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개혁군주 정조의 꿈과 한이 서린 조선 최고의 성곽

수원 화성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위대한 개혁 군주 정조 임금의 원대한 꿈과 포부가 서린 계획도시의 심장부였다. 또한 ‘정조의 시대’인 18세기 조선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적 역량이 총 집결되어 완성된 대역사이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성 화성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다시 만난다.

정조 임금의 원대한 구상,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화성’에 가서 우선 찾아볼 곳은 다름 아닌 성 안 옛 터에 새롭게 복원된 임시 궁궐인 ‘화성 행궁’이다. 그 중에서도 정전正殿인 봉수당의 오른쪽에 있는 ‘화령전’에 가서 그 곳에 봉안된 정조임금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만나볼 일이다. 정조 임금이야말로 화성의 ‘시작과 끝’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의 난리를 겪으면서 이미 생기와 힘을 잃고 휘청대던 낡아빠진 조선왕조를 다시금 문화와 예술이 꽃피고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강한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위대한 개혁 군주이다. 그가 승하한 이후 조선은 다시는 그처럼 분명한 철학과 지도력을 지닌 영특한 임금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조는 꺼져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실의 처절한 권력다툼의 회오리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 즉 오늘날의 수원으로 옮기고 그곳을 요즘 말로 치면 ‘신개념 계획도시’로 가꾸었다. 마을을 정리하고, 저수지와 같은 대단위 수리시설을 크게 늘려 농업의 기반을 든든히 했는가 하면 시장을 크게 일으켜 수도인 한양에 버금가는 상업도시로 키워나가고자 했다. 이를테면 장차 조선의 모든 고장, 나아가서 조선 전체가 힘써 벤치마킹을 해야 할 풍요롭고 모범적인 도시로 가꿔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정조 임금이 어째서 수도 한양을 놓아두고 수원에 이렇게 큰 도시를 새로 일으키려 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들이 득실대는 한양을 버리고 아예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 있는 정황에 비해 증거가 될 만한 결정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반면 <한중록>과 같은 몇몇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면 임금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앉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 행궁으로 내려와 거기서 만년을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그럴 경우, 정조는 화성유수부를 자신이 평생 추진했던 개혁과 왕권 강화의 거점도시로 삼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가설이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어떤 이유였든 화성은 바로 이렇듯 정조가 구상한 원대한 도시계획의 중심지이자 심장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 프로젝트를 완결 짓지 못한 채, 화성이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00년 겨울,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화성은 위대하지만 고독했던 개혁가 정조의 이루지 못한 꿈과 한이 서린 비운의 공간이기도 하다.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량 보여주는 걸작 건축물

정조는 화성을 지으면서 이전의 많은 성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을 짓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경험이 많고 노련한 축성 전문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작 31세밖에 안된 젊은 관리 다산 정약용에게 전체적인 설계를 맡겼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까지 다산은 1790년 정조의 능행陵行 당시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하는 일에 참여한 것 말고는 축성과 같은 어마어마한 토목공사에는 전혀 참여한 적이 없는 백면서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정조는 모험이 따르더라도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성’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의도에 따라 화성은 축성 과정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 방식과 기술을 택했다. 민간 업자로부터 자재를 조달하고 거중기와 같은 새로운 건설 기기를 제작해 응용했는가 하면 백성을 억지 부역으로 노동을 시키는 대신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을 하게 했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한 번도 시도한 적 없었던 새로운 시스템으로 공사를 추진했던 것이다
더욱이 획기적인 것은 공사의 전 과정을 정확한 설계도를 포함한 세밀하면서도 방대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이 기념비적인 기록이 그 유명한 ‘화성성역의궤’이다. ‘의궤儀軌’란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가 치르는 중요한 행사의 전모를 자세하게 정리한 기록을 말한다.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계속 만들어졌지만, 그 방대한 분량과 내용의 세밀함, 그리고 뛰어난 완성도에서 화성성역의궤는 의궤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조선조 기록문화의 절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화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이 아니라 ‘정조의 시대’인 18세기 조선 사회의 지적 수준과 문화 예술적 역량을 가장 종합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가장 의미 있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화성이 지닌 이러한 의의와 가치를 알지 못하면 화성의 성벽 둘레를 수십 번 돌아보았더라도 올바른 답사를 했다고 할 수가 없다. 화성 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설의 쓰임새가 어떻고, 건물의 양식이 어떻고 하는 것을 배우기에 앞서 화성 건설에 담긴 이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 역사적 무게와 의의를 바로 아는 일이다.
어쨌든 화성은 1794년 정월에 공사에 들어가 2년 반만인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애초 예상했던 10년여의 공사 기간에 비해 무려 4배나 빨리 끝낸 셈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의 방식과는 달리 충분한 사전준비와 합리적인 공정, 그리고 여유로운 자금 조달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잘 충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능과 아름다움 겸비한 조선 최고의 전투성

