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희 문화캐스터가 전하는 전승공예의 가치 ⑦
국가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 모시 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진실한 옷 ‘한국의 모시’가 우리만의 문화가 아닌 세계의 문화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입술이 부르트고 입술에 굳은살 박이면서까지 모시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던 한산 지역 여인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끈기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 국가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 모시 짜기 기능보유자 방연옥 장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글·사진 서주희 (문화캐스터)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 이육사 <청포도>


이 시에서 화자가 오래도록 간절히 기다리던 손님에게 내어드리려 준비해놓은 ‘하이얀 모시수건’은 순수하고 지고지순한 정성의 마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모시는 색깔이 백옥처럼 희고 맑아서 예로부터 단아함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옷감으로 여겨졌다. 모시는 가볍고 까슬까슬하여 몸에 붙지 않고 통풍이 잘 된다는 장점이 있어 고온다습한 한국 여름 날씨에 적합한 옷감이다.
잘 구겨지고 손질하기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순백색 모시의 섬세함과 단아함은 옷을 지었을 때 우아한 느낌을 주어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모시를 짜는 길쌈 문화에는 ‘고생을 이고, 엮고, 짊어지는 여인사’라는 말이 담겨 있을 만큼 옛 여인들의 공동체 문화와 생계를 위한 여성들의 강인한 삶의 의지가 담겨 있다.

김홍도, <풍속도첩> 中 길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

한국모시의 시작

모시풀

《춘향전春香傳》에 보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여 옥에 갇힌 춘향이가 거지 차림새로 꾸미고 돌아온 이도령을 보고 놀라 탄식하면서 “어머님, 나 죽은 후에라도 원怨이나 없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입던 비단 장옷 봉장 안에 들었으니 그 옷 내어 팔아다가 한산 모시 바꾸어서 물색 곱게 도포 짓고, 백방수주白紡水紬 진 치마를 되는대로 팔아다가 관망冠網 신발 사드리고…”하며 이도령을 멋지게 꾸며주라 당부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신의 비단 장옷을 팔아 한산 모시로 바꾸라 하는 것을 보아 한산 모시가 당시 전국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던 특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산 지역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때 충청남도 서천에 사는 한 노인이 한산면 건지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보니 그 껍질이 늘씬하고 보들보들하여 실을 뽑아 베를 짰다고 한다. 이것이 한산 모시의 시작이자 한국 모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한산 지역 모시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대에 ‘광폭세포廣幅細布’를 지었다는 기록을 비롯해 조선시대 예종 1년(1469년)에 임천과 한산의 생저生苧를 토산품 공물로 상정한 것, 《택리지擇里志》(1751년) <복거총론卜居總論>에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과 한산의 모시밭, 안동과 예안의 왕골논”에 관한 기록 등은 오래전부터 한산 모시가 지역특산물로 유명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히 18~19세기에는 충청도 저산팔읍(한산, 서천, 비인, 임천, 홍산, 남포, 보령, 정산)에서 생산된 모시가 많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세모시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이다.

숨길 만큼 고되고 힘든 일

숨길 만큼 고되고 힘든 일, 그것이 바로 모시 짜는 일이다. 모시의 본고장 서천의 여인들에게 모시는 그저 삶이었다. 요즘은 일곱 살 되기도 전에 한글부터(혹은 영어부터) 배우지만, 그들은 모시 짜는 것부터 배웠다. 낮에는 밭을 매던 어머니가 밤이 되면 모시를 짰고, 그 어머니를 보고 자란 딸들도 자연스레 모시를 짜게 되었다.
“옛날에는 시어머니가 모시 삼는 걸 숨겼어요. 며느리가 시집 안 올까봐.”
방연옥 장인의 어머니 역시 모시를 째고 삼는 길쌈이 지긋지긋해 딸들에게 안 시키려고 했지만 딸들이 보고 자란 건 오직 모시 짜는 일뿐이었다.
“어머니가 마흔넷에 나를 낳았어요. 여섯 살 때까지 엄마 젖을 빨았대. 그때 엄마 젖 먹어가면서 옆으로 고개 돌려 모시 짜는 거 보면서 배우기 시작했다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
모시 짜는 어머니 옆에서 자란 그녀는 여섯 살 때 이미 바디 꿰기를 할 정도로 모시에 익숙했다. 할머니는 담뱃대로 어린 그녀의 머리를 치며 “힘든 일을 왜 일찍부터 배우려 하냐”며 야단을 치기도 했었다. 가난이 싫어 부자가 되고 싶었던 장인은 값비싼 모시를 짜 내다 팔면 평생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스물아홉 살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서천의 산골마을에서 한산면으로 시집을 왔다. 집에서 짠 모시를 시어머니와 함께 팔러 가던 어느 날 모시 장 근처에서 한 노인이 혼자 모시 내는 것이 안쓰러워 잠시 들어가 거들어 준 일이 있었다. 그 노인이 거들어준 것에 감동해 “모시에 손대는 걸 보니 소질이 있어 보이네. 젊은 새댁이 솜씨가 아주 좋아”하며 “나와 함께 일하면 문화재가 될 수 있는데 해볼려?”했다는 것이다. 그 노인은 바로 1967년 한산 모시 짜기의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문정옥 장인이었다.
“그때는 인간문화재가 뭔지도 몰랐어요. 집에 와서 신랑한테 이야기했더니, 우리 집 아저씨가 그 좋은 걸 왜 안 하느냐며 얼른 가서 하겠다고 하라고 하데…”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승낙을 받고 모시 일을 다시 배우게 되었고 문정옥 선생 밑에서 모시 짜기를 계속한 끝에 1990년 마침내 스승의 뒤를 이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다.

