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歲畫란 무엇인가?

월간<민화> 새해맞이 특별 세화전 <물렀거라, 歲畫 나가신다>와 관련하여 김용권 겸재정선미술관 관장과 유정서 월간<민화> 발행인이 지난 1월 18일 대담 형식으로 세화특강을 진행했다. 행사의 운영위원장이자 특강을 진행한 김용권 관장은 우리나라 세화 연구의 손꼽히는 권위자로, 대담을 통해 세화에 대한 지식을 유감없이 풀어냈다. 세화의 정의부터 세화가 민화로 변모하는 과정까지, 세화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하여.

진행   유정서 월간<민화> 발행인
특강   김용권 겸재정선미술관 관장
정리   김송희 기자
사진   이주용 기자


유정서
김용권 관장님 안녕하십니까.
세화에 대한 특강에 앞서 이번 세화전을 처음 기획하고, 진행에 깊이 관여한 운영위원장으로서 행사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김용권
민화 작가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가 반가웠습니다.
출품된 작품 수준도 평균 이상이었으며, 흥미롭고 격조 높은 작품이 대거 출품되어 놀라웠습니다. 다만 이번 세화전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들도 더러 있어 기획자로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모든 민화의 제재는 세화가 될 수 있고, 작가가 작품에 세화의 메시지를 담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새해맞이 특별 세화전은 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보편적인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의도로 기획했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정서
긍정적인 면과 아쉬운 면이 공존한다는 말씀인데요.
그렇다면 앞으로 세화전을 어떤 방향으로 진행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용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매년 세화전을 정기적으로 개최해 민화의 원류로서의 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가고자 합니다. 세화전을 통해 세화의 진화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현대 민화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넓혀 나가고자 합니다.
다음으로는 세화가 어떤 그림이며, 어떤 내용이 담겨져야 하는지, 그리고 민화에서 세화가 어떤 위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세화의 정체성을 모든 작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 이론적 강의를 정기적으로 펼쳐 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민화의 발전과정

유정서
앞서 이번에 출품된 작품 중 일부는 세화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세화가 어떤 그림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본격적으로 세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데요. 어느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문배도

김용권
세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 앞서 민화의 발전과정을 먼저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일단 문배와 세화, 그리고 민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문배→세화→민화’로 연결되는 순차적 전후 관계에 주목해야 하는데요.
문배는 벽사적 의미에 송축하는 길상성이 더해져 확산, 변화되며 점차 세화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그 기능이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조선 후기에 집안 전체를 치장하는 그림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죠. 이른바 조선 후기의 민화는 문뿐만 아니라 집안이나 가구를 비롯한 출입문, 우물, 굴뚝, 아궁이, 변소 등 붙여지는 곳이 대폭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 내용도 벽사적, 길상적, 감계적, 감상적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상징에서 벗어나 그저 장식적인 것으로 그려져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유정서
세화가 민화에 앞서 유행했던 그림이란 점이 흥미롭습니다.
세화를 민화의 아버지 격이라 표현하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면 세화에 앞서 존재했던 문배라는 그림 형식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해주시지요.

김용권
간단하게 문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모든 것이 문門을 통해 들어오거나 나갑니다.
문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죠. 그런 생각아래 우리 선조들은 건강과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문 앞에서 여러 가지 제의적 성격을 가진 행위를 벌이거나 문에 특별한 사물을 설치해 왔습니다. 문배는 바로 이와 같은 문으로 나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던 그림인 것이죠.


세화와 관련된 풍속

유정서
그렇다면 이제 세화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세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이었나요?

수성노인

김용권
세화란 새해 설날을 맞이하면서 1년 동안 가내가 무고하고, 집안이 번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 또는 문설주에 붙였던 것을 말합니다. 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기에 연하장과 부적의 용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연말연시가 되면 평소 친분 있는 사람에게 연하장을 돌리듯, 조선시대 말까지는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세화를 돌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우선 궁중에서는 새해가 다가오면 도화서에서 수성노인, 선녀, 신장, 호랑이, 닭 그림 등을 그려 왕에게 바치면, 왕이 왕족이나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각 지방의 관아에서도 역시 이런 그림을 그려 관원끼리 서로 교환했고, 여염집에서도 서로 선물하며 집안에 붙이곤 했습니다. 이런 그림이 바로 ‘세화’이며, ‘설 그림’이라고도 부릅니다.


유정서
세화를 특별한 절기와 관련 있는 세시풍속 중 하나라고 보아도 되겠군요?

김용권
당연히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설날에는 차례茶禮, 세배歲拜, 세장歲粧, 세찬歲饌, 세주歲酒 등을 비롯하여 복조리 걸기, 야광귀夜光鬼 쫓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다양한 행사를 했는데 세화 역시 그와 같은 행사 중 하나로, 정월 초하루 날 이른 새벽에 대문에 각종 그림을 붙여서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했던 겁니다.


