민화 Today>전을 처음 기획하시고 진행과정까지 세밀하게 지도해 주신 정병모 교수님께서 프로젝트의 의의와 취지 등을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병모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어 다 아시고 계신 내용일 것입니다만,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사실 현대 민화는 초본을 통해 옛 민화를 모사하는 소박한 작업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모사를 중심으로 한 재현민화가 우리 민화화단에 끼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어쨌든 이를 통해 민화계가 질적 양적으로 획기적인 성장을 하다 보니 그 일각에서는 모사를 뛰어넘어 작가의 개성과 동시대의 가치까지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민화를 지향하는 작가군도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이 지향하는 민화를 보통 부르기 쉽게 ‘창작민화’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최근 들어서는 이 창작민화 분야에서도 괄목할만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현재의 민화화단은 재현과 창작으로 대별되는 두 가지 작품 경향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민화화단은 이렇게 가야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 시점에서, 현대의 작가들에 의해 창조되는 우리 민화가 어느 수준까지 얼마만큼 발전하고 진화했는가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화화단의 미래를 예견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과제를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일 것입니다. 다행히 월간<민화>가 제 뜻에 공감을 해 주시고 동덕아트갤러리, 대구보건대학 인당뮤지엄 등 뜻있는 기관에서도 응원을 해 주셔서 첫 번째 문턱인 <책거리 Today>를 무난히 넘을 수 있었습니다.

유정서 사실 <책거리 Today>전은 전시를 주관한 저희 월간<민화>도 놀랄 만큼 대단한 호응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첫 번째 테마로 선정된 ‘책거리’가 지니는 매력도 큰 몫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교수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정병모 지금에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실 유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책거리 Today>는 정말 갑작스럽게 결정되어 준비기간이 너무 짧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성과가 좋았어요. 이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스타일의 전시회에 대한 민화인들의 기대가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책거리 자체가 지닌 매력도 상당부분 차지했을 겁니다. 사실 책거리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민화의 화목입니다.
지난달 제가 프랑스 한국문화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민화 전시회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때 문화원장이 제가 가지고 간 <책거리 Today>전 도록을 보더니 대번에 이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자고 하더군요. 아직 국립중앙도서관 전시회도 이야기 중이고 해외 전시회도 남았으니 <책거리 Today>전은 사실 아직도 끝난 게 아닌 셈이지요.


세계 어디서든 사랑받는 소재 ‘꽃’, 어떻게 그릴 것인가

유정서 그렇다면 두 번째 테마로 기획된 <화조도 Today>도 책거리 만큼 관심을 모을 수 있을까요? 우선 책거리에 이은 두 번째 테마로 화조도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지, 더 나아가 화조도는 어떤 그림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병모 사실 이번 전시회의 테마는 ‘꽃그림’입니다. 꽃을 메인 테마로 삼은 그림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란도, 연화도 같은 그림도 포함되고 나비와 함께 그린 화접도도 다 됩니다. 다만 민화 전시회인 만큼 ‘꽃그림 투데이’보다는 민화 꽃 그림의 대표적인 화목 이름인 ‘화조도’가 더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민화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화조도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좋아하고, 즐겨 그린 그림이지요. 나아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사랑받는 화목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물론 일본의 전통 그림에서도 화조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유명한 작가들도 매우 즐겨 그리는 그림이지요. 이런 점에서 화조도는 책거리 못지않게 국제적인 보편성을 띤 화목이기도 합니다.

