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있고 과감하게 – 전통 모티브로 창작의 문 열기

소신 있고 과감하게
전통 모티브로 창작의 문 열기

무엇을(어떤 것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창작민화가 현대미술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되기 위하여 어떤 점을 어떻게 그려야 좋은 것일까? 그리고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창작을 하려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공통된 과제이며 부담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들이 세상에 가득 차고 넘치지만, 실제 도움 받아보려고 하면 거의 다 ‘시각장애인의 코끼리 관찰기’ 같은 아리송함만을 안겨줄 뿐이어서 오히려 헷갈리게 하기 일쑤다. 그것들 위에 난해한 글 하나를 덧보태고 마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기에 극한의 긴장 속에서 이 글을 적는다. 이번에는 창작민화 연구에 한창인 화가들 작품 중에서 창작의 문 열기에 비교적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작품을 몇 점 올려놓고 위의 질문들을 향한 접근을 시도해 볼 것이다.


창작민화는 과연 무엇을(어떤 것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 걸까? 이에 관련해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으나, 이번에는 그중에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여겨지는 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바로 전통 민화 이미지를 응용하는 방법이다.
화가가 창작 의도를 품은 채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화가의 뇌리에 완성된 작품이미지 형태로 바뀌어서 떠오르게 된다.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들까지도 그렇다. 이때의 화가는 누구든지 마치 비정상적일 정도의 ‘병도 아닌 중병’ 같은 증세를 느끼면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두루 신세계를 찾아 헤맨다. 이 단계에서 민화 화가들은 다른 화가와 달라서 민화 책을 뒤적이거나 옛날 민화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굴리는 경우가
많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소신 있게 나만의 그림을 그려라

이제 소개할 현대민화 화가인 김연미도 역시 같은 병증적病症的 느낌 속에서 오리지널 책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화가 ‘김연미 대 책거리’는 이렇게 화가의 일방적 선택 속에 상대적 입장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의 책거리 그림은 아무 잘못도 없이 그저 화가의 눈에 띄었다는 죄 때문에 화가의 숲이 되고, 꽃밭이 되고, 에덴동산이 되다가 결국에는 화가에게 굴복하여 꼭꼭 숨겨두었던 신천지를 내어놓고 만다. 이 신천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책거리의 본래 성격과는 아주 달라진 것이지만, 책거리를 동기로 하여 조합되었던 작품인 만큼 상당 부분의 책거리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는 건 당연하다. 김연미의 작품에서는 책거리가 본래 지녔던 교육적이거나 장식적이었던 의미의 흔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는데 자세히 보면 역시 그렇다. 화가는 책거리에서 적당하다고 믿어지는 만큼의 분위기를 끌어오는 단계에서 엉뚱하게도 작품의 주조主調를 책거리의 본래 성격에서 벗어난 꽃밭 분위기로 바꿔버린다. 즉 화가는 책거리 이미지를 자신의 현대민화 작품 제작을 위한 도구로만 여길 뿐 본래의 책거리 의미는 간신히 냄새만 풍겨줄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화가가 책거리의 의미 쪽으로 끌려가느냐 아니면 책거리가 화가 쪽으로 끌려와 상당 부분의 해체를 통해 본래 의미와는 별개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느냐가 소재와 화가 간의 힘겨루기 한 판이라고 한다면 이번 겨루기에서는 화가의 승리다(그림1 참조). 이때의 화가는 인문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의 소양을 가진 자이므로 그의 승리는 그가 품은 소양적 의미를 포함한 승리이기 마련이다. 당연히 향후 현대미술의 전개 방향에 대한 기대치와 함께 그에 맞추는 화가의 결의까지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 힘겨루기에서 화가가 소재 앞에 무릎 꿇는 형국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특히 오랜 세월을 재현 작업의 기본기만을 익혀왔던 민화가들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 이유는 소재를 바라보면서 화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놓고 ‘과연 내가 떠올리는 이 이미지가 작품용으로 옳은 걸까?’에 대해 자신 없어 하다가 결국은 품었던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고, 지금껏 친숙했었던 이미지와 비슷한 쪽으로 마음이 끌리다가 양쪽이 다 못 미더워져서 손을 놓아 버리기 때문이다. 소재와의 기氣 싸움에서 화가가 패한 것이다. 하지만 김연미는 마음속 한쪽에서 일어나는 의구심疑懼心을 누르고, 좀 낯 뜨겁다고 느껴지는 속에서도 자신의 뇌리에 잡힌 이미지를 끝까지 붙잡고 매달려 두 개의 신세계를 얻어낸다. 화가는 이렇게 막판 굳히기 싸움에서도 보기 좋게 승리를 끌어냈다. 한 작품은 붉은 톤으로 가을이 느껴지고, 또 한 작품은 초록 톤이어서 여름을 느끼게 한다(그림2 참조). 화가는 이렇게 전통 민화 이미지를 응용하여 민화창작으로의 문 여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다. 화가가 소재 삼아 바라보는 것들은 작품 소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화가에게 뭔가를 말하기 마련인데 이럴 때 화가는(특히 창작 훈련이 덜 된 화가는) 재빨리 눈을 감아버리고 오롯이 그 말만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소재들이 던져주는 이미지를 과감하게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의 눈이나 경험들은 매우 고마운 것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이처럼 현대미술가에게 커다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새롭게 머릿속으로 생각해내는 이미지가 사실의 모양과 너무 다르다고 해서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민화는 눈으로 보는 바에 의지하는 사실주의적 미술이 아니며, 다양한 이해 불가의 불합리함을 활용하여 오히려 흉중胸中소망을 향한 합리적 접근을 즐기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 현대미술론적 접근 흔적과 민화적 고양을 갖춘 것 이면 되겠다. 그러한 적용이 자신 없으면 정확하게 안내해줄 선배를 옆에 두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자연스러운 해방’, 민화의 기본