궁궐 및 궁중에서의 세화

유정서
앞서 세화가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풍습이라고 하셨는데요.
문화의 성격상 출발점은 지배층, 특히 궁중일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궁궐에서 세화를 언제, 어떻게 생산해 사용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김용권
말씀하신대로 세화는 궁중의 중요한 풍습이었습니다.
세밑에 세화를 그리는 것은 궁중 소속 화원인 도화서 화원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 초부터 매년 12월 20일경 수십 점씩 세화를 그려내도록 해 왕에게 바치면, 왕은 그것을 왕실에 충성한 집안이나 관리, 공직자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고려 말의 이색(1328~1396년)이나 조선 초의 성현(1439~1504년), 그리고 조선 후기의 채제공(1720~1799년), 양주익(1722~1802년) 등이 왕으로부터 세화를 하사받고 은혜에 감격해 글을 지어 남기기도 했습니다.

유정서
도화서 화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일 만큼 세화가 많이 그려졌군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이 그려졌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김용권
관련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에는 세화를 60장 가량 제작해 궁궐에서 쓰기도 하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으나, 중종(16세기) 때에 들어서면서 신하에게 내리는 것만 해도 한 사람당 20장씩으로 꽤 막대한 양이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양을 제작하는 데 3개월가량 걸렸다는 기록도 확인됩니다.
그 이야기는 연초에 쓸 세화를 가을부터 그려야 했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런데 당시에는 종이나 붓, 안료 등이 귀했기 때문에 때로는 세화의 진상을 중지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세화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세화에 대한 기록

유정서
규제를 운운할 정도로 궁중에서 세화가 인기를 끌었군요.
말씀을 들어보니 세화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세화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문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세화



김용권
세화라는 명칭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고려 말의 유명한 문신인 이색의 문집 《목은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색은 《목은집》에서 왕으로부터 받은 <세화십장생도>에 대한 찬문을 병중에 쾌유와 장생을 바라며 세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미루어 봤을 때 세화가 고려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도상 또한 줄곧 유전되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세시풍속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조선시대로 추정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경도잡지》, 《육전조례》 등 여러 문헌을 통해 명확히 밝혀낼 수 있습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초 태종 8년(1408년)에 ‘국상 기간 동안이므로 3년간 세화 제작을 금하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부터 세화의 제작이 매년 관습적이고 제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는 매우 주목할 만한 기록입니다. 이후 성종 14년(1483년)의 기록, 연산군 2년(1496년), 11년(1505년)의 기록, 중종 5년(1510년), 32년(1537년)의 기록, 현종 10년(1667년)의 기록, 숙종 2년(1676년), 12년(1686년)의 기록 등에서도 세화가 관습적으로 꾸준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의 모습

유정서
문헌기록에 따르면 세화는 멀리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대단하고 오랜 풍습이었군요?

김용권
그렇습니다. 세화는 조선시대에도 궁궐의 중요한 신년풍습으로 후기까지 꾸준히 유지되었습니다. 예컨대 1867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세화는 자비대령화원이 각 30장, 본서 화원이 각 20장을 12월 20일에 봉진하여야 한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지요. 이런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조선 후기 설날 아침 골목에는 온통 <처용 그림>, <닭 그림>, <호랑이 그림> 등이 붙여져 전시장으로 변했을 것이며, 나쁜 잡귀들은 얼씬거리기 어려웠을 겁니다.


서민계층의 세화 풍습

유정서
이제까지 궁궐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 이를테면 왕경사대부 계층에서 향유된 세화 풍습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이런 풍습이 언제부터 일반 서민계층으로까지 퍼져나가 온 나라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을까요?

김용권
세화 풍습이 일반 서민계층까지 퍼져나간 것은 조선 중기부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새해가 되면 여염집 안팎에도 세화가 붙여져 행복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당시 세화 수요층은 서울에 사는 양반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점차 재력 있는 중인 계층과 부유한 평민계층으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천민층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여러 관가와 척리의 문짝에도 모두 이것들을 붙이고 여염집에서도 모두 이를 본뜬다’는 내용과 함께 ‘설날 도화서에서 세화의 표본을 그려 전시하면 시골 환장이들이 운집하여 본떠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에서 지방 읍면으로, 읍면에서 고을로 점차 확대되었으며 사찰과 정자 건물에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홍만선(1643~1715년)의 《산림경제》에는 병풍을 결혼 혼수품 또는 생활필수품의 하나로 분류해 놓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문건(1459~1567년)이 1546년 이후 성주에 귀향 가서 적은 《묵재일기》에는 민간에서의 세화 풍습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문건은 12년 동안 매년 제석 15일 전부터 세화를 직접 그려 정초 새벽에 문에 붙였다가 보름 후에 떼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중기부터는 일반 평민들도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것이 초하루 설 풍속에서 큰 일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화의 소재

유정서
세화가 궁궐과 사대부가의 담장을 넘어 서민계층의 여염집까지 퍼지면서
조선 사회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이 된 것이군요. 그렇다면 이제 세화라는 그림의 내용에 대해
알아볼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세화에는 어떤 것들이 주요 소재로 사용되었을까요?

