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희 문화캐스터가 전하는 전승공예의 가치 ②
찬연燦然한 아름다움, 유기를 만나다

지난 호에 이어 서주희 문화캐스터가 직접 전하는 한국의 장인 이야기,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유기장 김수영, 김범용 부자다. 제작부터 관리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할 수 없기에 더욱 숭고함을 지닌 유기鍮器. 오랜 노하우와 숙련된 기술로 아름다운 유기를 만들어나가는 김수영, 김범용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글·사진 서주희 (문화캐스터)


예로부터 ‘놋그릇’, 혹은 ‘놋쇠’라 부르는 유기鍮器는 조선시대 궁중의 진상품으로 왕과 귀족을 위한 상차림에 등장했다. 우아한 금빛과 손으로 전해지는 묵직함, 그리고 세심하게 정성을 다해야 하는 까다로운 관리법이 유기의 숭고함을 말해준다. 전통적으로 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일정 비율로 배합하는데 구리에 주석(청동)을 넣을지, 황동과 같은 아연을 넣을지는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비율이 달라진다. 제작기법에 따라 유기는 크게 ‘방짜유기’와 ‘주물유기’로 나뉜다. ‘방짜유기’는 녹인 쇳물로 바둑알 모양의 둥근 놋쇠 덩어리를 만든 후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데, 주로 징이나 꽹과리, 식기와 놋대야 등을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주물유기’는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원하는 기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인데 무엇보다 정확한 배합과 숙련된 장인의 솜씨가 더해져야 하는 제작기법이다.

(왼쪽) 김수영 유기장(본인이 소띠라고 말하며 소 형상의 유기를 바라보는 장인) / (오른쪽) 김범용 작가

마음에 꼭 드는 물건, 안성맞춤

맞춘 것처럼 마음에 꼭 드는 물건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김수영 유기장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경기도 안성에서 비롯되었다. 장인이 살고 있는 안성은 예로부터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와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로 상업이 발달해 일찍부터 장시場市(지방의 5일장이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가 발달했다.
대구 장시, 전주 장시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로 안성 장시가 크게 열렸다.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기록한 《택리지擇里志》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수원 동쪽은 양성陽城과 안성安城이다. 안성은 경기도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과 장사꾼이 모여들어 한양 남쪽의 한 도회가 되었다.” 안성시장의 인기 품목은 유기와 꽃신, 한지, 복조리 등 수공업 제품들이었다. 특히 처녀가 시집을 갈 때 유기로 만든 요강, 대야, 밥그릇, 수저는 꼭 챙겨갔을 만큼 안성 유기의 명성이 자자해 당시 혼수품으로 유기를 주문하러 왔던 사람들이 물건이 마음에 든다며 했던 말이 ‘안성맞춤’이라고 전해진다. 이렇게 만인의 안성맞춤으로 찬사를 받았던 유기는 김수영 유기장과 아들 김범용 작가에 의해 그 고아古雅한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김수영, <조선왕릉제기> Ⓒ김수영

대한민국에서 가업을 잇는다는 것

편리함이 극을 달리는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전통문화와 관련한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전통문화를 잇는 장인匠人에게 많은 결심과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3대째 안성 유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김수영 유기장과 그의 아들 김범용 작가에게 유기 제작일은 운명이자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기와 함께 했다고 봐야죠. 유기 터전, 안성에서 태어나 터를 잡고 지금껏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태어나면서부터 흔하게 접했던 것이 유기제작이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유기 제작법을 차차 배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 유기장. 그가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게 된 때는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한 뒤부터였다. 섭씨 1000도가 넘는 쇳물을 다루는 고단한 일이지만 그는 가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아들 김범용 작가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전통 유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 일을 마치고 귀가하신 아버지는 늘 검게 그을린 얼굴에 옷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모습이었어요. 철없던 그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며 제가 어머니한테 그런 말을 했대요. 우리 아빠가 힘들게 일해 번 돈이라고…”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의 고단함을 눈치 채고 김범용 작가가 건넨 말이었다. 김수영 유기장에게는 둘째 아들 김범용 작가뿐 아니라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큰 아들 김범진은 아버지와 함께 유기 제작에 힘을 쏟고 있고, 셋째 아들 김범선은 홍보와 마케팅, 판매 일을 맡고 있다.
대학에서 국제경영을 전공한 김범용 작가는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현대인의 생활 태도를 섬세하게 반영한 다양한 유기 작품을 선보여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지난 2015년 영국에서 열린 <한국공예의 법고창신 2015>에서 아버지와 함께 작품을 출품했는데 현지인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유기의 소재인 청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워하더라고요.”
<한국공예의 법고창신 2015>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기술적 바탕을 기반으로 생활 속에서 공예를 이어온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인 장인과 현대 공예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 공예가, 디자이너의 협업 결과물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독자적인 기술로 빚어낸 우리만의 유기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이 일이 저를 설레게하고 흥분하게 만들어요. 그것이 바로 제가 유기제작에 열정을 쏟는 이유인 것이죠.”

