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의 문화유산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들’

덕수궁 돌담길

정동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근대화의 진통에 시달리던 19세기 말, 개항開港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무렵의 정동은 각국의 공사관이 집결되어 있는 외교의 중심지이자 서양문물을 토대로 한 신문명의 발상지로서 조선의 변화를 주도하고 반영하는 중요한 거점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동이 이 나라 수도의 중심지로서 엮어온 사연은 자못 진하고도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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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변화의 격랑, 신문명新文明의 요람

서울 정동길 한 복판,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이 갈라지는 길모퉁이에는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듯한 자그마한 기념 조형물 하나가 서 있다. 자칫 발에 채일 듯 작고 소박한 이 기념 조형물의 주인공은 지난 2002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뛰어난 대중음악가 이영훈이다. 조형물 아래쪽에는 정동의 추억을 노래한 그의 대표곡 <광화문 연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비록 대중가요이긴 하지만, 이곳 정동길에 서린 꿈결 같은 향수와 추억을 어쩌면 이렇게 가슴 아린 언어와 곡조로 담아낼 수 있을까. 정동길 한 켠에 작은 추억의 조각이라도 묻어둔 적이 있는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노래는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만의 옛 추억, 잊을 수 없는 사연으로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는 우리들의 시대가 ‘정동’이라는 정겨운 공간에 바치는 진심 어린 헌사일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동의 노래’인 것이다.
사실 정동길을 소개하는 데는 이 노래의 가사 이상의 말은 도리어 사족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동은 단순한 서울의 한 동네 이름이 아니라 실은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의 길, 끝없이 드넓은 숱한 이야기와 전설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동길에 서린 이런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정동 거리 곳곳에 새겨진 지난 세월의 흔적들은 결코 가볍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정동이 이 나라 수도의 중심지로서 엮어온 사연이 자못 묵직하기 때문이다.
정동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은자의 나라’ 조선이 근대화의 진통에 시달리던 19세기 말, 개항開港을 전후한 시기였다. 이 시기 서양문물이 수입되던 주요 루트는 최초로 외부에 문을 연 항구였던 인천 ‘제물포’, 수도 한양의 입구인 한강변의 ‘양화진’, 그리고 한양 도성의 가장 가까운 진입로였던 ‘서대문’을 잇는 라인이었다. 정동은 이 라인의 끝을 부여잡은 한양 도성 안의 마을로서 이 루트를 따라 유입된 서양문물이 한데 어우러져 정리되고 다시 밖으로 전파되는 거점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이 무렵의 정동은 각국의 공사관이 집결되어 있는 외교의 중심지이자 서양문물을 토대로 한, 이른바 ‘신문명新文明’의 발상지로서 조선의 변화를 주도하고 반영하는 중요한 거점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거리에 새겨진 사연과 역사가 결코 노래처럼 조용하고 낭만적이었을 리가 없다.

