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상의 인도 민화 견문록 ② 인도 부족部族 민화 곤드(Gond)와 왈리(Warli) 페인팅

왈리페인팅 , 아닐 방가드 作
– 왈리 부족은 결혼식 때 데비초크(Dev chowk/chauk)를 벽에 그린다. 번역하면 <여신의 광장(廣場, square)>이다. 현지어 ‘chowk’는 광장으로 번역된다. 우주를 상징하는 오각형 공간 한 가운데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신 팔라가타(palaghata)가 배치되어 있다.



곤드 페인팅(Gond painting)과 왈리 페인팅(Warli painting)은 수십 종의 인도 민화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부족部族 민화다. 여기서 ‘부족’은 인도 토착 원주민을 뜻한다. 인도 부족인들은 스스로를 아디바시(Adivasi)라 부른다. 이는 호주 원주민을 지칭하는 ‘애보리진(Aborigine)’과 같은 의미다

글 송인상 (인도 오디아트센터 큐레이터)


곤드페인팅, 장가 싱 샴 作



곤드와 왈리의 부족 민화는 인도아 대륙에서 천 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그림 유물이 거의 없다. 부족의 축제나 의례에 맞춰 일회성 또는 단기간의 행사 동안에만 관습적으로 민화를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그림을 굳이 보존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그림은 현재 우리가 소유하는 개념의 미술 작품이 아닌, 부족민들의 일상적인 이벤트였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왈리 부족의 경우 결혼식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신부가 대기하는 방의 벽면에 다산과 사랑을 기원하며 도식화된 그림을 그렸고 결혼식이 지나면 그 그림들이 퇴색되도록 내버려두었다. 벽면에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종이나 천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문화적 특성상, 시간에 따라 그림이 사라져가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한 물감의 원료가 식물성이어서 보존성이 떨어졌지만, 이들은 이를 문제 삼긴커녕 당연시했다. 이런 관습에 가려져있던 인도의 부족 민화가 햇빛을 보게 된 지는 채 반세기도 되지 않는다. 벽이나 바닥에 그려지던 그림들이 캔버스와 종이로 옮겨진 시기는 곤드 페인팅의 경우 1980년대 초, 왈리 페인팅의 경우 1970년대 들어서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관습적으로 그려오던 그림과 예술로서 그린 그림은 확연히 구분된다. 당시 인도 미술계에서는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도 고유의 전통미술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 무렵, 의식 있는 미술인들이 부족 마을에 방치 되었던 색 바랜 그림들의 복원과 작품화를 꾀했다. 소질 있는 부족 작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전통 그림들을 과감히 캔버스에 옮겨 그리도록 장려했고, 미술관과 갤러리가 그 그림들에 관심을 갖도록 추동했다. 특히 곤드 페인팅과 왈리 페인팅이 앞장섰는데, 50여 년 후가 지난 지금 이 부족 민화가 인도의 대표 민화로 성장했다. 이는 20세기 초 호주 원주민 미술이 그라운드 페인팅에서 캔버스로 옮겨간 과정과 유사하다.