유정서 그러면 미술 평론가이신 조은정 교수님께서는 그림의 소재로서의 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은정 지금 정병모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꽃은 누구나 좋아하는 아름답고 보편적인 소재여서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그려진 대상이지요. 민화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서양에서도 꽃은 많은 상징성을 지닌 소재입니다. 나타내고자하는 메시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소재이지요. 장미, 백합 등에 성모마리아 등 성스럽고, 긍정적인 상징체계를 담아 그려왔습니다. 또한 종류와 모양도 워낙 다양해서 굉장히 과감하고 의미있는 실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꽃은 그 자체의 미감에다 폭넓은 상징체계, 다양한 종류와 모양 등 여러 면에서 아주 훌륭한 테마라고 봅니다. 책거리 못지않게 좋은 테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정서 자꾸 책거리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만, 책거리 Today의 경우 기대 이상으로 조형적인 측면에서 실험적인 작품이 많이 출품됐습니다. 한마디로 책거리를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하는 그림들이 꽤 있었거든요. 화조도 역시 이런 기대를 할 수 있겠지요. 이건 작품을 출품할 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일 수도 있겠는데, 이런 전통적인 화목을 ‘오늘의 그림’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조은정 고흐의 ‘아이리스’가 일본의 난초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그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과거 서양인들은 정물화의 하나로 꽃병에 꽂힌 꽃을 주로 그렸지만, 땅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건 동양의 화조화를 보면서부터예요. 그렇다면 민화를 떠올릴 수 있는 꽃그림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화를 모티브로 삼은 운보 김기창이나 내고 박생광의 작품 등이 하나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생광의 작품 중 모란 안에 벌이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벌이 있는 부분만 확대해서 보면 벌의 양쪽 발에 꽃가루가 묻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작품이었어요. 멀리서 꽃만 보면 단순히 화사한 분위기의 장식그림 같지만 그 안을 내밀히 들여다보면 고달픈 삶의 이면이 서려있는 것이지요. 그 그림처럼 장식을 위해서만이 아닌, 삶에 대한 깨달음, 혹은 작가 나름의 또 다른 메시지 등을 담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무엇인지 유심히 생각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굉장히 다양한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병모 민화를 포함한 모든 동양의 그림이 그렇긴 하지만, 특히 민화 화조도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상징체계입니다. 중심 소재인 꽃은 물론, 날아다니는 새, 곤충 하나하나가 다 무언가를 상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꽃말을 보면 좋은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불행이나 죽음 같은 좋지 않은 의미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동아시아 꽃그림은 행복을 상징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서양 꽃 그림과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길상화이며 행복한 그림인 것이지요. 앞서 조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동아시아 꽃 그림의 이런 특성을 감안하는 선에서 작품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림 속에 담겨 있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거기서 우러나는 강렬한 울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흐가 묘사한 소재 하나하나에 그의 삶이 응집돼 보는 이에게 울림을 주듯, 자신의 삶과 밀착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은정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장미 가시에 찔려 본 사람만이 장미를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술은 개인의 경험을 가시화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물론 미술의 한 측면만을 이야기한 것이긴 합니다만, 적어도 현대 예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혹은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등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코 아름답지는 않은데도 한없이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진실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화조도 투데이’에서도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정병모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예술에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특별히 꽃과 같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소재를 그린 그림들은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감동의 요소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삶의 고뇌 등이 담겨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장식적인 측면에서 매우 아름답게 그려서 성공한 작가들도 꽤 많습니다. 아무튼 이번 ‘화조도 투데이’를 통해 작가의 수만큼이나 개성적이고 다양하고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유정서 그러면 이번에는 좀 더 큰 시각에서 ‘민화 Today’ 같은 새로운 개념의 기획 전시가 수용되고 환영받을 만큼 크게 성장하고 확대된 민화계, 특히 민화화단의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미술평론가의 입장에서 조은정 교수님께서는 현재의 민화화단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조은정 민화에 관심이 많은 미술평론가의 입장에서 지난 몇 년간 지켜 본 민화계는 한 마디로 굉장히 ‘압축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수십 년은 걸려야 할 발전을 불과 몇 년 만에 성취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기 계신 두 분을 비롯해 많은 민화인들의 사심 없는 노고가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밖의 또 다른 요인으로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배경의 변화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민화가 처음 유행했던 19세기 말의 조선사회는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수 세기 동안 고착되었던 신분질서가 와해되고 맹아의 수준이긴 하지만, 일종의 자본주의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 ‘나이브 아트(naive art,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일부 작가들이 그린 작품 경향)’라고 불리는 예술이 유행했던 시기도 산업혁명이 지난 시점이었죠.
이를테면 급속한 사회변동, 즉 현대화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면서 생겨난 일종의 반동 현상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과 지금이 결코 같은 것은 아닙니다만, 유의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엘리트 미술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예술적 욕구가 존재하고, 그러한 예술로부터의 소외 현상도 분명히 있거든요. 누구나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미술인 민화가 대중으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한다면, 앞으로 민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좀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정서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압축적인 성장’이란 표현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정말 민화는 압축적인 성장을 이뤄왔고 지금도 이뤄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점에서 ‘민화 투데이’와 같은 기획전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조은정 꼭 민화 투데이 같은 기획전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시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합니다. 작가들에게 창작활동에 대한 자극을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민화 투데이’ 같은 성격이 분명한 전시는 훨씬 적극적인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이어질 더 좋은 전시를 위해 감히 한 마디만 조언을 드리자면, 흔히 빠지기 쉬운 ‘소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은, 여기서 말하는 소재주의란 민화의 화목과 같은 개별적인 소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존의 양식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같은 틀 안에서 맴도는, 부정적인 작품 스타일을 말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주변 풍경도 그릴 수 있고, 계절에 따른 기분을 표현할 수도 있는데 자꾸 계절 과일만을 반복해 그리는 경우 등을 말합니다.
특히 화목별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민화의 경우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애초의 양식에 매몰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크게 달라지기는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민화계를 대표할만한 스타가 드문 이유 중 하나가 작품만을 보고 ‘이 작품은 어느 작가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독자성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작가적 양식을 구축하려면 소재주의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화단의 발전 위해 스타작가 탄생 절실

