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희 문화캐스터가 전하는 전승공예의 가치 ㉒
한국 현대공예교육의 선구자, 금속공예작가 유리지

한국 현대 금속공예 발전에 헌신한 故유리지를 만나다

우리나라 현대 금속공예 발전에 헌신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금속공예작가 유리지(1945-2013)를 기리는 전시가 서울 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 가운데 유리지 작가의 여동생인 유자야(現 유리지 공예관 관장) 씨와 그의 제자였던 서울공예박물관의 이소현 학예연구사와 함께 유리지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글 서주희 (문화캐스터)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제공


이름 명名, 기릴 예譽. 누군가를 기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린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누가 누구의 이름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기리는가. 강물이 흐르면 강기슭의 형상이 변화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을 기리는 ‘명예’라는 가치 또한 시대 인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명예는 고정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 금속공예 발전에 헌신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금속공예작가 유리지(1945-2013)를 기리는 전시가 서울 공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유리지 작가는 한국 현대공예를 대표하는 1세대 작가로서 1970년대 미국 유학 이후 우리나라 현대 금속공예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 크게 기여한 공예가이자 교육자, 미술관 인으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유영국(1916-2002) 화백의 장녀이기도 하다.
2013년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유족은 숙고 끝에 총 126건 327점(37억 28백만원 상당)에 이르는 작품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함과 동시에 기증 특별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번 기증 특별전은 유리지 작가의 위상과 그가 남긴 여러 작품과 자료의 가치에 주목해온 유족과 여러 관계자의 노력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유리지 작가의 여동생인 유자야(現 유리지 공예관 관장) 씨와 그의 제자였던 서울공예박물관의 이소현 학예연구사와 함께 유리지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자야(現 유리지 공예관 관장, 여동생), 서울공예박물관 이소현 학예연구사 ⓒ서주희


사랑하는 언니를 기리며 동생 자야가

“작업에만 몰두했던 언니가 안타까워서 그런 언니의 노력이 영구적으로 보존되고, 예술로서의 공예가 아닌 생활로서의 공예로 어떻게 응용되었는지… 사례 차원에서 알려지고 연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기증하게 되었어요.”

사랑하는 언니에게 동생 자야가 언니를 기리며, 1977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리지(1945-2013)는 금속공예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현대 금속공예의 저변을 넓힌 인물이다. 우리나라 1세대 추상화가 유영국 화백의 장녀로 광복되던 해에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진 그는 1964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진학해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Tyler School of Art, Temple University)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배우고 돌아와 선구적인 금속공예 작품들을 선보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 3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고 말년에는 국내 최초로 현대 금속공예를 소개하는 치우금속공예관(現 유리지공예관)을 설립하여 공예문화 확산에 이바지했다. 우리나라 대학 공예교육에서 유리지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를 결코 작지 않다.
1960년을 전후하여 서양의 공예교육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도자공예 교육자들을 주축으로 우리나라 대학의 현대 공예교육이 시작되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서울대학교의 공예교육은 겨우 제작 개념을 도입했으나, 실상 제작 실습교육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리지는 응용미술과 안에 공예와 디자인 개념이 혼재된 상황에서 금속공예를 배웠으며, 교과과정을 통해 경험한 공예 기술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주로 외부에 제작을 의뢰하는 ‘발주공예’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 미국 대학의 공예교육은 1940년대 제대군인원호법의 제정에 힘입어 빠르게 자리 잡았고, 대학에 정착한 공예가들은 순수미술을 향한 작가의식을 발동시켰다고 전해진다. 그가 유학한 템플대학교 타일러미술대학의 금속공예교육은 스탠리 레친이 이끌었는데, 그는 기술 중심교육을 추구하는 엄격한 교육자였다. 미국의 대학원에 입학해서야 비로소 재료와 기술을 대면한 유리지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제작기법을 익히고 사물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그는 미국에서 성취한 노력의 결실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에서 공예교육을 담당해 신재료를 바탕으로 신기술 중심의 수업을 진행하는 한편 미국의 현대공예를 우리나라에 소개했다. 유리지의 귀국 전후로 미국과 유럽에서 기술교육을 받은 유학세대가 대학의 교편을 잡는 일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나라 금속공예 실기교육이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들의 활약은 당시 우리나라 공예분야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실기 수업이 미비했던 대학 교육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유리지 작가만큼이나 그의 동생 유자야(現 유리지 공예관 관장) 역시 성신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파슨스 패션디자인스쿨을 거쳐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학교인 아르데코(ENSAD)를 수석 졸업한 재원으로 한국에 돌아와 교직생활을 거쳐 언니(유리지)의 권유로 은기제작(3년), 보석공예작업(前고은보석대표, 24년)에 함께 하면서 금속공예의 저변을 넓혀나갔다.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다면 언니와 저, 둘 다 유학생활은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아버지도 작품이 팔리기 시작한 때가 80년대부터였거든요. 그전까지는 울진에서 두 분이 양조장을 경영하며 살림을 꾸려나가셨죠.”