화경전에 봉안된 정조의 어진이렇게 해서 완성된 성은 전체의 길이가 약 5.4km로 도시의 중심부를 지형에 따라 불규칙하게 둘러싸고 있다. 어떤 기록에는 화성의 전체적인 모양이 ‘무르녹은 버들잎’ 형상이라고 적고 있다.
화성은 여러 면에서 그 이전에 지어진 조선의 성들과 다른 점이 매우 많았지만, 그 중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적을 막는 전투시설이 굉장히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성제城制의 특징은 산성山城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고을 중심부의 평지에 읍성 등을 쌓기는 했지만 막상 적이 쳐들어오면 거기서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버리고 지형이 험준한 산성으로 피신해 항전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평지의 성에는 이렇다 할 전투시설이 없다. 전투 기능보다는 주민의 통제 등 행정적인 기능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성은 그렇지 않았다. 산성으로 옮겨갈 것 없이 바로 그 성을 굳게 지키며 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지어졌다. 화성에 있는 전투시설 및 방어시설은 모두 48개로 성 둘레를 따라 거의 100m 마다 하나씩 있다. 이만하면 치열한 전투를 넉넉히 치러낼 만한 완벽한 군사기지이다.
하지만 전투시설이라고 해서 기능만을 강조한 나머지 살벌한 느낌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적을 방어하는 기능과 조형적 아름다움이 경이로울 만큼 잘 어우러져 있다. 흰 화강석과 검은 벽돌의 조화, 차가운 성벽과 부드러운 목조건물들의 조화, 주변경관을 잘 활용한 아름다운 풍광은 더러 이 성이 치열한 전투를 치를 수 있도록 설계된 성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게 할 정도이다. 일곱 개의 홍예로 이루어진 수문 위에 세워진 멋들어진 누각 화홍문과 입체적인 조형미를 자랑하는 동북 각루인 ‘방화수류정’의 자태를 만나면 이런 사실이 더욱 실감된다.
화성의 올바른 답사를 위해서는 무조건 성으로 올라가기 보다는 우선 근처에 있는 ‘화성박물관’에 들러 사전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화성의 의의와 가치를 이해하고, 축성의 과정과 방법 등을 미리 공부해 두면 훨씬 재미있고 의미 있는 답사가 될 수 있다. 화성을 직접 둘러보는 답사는 어느 곳부터 해도 상관은 없지만, 대체로 화성행궁을 먼저 둘러보고 곧장 팔달산 정상으로 올라가 ‘서장대’부터 시작해 서문인 화서문, 북문인 장안문 쪽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렇게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장대’ ‘노대’ ‘적대’ ‘각루’ ‘포루’ ‘공심돈’ ‘봉돈’ 등 화성에 설치된 주요 전투 시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장대’는 문자 그대로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대를 말한다. 화성에는 서쪽에 있는 서장대와 동쪽에 있는 동장대, 2곳의 장대가 있다. 서장대는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이곳에 오르면 행궁의 전경은 물론 화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동장대는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기도 해서 흔히 ‘연무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대弩臺는 문자 그대로 강력한 살상 무기인 쇠뇌를 쏘거나 장수의 명령에 따라 깃발로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대로 쓰였던 곳이고 적대와 각루는 다 같이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세워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시설이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와 전망을 자랑하는 ‘방화수류정’도 실은 동북쪽에 세워진 각루로 ‘동북각루’라고 불리기도 한다.
화성이 자랑하는 다양한 전투시설 중 백미를 이루는 것은 아무래도 ‘공심돈空心墩’일 것이다. ‘돈’은 높은 곳에서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의 일종인데 ‘공심空心’이라 했으니 문자 그대로 속이 텅 빈 돈대라는 뜻이다. 텅 빈 공심돈 안으로는 군사들이 들어가게 되어있고 벽에는 크고 작은 총안銃眼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화성에는 서북쪽과 동북쪽 2곳에 공심돈이 있는데, 이중 더욱 유명한 것은 ‘동북공심돈’이다. 규모가 압도적일뿐더러 모습도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답다.
성곽을 한바퀴 다 돌아 처음 발걸음을 시작한 서장대에 올라서면, 몸소 이 장대에 올라 우렁찬 목소리로 장용영 정예 군사를 호령했을 정조 임금의 기개가 아련히 느껴진다. 융복戎服을 차려입고 칼을 빼든 정조 임금의 모습은 얼마나 늠름했을까.

 

글·사진 : 유정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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