김용권
세화에는 종규나 신다와 울루, 신장, 처용, 선녀, 산신, 수성노인 등의 인물상과 호랑이, 용, 닭, 십장생 등의 동물상 등이 주로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세화의 소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확대되어 다양한 도상으로 발전했습니다.
세종 2년(1456년)에 사농공상 사민의 연중행사와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을 세화로 사용했다는 기사가 있기도 하고, 중종 5년(1510년)에 화훼, 인물, 누각을 세화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선조 때(1567~1608년/재위)의 박미(1592~1645년)는 열 폭 짜리 <모란병풍>과 작은 열 폭 짜리 병풍으로 된 <화조 그림>, <십장생 그림> 등을 모두 세화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중에서 <금강산 그림>과 <관동팔경 그림>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으며 그림뿐 아니라 글자로 써서 붙이기도 했습니다.

유정서
사실상 세화의 소재가 아닌 것이 없는 셈이네요?

김용권
사실상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에 따라 많은 변화가 수반됩니다.
소재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사라진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벽사신인 처용과 사민도 같은 제재는 후대에 실용성이 없어지면서 사라졌습니다.
또한 고대의 대표적인 방위신인 사신, 즉 청룡·백호·주작·현무가 세화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주작은 기린 또는 봉황으로, 현무는 거북으로 변형시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화는 고정된 도상이 있으면서도 다양한 제재를 상당수 포함시키기도 했으며 글씨를 비롯해 일반회화로 분류된 그림들까지 일부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수요층이 점점 많아지면서 나타난 결과로 보이며, 이 소재들이 낱장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병풍 형태로도 그려져 사용된 흔적도 확인됩니다.

유정서
이렇게 소재가 다양해지면, 상징의 폭도 넓어지면서 흔히 용도와 기능에도
변화가 생기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혹시 세화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까?

김용권
세화 또한 시대가 지나오면서 설날 풍습을 넘어 매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세화는 설뿐만 아니라 보름, 단오, 추석 등의 연중행사에 예禮를 올리고 잡귀의 침입을 막아 주는 부적 또는 각종 의례나 병의 완치 및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세화의 제재는 파종에서 수확까지 계절에 따른 여러 계절제(풍백, 우사, 운사, 주곡)에도 빠지지 않고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세화는 국가의례(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 평생의례(관례, 혼례, 상례, 제례), 종교의례(무교, 불교, 유교, 도교) 등에 병풍으로 그려져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세화는 1년 12달 내내 액을 방지하고 풍요와 건강이라는 삶의 요건을 새롭게 추구하는 풍속에도 반복적으로 그려지고 붙여졌습니다.

유정서
요약하자면 설날 풍습을 넘어 단오, 추석 같은 중요 명절에도 사용되었고, 더 나아가 특별한 절기와 관계없이 일 년 내내 벽사초복의 용도로도 두루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상 세화 자체가 민화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다. 세화를 민화의 원류 또는 민화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그런 것이겠군요.

김용권
그렇죠. 궁중의 세화가 민간에 확산되는 가운데 그 내용이 다양해지면서 민화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화는 전승되어 오면서 근본적으로 대중의 취향과 속성을 반영하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민화는 무교를 비롯한 불교, 유교, 도교 등 종교적, 학문적 제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민화는 생활 주변 및 현실의 모든 물상들을 제한 없이 선택하여 소재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상의 내용, 전설과 설화 등의 내용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소재나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그저 장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죠.


세화가 민화로 변모하는 과정

까치호랑이

유정서
세화가 발전, 변모하면서 민화가 되었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세화가
민화로 변모하는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김용권
민화는 일반 대중들의 일상 생활사의 면모를 시각적으로 기호화한 아이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콘의 세계에는 무수한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습니다. 일상생활과 그들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과거의 경험과 미래에 대한 기대치에 합당하다면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상층 문화였던 세화가 하층 문화인 민화로 변모하는 과정은 다섯 가지로 구분해 살필 수 있습니다. 첫째, 조선후기는 경제력 상승으로 사치소비성향이 조장되었습니다. 둘째, 조선후기는 신분제도의 와해로 상층문화의 저변화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셋째, 중인계층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넷째, 당시에는 청과의 관계개선으로 청문화의 적극적인 유입이 있었습니다. 다섯째, 민화와 같은 민간 그림의 활성화는 동아시아의 공통된 특징으로 이런 배경에는 인쇄술 발달이 한몫 했습니다.

유정서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이번 대담으로 인해 세화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오늘 나눈 이야기를 기반으로 내년 세화전에서는 올해보다 훨씬 세화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마지막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용권
세화전은 우리 삶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세화는 우리에게 힘을 보충해 주는 효능 좋은 약초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1년 신축년, 민화인들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종식되어 평범한 일상을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대담은 영상 촬영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촬영된 영상은 월간<민화>
유튜브(youtube.com/c/월간민화)와 네이버 밴드 ‘민화구곡’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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