김범용, <유기 주전자>, <식기>

청경淸耕, 맑은 마음으로 조선왕조 제기祭器 1,570여 점을 복원하다

조선 왕실의 국가 의례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길례吉禮이다. 이러한 길례가 거행되는 장소는 종묘宗廟이고, 제기祭器는 종묘제례의 핵심 의물이다. 엄숙한 종묘제례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 신실 내부의 제상 위에 제기를 차리고 제물을 올리는데 제사 음식의 가짓수와 구성 또한 매우 다양하다. 영조 때 편찬된 《종묘의궤》에 실린 제물을 보면 곡식으로 지은 밥 4종류, 떡 5종류, 과일 5종류, 포 2종류, 젓갈 4종류, 고기 7종류, 김치 4종류, 양념하지 않는 국 3종류와 기본적인 장, 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제물의 종류, 재료,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조선왕조 제기 1,570여 점이 김수영 유기장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했다. 인생의 반평생을 유기 제작에 힘써온 김수영 유기장은 맑은 마음으로 유기를 만들라는 뜻의 ‘청경淸耕’이라는 그의 호처럼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조선 왕실 제기 복원사업에 참여했으며, 이는 그의 빛나는 업적이 되었다.
“생애 잊지 못할 뜻 깊은 작업이었어요.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복원작업에 임했습니다.”
그가 복원한 제기는 현재 고궁박물관을 비롯해 현충사, 동구릉 등에 보관되어 있다.

우직한 소처럼 묵묵히 걸어온 길

1900년대 초 안성에는 유기공장 여러 곳이 성업했지만 값싼 일본제품이 들어오면서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해 1960년대에는 김수영 유기장의 아버지 故김근수 선생의 ‘안성유기공방’ 한 곳만 남게 되었다.

구리와 주석을 일정비율로 배합해 쇳물을 만드는 과정

김근수 선생은 지난 1991년 9월 17일 정부 수립 43년 만에 유엔에 남북한의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을 기념해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엔을 방문하면서 가입기념물로 가져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인쇄 동판과 영인본을 제작한 장인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활자본으로,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초기 국어와 인쇄 관련 연구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부족한 재료 탓에 물건을 엉터리로 만들어 신용을 잃었던 여러 유기 공방들이 문을 닫는 상황에도 아버지는 우리 것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유기를 지켜온 분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의 자기라고 하는 ‘왜사기倭沙器’, ‘스뎅’이라고 하는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식기, 주기적으로 닦아줘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유기와 천적인 일산화탄소의 결정체 연탄의 등장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김수영 장인은 고집과 집념으로 우직하게 유기장의 길을 걸어왔다.
“제가 소띠인데요. 그저 우직하게 일하는 소처럼 묵묵히 한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 물려주고자 가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던 아버지 김수영 장인과 그런 아버지의 성품, 올곧은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은 김범용 작가, 그리고 두 아들의 정다운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삶에 대한 성실함이 이들이 빚어낸 유기가 빛을 발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서주희 | 문화캐스터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유산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6년부터 국립무형유산원의 무형문화재 대담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해왔으며
KBS 라디오방송을 통해 장인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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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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