서양문물의 첨병, 개신교의 요람
광화문연가 노래비

▲광화문연가 노래비

그러나 다른 곳도 거의 그러하듯, 정동의 풍경 역시 이영훈의 아름다운 노랫말처럼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공사관이며, 병원이며, 호텔 등으로 가득찼던 그날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현재 정동에서 만날 수 있는 옛 흔적은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 기독교 관련 유적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의 흐름이 망국으로 치닫던 격랑의 세월을 증언해 주고 있는 몇몇 근대 유적들이다.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동관’ ‘심슨기념관’ ‘구세군회관’ 등이 전자에 속하는 유적들이고 최근에 새롭게 중수되거나 단장된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중명전’이 후자를 대표하는 유적들이다.
정동에서 일반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유적은 아마도 정동제일교회일 것이다. 정동길 복판에 있는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고풍스러운 교회이다. 이영훈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 바로 이 교회일 것이다.
이 교회는 언더우드H.G Underwood와 함께 우리 땅을 밟은 서양의 첫 공식 선교사인 아펜젤러H.G Appenzeller에 의해 이 땅에 세워진 첫 감리교회이다.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라는 종교사적 의미도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화기 정동의 성격과 풍경을 특징짓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한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1885년 공식 선교사 자격으로 우리 땅을 밟은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관이 있던 정동에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한 데 이어 개신교의 첫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한국 개신교의 첫 열매로서 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는 격동의 시대에 당대를 주도한 인적자원의 산실로서 정동제일교회가 감당했던 역할과 비중은 매우 크고도 중요한 것이었다. 교회 건물은 1895년 9월에 착공, 1897년 6월 경 완공된 붉은 색 벽돌 건물로 근대의 건축물로는 드물게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256호로 지정돼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개화기에 크게 활동한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沈宜碩이 시공을 맡아 18세기 미국 북동부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인 이른바 ‘조지안 고딕 양식Georgian Gothic Style’으로 지어졌다. 이 양식은 통상 건물의 외관이 크고 여러 개의 굴뚝과 지붕 난간이 있으며 주로 벽돌을 사용해 짓는다는 것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이에 비해 이 건물은 비록 단층에 규모 또한 그리 크지 않은 편이지만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 단순하면서도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한편 동남쪽 모퉁이에 세운 사각형의 종탑, 아치형의 창문 등으로 인해 전체적으로는 조지안 고딕 스타일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정동의 풍경을 한층 서정적으로 만들어주는 빛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옛 배재고등학교 터에 홀로 서 있는 ‘배재학당 동관’ 건물이다. 배재학당은 정동교회를 세운 아펜젤러가 교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운 학교로 역시 개화기 근대식 교육의 출발선상에 있는 중요한 학교이다. 배재학당 이후, 정동에는 ‘이화학당’ ‘경신학당’ 등의 신식 교육기관이 연이어 들어서 근대식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동제일교회와 함께 정동의 성격을 특징지운 역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는 분수대 광장에서 서울시립미술관 주자창 입구를 지나 서소문 쪽으로 향해 난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 자리에 있던 배재중고등학교는 지난 1984년에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사를 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초현대식 고층 건물인 배재빌딩이 버티고 서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배재빌딩 앞, 잘 단장된 시원스런 광장에 ‘배재역사박물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의연하게 서 있다. 본래 배재중·고등학교에는 이 건물 말고도 몇 동의 근대 초기의 건물들이 남아있었으나 일부는 새 학교로 옮겨지고 일부는 헐려 현재는 이 건물 하나만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지어져 학교가 이전하기 전까지 학생들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지하실이 딸린 3층 건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자태가 일품이다. 엔타시스entasis가 가미된 석조 기둥, 정면 현관 위의 널찍한 박공牔栱 등이 붉은색 벽돌로 쌓은 건물 몸체와 잘 조화된 아름다운 건물로, 지붕 위의 굴뚝과 창문, 아치형의 창 등이 모두 엄격한 좌우대칭을 이뤄 절제된 균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1910년대를 대표하는 근대 서양식 건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로서의 정식 명칭은 ‘배재학당 동관’이다. 현재 이 건물은 내부가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내부의 전시물들을 둘러보면 비단 ‘배재학당’의 역사뿐 아니라 구한말의 개신교 선교사宣敎史와 우리나라 근대사의 단면을 짜임새 있게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근대의 변화와 시련 상징하는 유적들

그 밖에 이 정동 길에는 근대사의 격랑과 마주한 조선왕조의 황혼녘을 가슴 아프게 되살려 주는 몇몇 유적들이 더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명전과 러시아공사관 건물이다.
우선 정동길 예원학교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중명전을 만난다. 본래 이 일대는 정동에 둥지를 튼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는데, 1897년 덕수궁을 확장할 때, 궁궐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러니까 덕수궁 본궁과 좀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덕수궁에 속한 궁궐 건물의 일부인 것이다. 1901년 건축 당시의 용도는 수옥헌漱玉軒이라는 당호를 가진 황실도서관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이 화재를 당하자 황제가 집무를 하고 외국사절을 알현하는 등 궁궐의 편전便殿 노릇을 했다.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가장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서 2층으로 이루어진 벽돌 몸체에 아치형의 많은 창이 엄격한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안정된 균형미를 느끼게 하는 건축물이다. 건물을 설계한 이는 덕수궁 정관헌과 독립문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Sabatin이다.
중명전은 무엇보다도 국권을 사실상 강탈당한 1905년의 소위 ‘을사조약’이 체결된 비극의 현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후에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로 파견되는 밀사密使 이준李儁에게 고종 황제가 눈물로 친서親書를 전달한 장소도 이곳이다. 근대사의 가슴 아픈 장면과 사연을 담고 있는 의미 있는 문화재이다.
중명전과 짝을 이룰만한 사연을 담고 있는 중요한 정동의 유적은 구 러시아공사관 건물이다. 모두 알고 있듯이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 고종이 궁궐을 버리고 남의 공사관에 몸을 의탁한 사건인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다. 1890년에 지어진 르네상스식 건물이었으나 6.25전쟁 때 대사관 건물은 모두 파괴되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 남아있다. 낡은 모습으로 오랫동안 서 있다가 얼마 전 복원 공사가 끝나 한결 깨끗해 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높직한 언덕 위에 서서 정동 일대를 내려다 보는 자태가 자못 당당하다.
19세기 후반 정동의 풍경은 놀랍도록 새롭고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에 진출한 거의 모든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자리 잡고 있고, 서양식 병원과 신식 학교, 그리고 서양인이 세운 교회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서양식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파란 눈의 이방인이 거리를 활보하는 그야말로 서양문물의 해방구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에서 정동만큼 역사의 내음이 짙게 배어있는 ‘역사의 거리’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영훈의 서정적인 노랫말은 정동의 향수에 얽혀있는 진한 역사성을 함께 느끼게 해 준다. 정동길에 서린 아련한 향수 속에는 그래서 이 땅이 겪어온 아픈 세월의 신음 소리가 묻어난다.

 

글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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