이제 남은 궁금증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와, ‘어떤 점을 얼마만큼 그려야 좋을까’이다.
우선, 위에서 말한 방법을 따르는 것이 ‘왜 옳은가’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미술의 세 가지 요소로서의 ‘왜’는 본래가 소재 해석이나 작품 완성도까지 포함한 방법론적 이유이겠으나 오늘은 그 중 기초 방법론만을 꼬집어봄이 적당할 것 같다.
민화가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민화는 소위 정통회화라고 하는 미술보다 묘사의 세련도나 격조는 뒤떨어지지만, 익살스럽고도 소박한 형태와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구성, 아름다운 색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양식이 오히려 한국적 미의 특색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부보다는 전체가 잘 조화되어 보이는 아름다움, 그것이 민화의 위대성이다.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거칠기도 하고 서툴기도 하고 미흡한 것 같지만 그러한 것들이 같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었을 때야 민화는 민화다운 매력을 풍긴다. 사실의 모양을 생긴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대담하게 축약하면서, 데생적 완성도를 완전히 무시한듯한, 마치 초보자 그림 같이 유아틱하기까지 하며, 재미있는것은 조금 더 변형하여 과장된 재미로 특징지어 드러냄으로써 먼저는 그리는 화가의 흥미를 일으키고,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또한 그만큼 즐겁게 만들어주는 그림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리려는 대상과 그릴 때의 마음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민화에 자연스러운 해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는 화를 낼 수 없으며, 비평을 가할 여지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그림에는 규칙 같은 것이 아예 성립되지 않기 때
문이다(정병모 박사의 평소 주장을 부분 인용).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 부분 때문에 창작민화 수업 초보자에게조차 그들의 표현력이 취약한 부분을 피하고도 그럴듯한 작품을 그려낼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기도 하다.
또한, 민화다운 민화일수록 격식을 갖춘 그림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소재도 구도도 모순투성이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사람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그림에서는 이치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억지 같아도 사실은 이러한 곳에서 즐거운 아름다움이 분수처럼 샘솟는다. 민화는 당대 사람들의 집단적 가치 감정의 상징형이라는 성격으로 인간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아름다운 소망을 담은 그림이며, 넉넉한 해학이 넘치는 요소가 간직되어 있다.이러한 민화 속에는 꾸밈없고 순수하며 어린이의 꿈과도 같은 원색적인 해학적 아름다움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민화는 폭넓은 대중을 상대로 하여 미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결과물로서 일반 서민들의 미적 체험이나 세계관이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표현 형태로 드러난다. 이처럼 민화의 표현은 희로애락의 일상적 감정을 소통하게 해주는 양식이며 민화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이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점을 들어 민화를 우리 민족의 미의식과 정감이 가시적可視的으로 표현된 진정한 의미의 민족화로 보기도 한다. 물론 서민들의 일상생활 양식이라든지 관습 등의 항상성恒常性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창의성보다는 형식화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된 면도 있기는 하다. 민화 그림에서 위에 말한 ‘형식화된 유형에 따르는 인습적 계승’이라는 증거는 민화에 도안 풍의 전통 공예적인 느낌이 흐른다거나, 또는 한 가지의 밑그림으로 수많은 작품을 그려낸 것 등에서 읽을 수 있다.