왈리페인팅 <왈리 마을의 일상>, 아닐 방가드 作



곤드페인팅, 두르가바이 얌 作


곤드 페인팅의 선구자 장가 싱 샴

곤드 페인팅(Gond painting)은 인도 중부의 마디아 프라데시주(Madhya Pradesh)를 중심으로 터전을 잡고 살아 온 곤드 부족部族의 민화다. 곤드(Gond)는 인도 토착언어인 드라비디안(Dravidian)의 녹색산(Kond, green mountain)에서 유래했다. 인도 전역에 칠백이 넘는 부족 가운데 독자적인 미술형식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부족이 바로 곤드 부족(Gond Tribe)이다. 이들 부족은 약 4백만 명으로 인도 부족 중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원래 이 부족민들은 좋은 이미지를 보는 것이 행운을 낳는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축제나 의례의 시기에 자신들의 몸에 문신을 하거나, 벽과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부족의 관습에 따라 자체적인 소통도구에 머물던 곤드 부족의 민화가 예술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이다. 걸출한 작가 싱 샴(Jangarh Singh Shyam, 1962–2001)이 처음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옮겨 그리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곤드 민화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장가 싱 샴은 파탄가르(Patangarh)라는 곤드 부족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버팔로 방목과 우유를 팔면서 십대 중 후반을 보냈다. 그가 속한 가문은 파르단 곤드(Pardhan Gonds)로서 곤드 부족 공동체에서 노래와 악기 연주 등을 전승하는 일을 맡았다. 그도 가문의 영향을 받아서 음악적 소질을 가졌다고 한다. 그 무렵, 당대 유명 현대미술가이자 인도 최고수준의 미술관인 보팔의 바라트 바완(Bharat Bhawan, 직역하면 ‘인도의 전당’으로 한국 예술의전당과 같은 복합아트센터이다) 관장이었던 스와미나단(Jagdish Swaminathan 1929-1994)이 곤드 마을을 방문했다가 그림 재능이 출중한 장가 싱 샴을 발견하고 그를 바라트 바완에 초대하였다. 처음에는 미술관 외벽의 벽화를 그리는 일을 주었는데, 그의 천재적 재능을 보자마자 그를 미술파트에 정규 직원으로 채용하여 곤드 페인팅에 전념토록 했다. 그의 첫 개인전도 1982년 바라트 바완에서 열어주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장가 싱 샴은 첫 곤드 페인팅의 작가로서 인도 내의 여러 전시회에 초대받으며 이름을 날렸고 1989년 국제적으로 화제였던 프랑스의 퐁피두센터 기획전 에 초대받았다. 이 전시회는 장가 싱 샴의 이름을 인도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인도 민화 전문 박물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일본의 미틸라 박물관(Mithila museum)에서 그를 초대하여 작업 공간을 제공했으며 그의 작품을 주요 소장품 목록에 올렸다. 이후 미틸라 박물관과의 인연으로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그가 두 번째로 이 박물관의 레지던스 초대를 받아 작업하던 2001년에 그는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에 인도의 피카소로 불리는 후세인(M.F Hussain)을 비롯한 인도의 미술가들이 반인권, 제3세계 작가들에 대한 착취 등을 거론하며 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객지에서 차별과 낯섦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는 설과, 자살 이유에 대해 평소 복용하던 우울증 약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본측의 주장이 엇갈렸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는 딸의 이름을 자페니 샴(Japani Shyam)으로 지을 정도로 일본에 마음을 주었으나 결국은 그는 그가 좋아하던 일본에서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가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의 사후 2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인도 주요 현대미술관에서는 장가 싱 샴의 회고전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던 바라트 바완은 현재 곤드 페인팅의 순례지가 되었다. 두 곤드 페인팅의 선구자를 길게 거론한 이유는 이들의 흔적 자체가 곤드 페인팅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장가 싱 샴이 태어나고 자란 파탄가르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가 싱 샴 동상


인간, 자연, 신이 상호 교감하는 이야기

장가 싱 샴 딸의 안내로 코로나19 펜데믹 직전에 장가 싱 샴이 태어나고 자란 파탄가르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혹시나 그의 작품 흔적이나 곤드 페인팅의 원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찾았으나 그가 살던 빈 집과 그를 기리는 동상만이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었다. 모름지기 벽에 그려졌던 곤드 민화들은 색깔 있는 진흙이나 식물성 천연물감으로 그렸을 터이니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흔적 없이 지워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곤드 페인팅의 재료는 장가 싱 샴 이후 천연안료 대신 아크릴, 로트링 펜 등으로, 벽이나 바닥은 캔버스나 종이 등으로 대치되었다. 화려한 색채, 점을 찍어 화면을 채우는 점묘법도 마찬가지다. 점묘 기법의 경우 호주 원주민 미술의 특징이기도 해서 곤드 페인팅과 호주 원주민 미술은 상호 연관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작품은 주로 부족민들의 풍습과 그들의 종교관을 반영하고 있다. 주로 일상과 관련이 있는 나무, 짐승, 강과 바다에 사는 동물, 새, 농사일, 전설, 신 등이 부족민과 동고동락하는 모습이다. 작가들은 이들 소재가 행복의 메시지가 되도록 상징성, 화면 구성, 배치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일례로,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마후아 나무(Mahua tree)를 보자. 곤드 부족들은 이 마후아 나무를 숭배하면 행운과 행복이 찾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 나무가 신상神像의 권위를 갖도록 화폭의 가운데에 화면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크게 그린다. 나뭇가지 사이에는 사람, 짐승, 새들을 넣어 이야기를 구성한다. 하나의 큰 나무가 이야기보따리를 줄줄이 달고 있는 모습이다. 감상자는 작품에 담긴 이야기와 각각의 이미지에서 나오는 좋은 에너지, 행복의 에너지를 받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곤드 민화는 인간과 자연과 신이 상호 교감하는 내용으로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이 주는 위대한 힘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곤드페인팅, 장가 싱 샴 作