(위) 모시올을 한 올씩 가져다 침을 묻혀 치맛자락, 바짓단 걷어 올리고 무릎에 대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하는 ‘모시 삼기’를 하고 있다.
(아래) 나무 바디에 실 끼우기

비단보다 귀한 옷감 모시

모시는 온전히 수작업으로만 제작되기 때문에 그만큼 귀한 옷감으로 예로부터 쌀과 함께 화폐 대용으로 쓰였다. 모시가 가장 빛을 발했던 고려시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사람들이 정해진 점포 없이 낮에 시장을 벌여 물물교환을 하는데, 돈을 쓰지 않고 모시와 은으로 가치를 매기고 일상생활에 쓰는 작은 물건이어서 모시나 은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은 쌀로 계산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말[馬], 인삼人蔘과 함께 중국과의 3대 교역 물품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모시가 화폐이자 중요 무역 물품이었기 때문에 고려에서 중국으로 가는 왕족들이 모시를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아 생필품을 구매하는 상황도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고운 모시를 보면 잠자리 날개 같다고 하잖아요.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갈 만큼 워낙 가늘고 세밀하니까. 옷 해놓으면 고운 맵시가 나서 그래요.”
그런데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잠자리 날개가 아닌 ‘매미 날개[蟬翼]’로 묘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충렬왕의 제1왕비인 원元 출신 원성공주元成公主(제국대장 공주, 1259~1297)가 비구니로부터 흰모시[白苧]를 선물 받았는데 이 모시에 대하여 “곱기가 매미 날개 같고 어지러이 무늬가 있다”고 하였다. 잠자리 날개이든 매미 날개이든 이러한 표현은 한국의 모시가 고대부터 매우 곱게 직조할 수 있었음을 드러낸다. 사실 위에서 매미 날개로 표현한 모시는 요즘의 모시와는 조금 다르다. ‘어지러이 무늬가 있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고려시대의 모시는 무늬를 표현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직조되는 모시는 무늬를 표현할 수 없는 기본 조직인 평직平織으로 짠다.
“옛날 어른들이 모시 매면서 속이 다 까맣게 탄다고 할 만큼 모시 제작과정은 참 복잡해요. 모시를 가늘게 쪼갤 때는 입술이 부르트고 쓰라려서 밥을 잘 못 먹었다니까.”
모시의 제작과정은 모시풀 줄기를 베어 겉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해 이와 입술, 혓바닥을 동원해 모시를 가늘게 쪼개고 길게 이어 실로 만드는 ‘모시 삼기’ 과정 등 총 8단계를 거친다. 옛 어른들은 모시 한 필을 짜는 데 ‘침이 석 되 들어간다’고 했을 만큼 말린 태모시를 침으로 녹여가며 쪼개는 과정이 모시 제작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장인이 짠 모시

모시와 함께 한 삶의 기록, 인류무형자산이 되다

2011년 11월 28일 충청남도 서천의 <한산 모시짜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UNESCO Masterpieces of the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모시는 우리만의 문화가 아닌 세계의 문화가 되었다. 한국의 모시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고려시대에도 우리의 모시는 중국과의 3대 무역품 중 하나였고 원나라는 고려에 지속적으로 모시를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원나라가 동유럽까지 점령한 대제국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고려의 모시는 원나라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갔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모시는 진실된 옷이야. 나무껍질을 입으로 째서 무릎으로 삼아 한 올 한 올 할 생각을 어찌했나 몰라. 온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만드니까, 그래서 진실된 옷이야.”
진실한 옷 ‘한국의 모시’가 우리만의 문화가 아닌 세계의 문화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나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술에 굳은살 박이면서까지 모시를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던 한산 지역 여인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끈기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모시는 맑고 고운 맵시를 자랑해 잠자리 날개, 매미 날개와 같다고 한다.


서주희 | 문화캐스터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유산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6년부터 국립무형유산원의 무형문화재 대담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해왔으며 KBS 라디오방송을 통해
장인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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