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상의 인도 민화 견문록 ③ 신神의 나라를 품은 인도 민화
마두바니 페인팅 Madhubani painting

마두바니 페인팅 (바르나 스타일) Baua Devi 作



인도 비르하주 미탈다 지역에서 유래한 민화 ‘마두바니 페인팅’은 인도에서 가장 핫한 민화로 손꼽힌다.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선의 조화가 특징이다. 이 민화를 맨 처음 주목한 사람은 1930년대 인도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일했던 영국 미술사학자 윌리암 아처이다. 그의 연구 결과물은 마두바니 페인팅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남다르지만, 서구중심·제국주의적 시각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내용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글 송인상 (인도 오디아트센터 큐레이터)


마두바니 페인팅의 기원

‘마두바니 페인팅(Madhubani Painting)’은 인도 비하르주 미틸라 지역에서 유래한 민화(folk painting)로서 ‘미틸라 페인팅(Mithila painting)’이라고도 불렸다. 최근 민화 유통의 중심지로 미틸라 지역 내의 마두바니가 떠오르면서 현재의 공식 명칭은 ‘마두바니 페인팅’이지만, 미틸라 지역을 인도와 나누어 가진 네팔에서는 지금도 이 지역의 민화를 ‘미틸라 페인팅’이라 부른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 Ramayana>의 주인공 ‘라마’와 ‘시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집 외벽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 마두바니 벽화(페인팅)의 기원이라고 한다. ‘시타’의 탄생지로 알려진 지금의 미틸라 지역이 그 기원의 무대다. <라마야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살라 왕국의 왕자 라마는 그의 부인 시타가 섬나라 랑카의 왕에게 납치되자 원숭이 신하인 하누만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시타를 구출하고 코살라 왕국의 수도 야요디아로 돌아온다.
당시 온 나라가 라마의 승리를 축하하고자 명절로 제정한 날이 바로 인도의 최대 명절 ‘디왈리(Diwali)’다. 그 기원을 증명하듯 지금도 마두바니 페인팅에서는 라마와 시타의 결혼식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힌두교의 핵심 교리인 ‘다르마(각 계급의 의무에 맞게 살아가는 것, 이를 잘 실천해야 후세에 더 높은 계급에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의 <라마야나>가 여전히 인도인들의 현재적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마야나> 이외에도 힌두 신화에 나오는 신들, 미틸라 지역의 토속 신앙과 풍습 등이 화려한 색채의 마두바니 페인팅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두바니 페인팅 (키츠니 스타일) Chandra Bhushan Kumar 作



마두바니 마을 전경


자연재해에서 발견된 민화, 그 드라마 같은 이야기

인도인들에게 인도에서 가장 핫한 민화(folk painting)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부분 ‘마두바니 페인팅’이라 답할 것 같다. 그만큼 인지도가 높고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델리의 유명한 상설 공예시장인 딜리하트(Dilli haat)내 인도 민화 부스에서 절반가량이 마두바니 페인팅일 정도로, 판매 부문에서 여타 민화를 압도한다. 현재 마두바니 페인팅은 이처럼 대중적이지만,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신기할 만큼 존재감이 없었다. 그 궤적을 추적해 보면 마치 한편의 드라마 같다. 출발점은 1934년의 우연한 발견에서부터다. 인도와 네팔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땅, 미틸라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비하르의 미틸라 지역에서 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수많은 집들과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농작물의 피해도 막심했다. 인도 정부가 곧바로 피해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해당지역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였기에 주요관료들은 주로 영국인이었다. 마침 영국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비하르 마두바니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던 윌리암 아처(William G. Archer, 이하 아처)가 현지 조사관으로 파견되었다. 피해 지역을 조사하던 아처는 건물 잔해에서 뜻하지 않게 낯선 벽화들을 발견했고 미술사가로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드러난 벽화들에 매료되어 이를 사진에 담았고 자료도 수집했다. 지진 수습 이후에도 조사와 연구를 계속했다. 인도의 독립 이후인 1949년에 그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예술 잡지 <마그 Marg>에 ‘마이틸 페인팅(Maithil Painting)’이란 타이틀로 게재했다.
1966년 미틸라 지역은 또 다시 큰 가뭄과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 인도 정부는 곧바로 재난 복구와 생계 지원 차원에서 전통 공예를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공예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문가들을 미틸라 지역으로 파견했다. 전문가 그룹은 아처(Archer)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현지를 재조사하여 마두바니 민화를 부흥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우선 현지 빌리지의 여인들에게 기존 벽화의 그림들을 종이나 캔버스로 옮기는 교육을 실시했고 중앙 정부가 공예 페어와 민속 관련 이벤트를 열어 민화의 상품·작품화 작업을 도왔다. 1970년에는 일본의 오사카 엑스포에 참가한 인도 정부가 인도 전통미술의 대표주자로 마두바니 페인팅을 내세울 만큼 국가적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뉴욕 고급백화점 매장에 진열된 인도 공예품들 가운데 마두바니 페인팅이 포함되기도 했다. 이후 마두바니 페인팅은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1982년에는 세계 유일의 마두바니 페인팅전문 박물관이 일본에서 개관했다. (정식 명칭은 미틸라 박물관이다. 개관 초기에는 ‘미틸라 페인팅 / 마두바니 페인팅’에 집중했으나 차츰 인도 민화 종합 박물관으로 소장품을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두바니 페인팅은 현재 미틸라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동시에 인도의 대표 민화로서 자리매김했다.