곤드페인팅, 자페니 샴 作


자연의 순환 담은 왈리 페인팅

십 여 년 전 즈음으로 기억한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머물 때였다. 한 인도 친구가 근사한 레스토랑에 나를 초대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인도 전통 음식점인데 뉴델리에서 제법 유명했다. 그때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생각나질 않지만, 레스토랑 입구의 벽면 위에 걸렸던 한 미술 작품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그림 속의 사람과 동물들이 삼각형, 사각형, 원형과 같은 기하학 형태로 표현되었고, 색채도 밤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려졌는데 묘한 신비감으로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름 호기심도 생기고 궁금해서 그 레스토랑 종업원에게 물어봤으나 작품의 출처나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그 벽에 걸렸던 그림이 왈리 페인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왈리 페인팅(Warli painting)은 인도 뭄바이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서부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지역과 구자라트(Gujarat) 남부까지 뻗어서 거주하고 있는 왈리 부족의 민화(Folk painting)로, 그 정확한 기원은 없지만 인도의 암각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놀랍게도 인도 중부에 위치한 선사시대 유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빔베트카 바위 보호소(Bhimbetka rock shelters)에 그려진 그림과 상당히 유사점을 보인다. 예를 들면 선,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을 조합한 기하학적 형태로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이 비슷한데, 사람의 경우 역삼각형과 삼각형으로 몸을 단순화시켰다. 매우 기본적인 그래픽 어휘로 이는 자연을 관찰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왈리 부족은 현대 문명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농경 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추수를 마치면 연례행사처럼 곡식의 신에게 감사를 전하는 의식을 치르고 쌀가루 풀로 소똥 바른 벽에다 신을 영접하기 위한 그림을 그린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머무는 방 벽면에 다산과 행복을 기원하는 도상을 그려 넣어 장식하는 풍습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풍습이 197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운반과 소통이 가능한 종이나 캔버스에다 일상의 내용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천이나 캔버스 표면에 소똥을 바르고 그 위에 쌀가루 풀을 쑤어 그렸으나 쌀가루의 보존성 때문에 아크릴이나 포스터 칼라가 포함된 합성안료를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벽에 그릴 때 발랐던 소똥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것인데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인의 정서에 부합하면서 자연친화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모양새다. 왈리 부족의 생활 철학인 ‘자연에서 가져와서 자연에 바친다’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천연재료를 주원료로 완성된 작품은 왈리 페인팅(Warli painting)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왈리페인팅 <타르파 춤이 있는 일상>, 아닐 방가드 作



델리 국립공예박물관에서 왈리민화를 시연하고 판매하는 모습


왈리 페인팅 최초의 남성 작가, 지바 소마 마세

결혼식날의 신부와 왈리 민화

이러한 왈리 페인팅의 재발견을 주도한 작가가 지바 소마 마세(Jivya Soma Mahse 1934-2018)다. 그는 곤드 페인팅의 장가 싱 삼에 견줄 만한 왈리 페인팅의 전설이다. 그는 작가로 알려지기 전 왈리 빌리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성들만 그리도록 허용했던 혼례용 왈리 벽화의 보조자로서 틈틈이 활동했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였다. 곤드 페인팅의 장가 싱 샴처럼 그에게도 자신의 끼를 알아준 미술인이 나타난 것이다. 뭄바이 명문 J. J. School of Art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비하르주의 마두바니 민화 부흥에 기여했던 바스카르 쿨카니(Bhaskar Kulkarni)와 인도 중앙 정부의 문화 고문인 푸풀 자야카르(Pupul Jayakar)였다. 이들은 그를 델리로 초대하여 정부의 전통 토착 예술의 부흥 프로그램에 따른 전통의 확장을 조언했고, 이때 지바 소마 마세는 관습적으로 그리던 신상 그림이 아닌 일상의 소재를 작품화했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빛을 발했고, 우리가 현재 만나는 왈리 페인팅을 전형이 탄생됐다. 그는 자신이 속한 왈리 부족의 의례용 벽화나 바닥 그림을 캔버스로 옮긴 첫 번째 작가일 뿐만 아니라 여성 전유물이었던 왈리 부족 민화의 전통을 깬 최초의 남자 작가로서도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나는 왈리 부족의 전통 결혼식에 여러 차례 초대받아 갔었는데 어느 결혼식에서나 신부가 대기하는 공간이 부엌으로 이어지는 통로 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그 벽면에 도식화된 왈리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은 원래 전통 관습에서 남편이 살아있는 여성인 시바시니(Savasini)만이 그릴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남성 작가들이 작업을 주도한다고 한다. 그림은 신부와 신랑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고 다산과 번식 능력을 기원하는 여신상과 상징적 도상들이 배치되며 결혼식 하루 전에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의식 중 하나다. 요즘에도 왈리 부족의 결혼식에 필수적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실내에서 혼례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바깥마당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타르파 춤(Tarpa dance)을 춘다. 한 남성 리더가 남성을 상징하는 타르파(Tarpa) 악기를 연주하며 나서면 수십 명이 남녀가 손에 손을 잡고 원형을 그리며 춤을 춘다. 마치 우리의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키는데 자연 순환의 이치와 성적 결합의 생명력을 중시하는 왈리 부족의 세계관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부족의 결혼식은 그림, 춤, 노래가 어우러진 부족 축제가 된다. 이 타르파 춤은 왈리 페인팅의 단골 소재다.
내가 왈리 페인팅을 처음 보았을 때 왜 마음을 빼앗겼는지 되돌아보았다. 색감도 두 가지로 절제된 데다 형태도 기하학적 기본 도형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를 초월한 소통과 공감의 미학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송인상 – 인도 오디아트센터 큐레이터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하여 미술관과 서예관에서 22년 동안(1987-2009) 30여회의 국내외 미술전시회를 기획했다. 2009년부터 독립큐레이터로서 인도와 한국을 오가며 전시기획 활동을 했고 2019년부터 인도 오디 아트 센타 (Odi Art Centre, Odisha, India)의 국제전시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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