1 유리지 작가가 아버지 유영국 화백을 위해 제작한 지팡이, 1977, 은(92.5), 화류목, 데를린, 85×11×3.5㎝,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소장
2 향로와 잔, 1978–79, 은(97), 향로-26×18×16㎝, 잔-6×13.5×10㎝
3 십장생과의 여행-수·수(水·壽), 2007, 은(92.5), 여산 석회석, 29.5×47.8×23.8㎝
4 황금잔, 1995, 금(22K)
5 유수(流水), 2010, 은(92.5), 금부, 호두나무, 옻칠, 접시-6×50.5×27, 6×54.2×28, 화병-18×17×15㎝
6 골호 (유리지 작가가 원숭이 띠인 어머니(김기순 여사, 올해 나이 103세)를 위해 제작), 2002, 은(92.5), 여산 석회석, 23×23×32㎝
7 유리지와 유자야의 합작품, 튤립 다기세트, 1988, 은(99), 칠보


작품으로 효도했던 언니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유영국 화백은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특히 좋아하는 작가이자 故이건희 회장의 컬렉션에 그의 작품이 많이 포함돼있다고 알려졌다. 1916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추상미술을 공부했고 해방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 경북 울진의 아름다운 산과 자연을 화폭에 담아 한국의 추상화를 알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의 삶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그림 대신 고기잡이 어선을 몰기도 했으며 소주를 제조하는 양조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시 붓을 잡으시게 된 때가 48살 무렵이에요. 개인전도 하셨고, 굉장히 절제된 삶을 사셨어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요.”
작업에 몰두하는 언니를 대신해 부모님을 돌보는 일은 늘 둘째 딸(유자야)의 몫이었다.
“편찮으신 아버지,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살피는 일은 늘 제 몫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작업에만 몰두했던 언니가 병상에 오래 누워계신 아버지를 위해 미국 유학시절 기숙사에서 배운 요리라면서 살코기와 야채를 넣고 푹 끓인 미국식 닭죽을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 그 맛이 생각나요.
언니는 부모님을 위해 작품으로 효도를 더 많이 했어요.”
그는 2000년대 초반 아버지 유영국 화백의 죽음을 준비하며 장례의식을 위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아름다운 삶을 위해 죽음의 아름다운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거꾸로 죽음의 의미를 들여다봤을 때 인간의 삶이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금속, 석재, 목재 등 다양한 재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골함과 향로, 촛대, 사리함, 상여 등을 제작했다.
“언니가 직접 디자인해 소목장에게 의뢰해 제작한 상여예요. 실제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사용했고요. 언니를 떠나보낼 때도 이 상여에 실려 보냈죠.”


유리지 작가가 부모님을 위해 제작한 상여. 너도 밤나무, 홍송, 은행나무, 백동, 황동, 견, 단청, 아크릴 물감, 113(h)×240×6㎝, 아버지(유영국)와 유리지 작가, 모두 이 상여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차가운 금속에 삶의 풍요로움을 더하다

화가인 부친이 그에게 미술을 권유하면서 남긴 말은 “미술을 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가꿔가라”는 말이었다. 공예가로 살아오면서 그는 공예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으며 삶을 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 장신구를 비롯해 기념패, 트로피 등 작은 조형물부터 환경조형물, 공공조형물까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유리지 선생님은 매사 완벽한 분이셨지만 이면에는 따뜻함을 간직한 분이셨어요. 학창시절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고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서울공예박물관 전시기획과의 이소현 학예연구사는 이번 기증특별전을 준비하며 “지난날 스승님과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평생 하나의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 그 풍경 안에는 시간의 흐름을 견뎌온 작가의 강인한 생명력이 담겨 있기에 비록 우리 곁에 그가 없어도 그가 남긴 아름다운 작품이 있어 잠시나마 그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는 공예를 기반으로 해서 다양한 문화로 거듭 재현되는 것이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문화의 새로운 변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존중되어야 하고 공예는 지속 발전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문화의 기원, 즉 원형을 만들고 이어가고 있는 여러 공예가들에 대한 존중과 그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는 것을 한국 현대 금속공예의 선구자 유리지 작가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서주희 | 문화캐스터/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대학 겸임교수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유산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6년부터 국립무형유산원의 무형문화재 대담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해왔으며
KBS World Radio(국제 방송)를 통해 해외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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