오늘의 언어로 다시 표현된 전통의 소재


또 한 사람의 창작민화 화가 조하연의 그림을 보자(그림 3참조). 소재의 부분 부분이 보여주는 묘사 상태는 어린아이의 미숙한 그림을 보는 것과 거의 흡사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감이나 색의 설채設彩 감각적으로는 거의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성숙미를 보인다. 사실은 전통 민화 중 비교적 서양문화의 영향이 덜 섞인 그림들, 즉 19세기 말 이전의 민화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일반적으로 보인다. 조하연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또 한 가지의 특성은 그림의 소재 설정 및 구성에서 무엇을 설명하려는지 의도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맞다. 그림은 그 본질상 상황이나 현상 설명을 위한 용도로는 문학에 비해 효율이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설명 전달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붓을 던져버리고 펜을 잡아 원고지를 채워나가는게 훨씬 유리할 것이다. 특히 민화는 더욱더 집단적 공감대로 형성된 상징 표현에만 주력하는 미술이다. 풍속도 같은 경우의 예외가 물론 있기는 하겠으나 그것들은 민화의 영역중 가장 변두리에 위치하거나 혹독하게 구분한다면 아예 민화가 아닐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하연은 고전 민화의 친근감 발생을 위한 표현 방법론의 대표적 특성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화가라는 믿음이 간다. 여기서 두 화가의 작품들이 표현력이나 품격 면에서 얼마큼 성공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필자는 다만 다른 점들은 다 덮어놓고, 창작 민화가가 작업 방향으로 취할 중요 요인, 즉 민화 전통적 맥락의 느낌과 함께 이 시대 기법적 트렌드로서의 어법 사용이 긍정적인 작품들을 선택한 것이다.
작품을 하나 더 보자. 역시 조하연의 것이다. 제목이 ‘봄날의 향연’이라고 붙어있다. 그러나 오늘은 제목의 뜻에 별로 관심 가질 않는다(그림4 참조). 다만, 데생적 균형감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것 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전체 화면의 주인공이 되어 앉아 있다. 그 모습이 과거의 호랑이 그림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양반다리를 한 자세이고, 그를 위해 수많은 꽃이 장식되어 있고, 몇 마리의 작은 새와 나비가 한가롭게 날거나 앉아 있다. 한눈에 보아도 화가의 제작 의도는 관람자의 평안과 기쁨의 증폭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화가는 호랑이다움(용맹 또는 힘)을 이용한 현상이나 상황 인식을 꾀하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미 알듯이 본래의 민화 호랑이는 액막이를 위한 벽사 용 그림이었기에 대부분 호랑이의 모습 속에 많거나 적게 호랑이다움의 기운이 남아있다. 그러나 조하연의 호랑이 그림에서는 그런 목적이 전혀 읽히지 않는다. 더 유아틱한 발상의 상징성에 맞춘 호랑이이며, 나머지 역할의 몫은 꽃을 이용해서 그 상징적 느낌을 돋우려는 것임
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상징’은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민화 호랑이는 맹호가 아니라, 사람들과 친구 같은 가까움을 담보하는 모습이었으며 그것을 세시에 ‘액막이’로 썼다. 그 액막이라는 뜻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그 가정의 행복추구용 도구이다. 이 점은 이미 우리 민족적 공감대가 보편적으로 형성된 내용이다. 그렇다면 벽사 邪 의미도 역시 길상吉祥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 민화가는 길상적吉祥的 의미에 더 주력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본다면 조하연이 가진 길상 모색 개념은 옛날에 호랑이를 이용하여 길상 희구에 관련한 만족을 만들어내던 것에 비해 큰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차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려라