정병모 조 교수님이 방금 말씀하신 ‘민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작가’의 필요성에 적극 동의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민화 작가들이 포함된 몇몇 민화인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느낀 점의 하나가 ‘한 사람이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린다’는 겁니다.
철강도시 빌바오가 쇠퇴할 때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세계적인 명소로 급부상하며 마을을 살렸고, 바르셀로나는 건축가 가우디가, 세비아는 대항해를 떠났던 콜럼버스가, 말라가는 천재 화가 피카소가 살려 놓았어요. 아직까지도 이들 도시는 이런 예술가들의 명성이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술은 이렇게 아주 현실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민화계를 대표할만한 슈퍼스타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작가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물론, 미술평론가, 언론 등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조은정 좋은 말씀이십니다. 스타 작가가 탄생한다면 다른 작가들도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명확한 기준점을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화단이 전반적으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미술평론가나 이론가들이 특정 방향을 제시할 경우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내달릴 우려가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부득이 제시할 지점이 있다면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은 무엇인지’, ‘장식미술을 추구할 것인지,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할 것인지’ 등에 대한 제언 정도이겠지요. 작가들이 자유롭게 작품을 그릴 수 있도록 놓아두는 것과 스타작가를 양성하는 과정이 서로 배치돼 보여도 사실은 같은 거예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병모 그렇더라도 저는 스타작가를 배출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기획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가, 평론가가 단순히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격려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작가와 함께 민화를 성장시킬 방안을 모색해야한다는 거죠. 세계적인 K-POP스타인 BTS의 뒤에는 뛰어난 기획자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조은정 좋은 말씀이긴 합니다만, 음악산업과 미술산업은 시스템 자체가 좀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음반의 경우 소비자가 아티스트, 혹은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 음반을 바로 구매하면 되지만, 미술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작품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들어가고 이를 되팔았을 때의 차익까지도 고려해야하는 일종의 투자이기도 하지요. 또한 기획자가 작가의 작품 구상 단계부터 관여했을 경우, 만에 하나 해당 작품이 소송이나 분쟁 등에 휘말렸을 땐 기획자 역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작가들의 영감을 끌어낼 수 있도록 ‘제안’이 아닌 ‘도움’을 줘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 전 워크숍 행사를 통해 작가들에게 다양한 예시나 이론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방법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유정서 두 분의 말씀이 좀 다른 듯해도 결국은 같은 결론을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화의 발전, 더 나아가 세계화를 위해서는 스타작가의 배출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노력이 뒷받침돼야 할 것인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또 이야기하는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제까지 이야기 한 것이 혹시 ‘창작민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작품 활동의 두 경향인 창작과 재현의 관계에 대해 한 마디씩만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정병모 점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창작이냐 재현이냐 하는 문제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오해를 산 적이 있긴 합니다만, 이제는 이미 그런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각 분야가 해 주어야 할 소임과 역할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민화 투데이 전만 해도 창작과 재현을 가리거나 구분하지 않습니다. 재현도 훌륭한 작품 활동의 하나라고 보고 민화계 전체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모사를 통한 재현 작업은 누가 뭐래도 민화계를 지금까지 성장시켜온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형성된 막강한 저변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창작민화의 성장도 불가능했고, 민화화단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런 성장엔진을 잘 유지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번에 피카소 미술관에 가보니 피카소가 말년에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사해 놓은 스케치가 남아 있었습니다. 작품을 이렇게도 그려보고 저렇게도 그려본 흔적을 통해 피카소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었지요. 세기의 거장도 이렇듯 말년까지 모사작업을 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결국 전통과 창작 작업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조은정 저도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모방이야말로 창작의 시작이니까요. 과거엔 국내 미술계도 서구사조에 긴밀히 반응하던 추종追從의 시대를 거쳤고, 이제는 내부적으로 저력을 구축하며 세계적인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만의 독자성은 민족성이나 전통을 기반으로 한 80년대 민중미술이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작가들이 민중미술을 창작의 자원으로 삼아 자신만의 예술로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자하는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화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당연히 작품을 팔아야하겠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과 내가 좋아하는 그림 간 간극이 발생할 수 있어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나가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유정서 두 분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월간<민화>가 하반기 개최할 예정인 특별기획전 <화조도 Today>와 관련해 프로젝트의 의의와 테마를 짚어보고, 민화 화단의 현주소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두 분 모두 바쁘신 중에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간 말씀해주신 내용이 작가들에게 유익한 참고가 되길 바라며 좌담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 유정서 편집국장 정리 문지혜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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