마두바니 페인팅 (코바 스타일) Dulari Devi 作



마두바니 페인팅 (혼합 스타일) Moti Karn 作


카스트에 따라 다른 양식(style)과 기법

인도 민화를 그리는 작가군의 출신을 보면 주로 부족 출신이거나 낮은 카스트 층이 주류를 이룬다. 그에 비해 마두바니 페인팅의 작가군은 비교적 높은 카스트에 속한다. 마두바니 페인팅을 발견한 아처(Archer)가 높은 카스트만을 대상으로 조사와 연구를 진행했고 후속 연구들도 그의 연구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낮은 카스트의 민화가 배재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마두바니 페인팅은 주로 브라만과 카야스타(Kayastha) 같은 높은 카스트의 민화가 대부분으로 화려한 색채의 바르나(Bharni) 스타일, 섬세한 선의 조화가 돋보이는 키츠니(Kachni) 스타일의 민화가 여기에 해당한다. 아처(Archer) 이후 여러 연구자들이 높은 카스트에만 치우친 과거 연구를 보완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하여 낮은 카스트가 사용했던 벽화와 바닥 그림을 조사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초에 집시 족의 여성들이 몸에 새겼던 문신을 종이와 캔버스로 옮겨 그린 고드나(Godna, Godhana) 스타일의 민화가 나왔다. 무슬림의 침략이 있던 시기, 여성이 몸에 문신을 하면 폭력으로부터 무사하리라 믿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외에 낮은 카스트의 여성들이 가족 행사가 있을 때 집 안팎의 바닥과 벽을 장식하고자 그렸던 알파나(alpana)와 비티 치트라(bhitti chitra)등도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타일이 아닌 목적에 따라 분류할 경우 혼례 때 그려지는 코바(Kohbar) 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코바는 혼례를 치르는 동안 신랑과 신부가 함께 머무는 방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코바가 미틸라 지역의 민화를 연구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도 미틸라 지역에 그 풍습이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미틸라 사람들이 통과의례 가운데 결혼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미틸라 사람들은 결혼을 천국으로 가는 관문이라 믿는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혼식은 화려하게, 축제처럼 치러져야만 했다. 미틸라의 관습상 혼례가 보통 나흘간 진행된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두 시간으로 식을 끝내는 우리의 결혼 풍습과는 큰 차이가 난다. 그러니 신랑과 신부가 나흘 밤을 함께 보내는 코바에 성스러운 기운의 벽화는 필수다. 벽화에 그려지는 도상은 결혼을 상징하며 여기에는 신혼부부의 사랑과 다산,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결혼에 상서로운 힘을 불러일으키는 해와 달도 포함된다. 한마디로 코바 스타일의 벽화는 미틸라의 문화적, 예술적인 전통을 나타내는 유추와 상징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도표 참조)





한편 이들 민화를 그리는 작업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민화를 종이와 캔버스로 옮겨 그리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성별, 카스트별 양식에 대한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 재료 측면에서도 일부 작가만이 수제종이와 식물성 물감을 사용할 뿐, 대부분 캔버스나 종이 위에 아크릴을 사용한다.


마두바니 기차역 전경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두바니 페인팅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진으로 훼손된 건물 더미에서 마두바니 페인팅의 원형을 발견한 사람은 제국주의 영국에서 온 미술사학자 윌리암 아처(W. G. Archer)다. 그는 인도인의 입장에서 ‘마두바니 페인팅의 창시자’격이니 매우 고마운 존재가 틀림없다. 그런데 일부 진보 학자들을 중심으로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그의 연구 결과를 재검토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아처(Archer)가 높은 카스트인 브라만과 키아스타(Kayastha)의 벽화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애초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에게 마두바니 페인팅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해 준 사람이 상류 카스트 사람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결과적으로 높은 카스트에 치중한 나머지 연구 과정상 내용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후속 연구자들은 마두바니 페인팅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인해 카스트 제도상의 관행과 여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그림 등과 같은 본래의 민속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서구인의 구미에 맞는 아름다운 감상화로 변질됐음을 지적한다. 인도 정부가 아처의 연구 결과에만 의존하여 마두바니 페인팅의 부흥을 꾀하는 과정에 지역 여성들이 두르가 깔리, 라다 등의 힌두교 여신을 그리는데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힌두교 경전에 다름 아닌 <라마야나>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고 봤다. 현재 우리가 <라마야나>에 기대서 마두바니 페인팅의 기원과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상황도 이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인도의 상류 카스트는 기원전 2000년 전에 인도아 대륙으로 이주해온 아리안 족의 후손이다. 이들의 신화와 역사의 근거지가 북부 인도 지역, 특히 비하르주 미틸라 지역과 겹친다. 이런 배경에서 아리안족의 승리를 미화한 <라마야나>의 메시지는 아리안의 후예라 여기는 미틸라의 높은 카스트에게는 분명 환심을 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아처(Archer)를 대하는 인도 진보 학자들의 탈식민사관의 발언을 보면서 문득 일본 강점기에 우리 민화를 높이 평가하며 민화의 재발견을 견인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랐다. 야나기는 속화 또는 세화 등으로 불리던 조선 후기 그림을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그림이라는 뜻에서 ‘민화’라고 명명한 장본인이다. 그가 우리 민화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고, 한국미에 관한 그의 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로 평가하며 식민지 조선(한국)에 연민의 정을 보낸 그를 탈식민사관의 시선으로 다시 평가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 민화와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지녔다는 점에서 인도 민화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송인상 – 인도 오디아트센터 큐레이터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하여 미술관과 서예관에서 22년 동안(1987-2009) 30여회의 국내외 미술전시회를 기획했다.
2009년부터 독립큐레이터로서 인도와 한국을 오가며 전시기획 활동을 했고 2019년부터 인도 오디 아트 센타 (Odi Art Centre, Odisha, India)의 국제전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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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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