그렇다면, 창작민화를 위해 전통 민화의 이미지를 따올 때는 해당 오리지널 이미지의 주체적 중심 뜻을 현대적 의미로 번안함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만큼이면 족할 것이다. 그 양이 과하면 진부하거나 올드해질 수 있다. 이때 화가를 괴롭히는 요인은 자신이 그리게 될 그림이 작품 소재로 삼았던 전래민화 이미지와 상당히 달라짐으로 인한 염려와 걱정일텐데, 어차피 전승 예술은 창작 예술이 떼어내 버리고 싶은 거북한 상대이고, 창작 예술은 그 반대로 변화 없는 전승 예술이 답답하고 갑갑하게 느껴질 것인데, 그것은 서로의 속성상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밖에 없을 테니 어느 쪽이든 한 길을 택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창작을 하려면, 새로움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가치가 위에 말한 염려나 걱정을 일으키는 갈등적 의미보다 한참이나 긴급하고 우월한 것이므로 과감하게 창작세계의 문을 열어야만 한다.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은 현대적 트렌드에 관련해서도 ‘트렌드’라는 사전적 용어의 뜻만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미술사적 입장의 트렌드를 따라야 할 일일 것이다. 즉 트렌드의 사전적 의미는 ‘추세’ 또는 ‘유행’이기에 사전적 의미만을 따르게 된다면 미술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즘의 문화적 추세(유행)가 팝pop적인 경향이 크다고 해서 팝 아트pop art의 속성을 민화와 콜라보하려는 경향에 마음 빼앗기기 쉬운데, 사실 팝의 기본 논리는 세상 문화를 향한 이유 있는 비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구체적인 내용은 지난 컬럼들을 통해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민화는 어떤 의미로도 현실비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 전혀 하지 않는다. 민중의 대변자가 되어 양반을 책망하는 듯한 모양의 은유隱喩가 더러 있으나 그 또한 비판이기보다는 해학적 비꼼이다. 어떤 누구도, 잘 잘못도 비판하지 않는 ‘조건 없는 이웃 사랑’이 진정한 민화의 참뜻이니 이 부분은 매우 깊은 묵상과 성찰을 거친 후에야 자신 작업에의 영입여부를 정할 일이 아닐까 싶다.
요즘에 재현민화까지도 발표작들 대부분이 서구화되어 구체적 사실주의풍으로 묘사 방법이 바뀌어 버린 듯한 경향을 보이나, 정작 그 문화가 번성했던 서양에서는 이미 사실주의가 현대미술의 풍조 속에서 뒤로 물러가고,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를 넘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한 마디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담론이 혼재하는 양상의 미술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민화의 표현 철학근간이 서양의 케케묵은 것과 완전히 바뀌어 가는 것만 같아 불안하기까지 하다. 서양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좋다고 끌어 않는것과 같다고나 할까? 서양문화를 받아 들인지 불과 얼마 안 된 역사가 이처럼 몹쓸 장난을 쳐 놓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의 팁이 읽힌다. 그것은 우리 민화가 서양 바람에 휘둘리기 전, 즉 19세기 중엽까지의 것들은 상당 부분의 사실 모양을 축약 또는 무시하고,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과도 같이 소재의 상징과 특징만을 따다가 그렸었는데, 그 점이 오늘날의 현대미술 성향과 비슷하여 사람들이 말하길 옛날 민화가 마치 현대미술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민화에 종사하는 우리는 이부분에 더욱 초점을 맞춰 연구하여 창작시대를 열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계속>


글 정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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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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