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공간 속에 놓인 그림 백동자도(百童子圖)

도 1. <백동자도> 6폭 병풍 中, 19세기 말, 견본채색, 각 40.6×72.8㎝, 서울역사박물관

▲도 1. <백동자도> 6폭 병풍 中, 19세기 말, 견본채색, 각 40.6×72.8㎝, 서울역사박물관

인물이 들어가는 화목은 더 나은 실력을 요구한다. 그중 백동자도는 ‘백자도百子圖’ 혹은 ‘백자동도百子童圖’라고도 불렸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궁중가례부터 민간에 두루 쓰인 그림으로, 많은 아이들을 그려 자손의 번성과 가문·왕실의 영속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궁중부터 민간까지 백동자도가 놓인 풍경을 쫓았다.

조선후기의 민화民畵를 그린 민간화가들은 대부분 그림의 기본 기량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소묘력素描力이 취약했다. 소묘는 대상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그림의 기초 능력이다. 물론 소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추구한 것은 민화를 그린 화가들만의 특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민 화가들은 대부분 화법을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익히지 못했다. 민화를 화원화가畵員畵家들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소묘 부분이다.
소묘의 능력은 인물을 그릴 때 특히 잘 드러난다. 민화 가운데 십장생도十長生圖나 모란도牧丹圖, 책가도冊架圖 등에는 인물이 없어 어느 정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지만, 인물을 그려야 할 경우에는 그 기본 형태를 갖추지 못하면, 그림이 지닌 전달력이 떨어지고 성근 그림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인물이 들어가는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 백동자도白童子圖, 요지연도瑤池宴圖를 민화로 그린 화가들은 민간화가들 중에서도 실력이 나은 화가들인 듯하다.
곽분양행락도와 백동자도, 요지연도는 궁중과 민간에서 함께 즐겨 그려진 화제畵題다. 그 연원이 궁중에서 시작되어 민간으로 저변화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화원들의 양식과 민간양식을 넘나들며 각각의 특징을 잘 드러낸 그림이 백동자도白童子圖가 아닐까싶다. 곽분양행락도나 요지연도는 채색이 화려하고 복잡한 구성이 많지만, 백동자도는 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인물묘사가 비교적 단조롭다. 이 글에서는 구한말의 흑백 사진 속에 나타난 민간 백동자도의 사례를 알아보고, 이와 유사한 현존작과의 비교를 통해 그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큰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화원畵員 화가의 백동자도

백동자도는 ‘백자도百子圖’ 혹은 ‘백자동도百子童圖’라고도 불렸다. 그려진 아이가 백 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많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19세기 궁중의 결혼식인 가례嘉禮 때 백동자도를 설치한 기록이 나온다. 이는 많은 아이들이 그려진 그림처럼 자손의 번성은 물론 왕실의 영속에 대한 염원이 담겼음을 알려준다. 유득공柳得恭(1749~1807)의 『경도잡지 京都雜誌』에는 18세기 후반기의 민간 혼례 때에도 백동자도와 곽분양행락도 병풍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두 주제는 궁중과 민간에서 혼례와 관련된 ‘다자손多子孫’이라는 길상吉祥의 그림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백동자도는 어떻게 출발한 그림일까? 백동자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곽분양행락도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다. 곽분양행락도에 부분적으로 등장하던 동자가 점차 비중 있게 그려져 백동자도로 독립된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곽분양행락도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그림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견해다. 그림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복식이나 머리 모양이 중국풍에 가깝다는 것은 중국 도상의 영향이 먼저 있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견해는 아직 확실한 작품을 통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민화의 주제 가운데 인물화로 분류되는 곽분양행락도, 요지연도, 백동자도 등은 궁중에서 제작된 기록도 확인되며, 화원양식으로 그린 그림들이 여러 점 전하고 있다. 화원들이 그린 양식의 특징은 치밀한 인물 구성, 정교한 필치와 묘사력, 채색의 명징함과 장식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이 서울역사박물관의 <백동자도>이다.(도 1) 화려한 저택의 안마당에서 여러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그렸다. 건물과 나무 등의 표현이 매우 정밀하고 밀도 있다. 매우 정세한 궁중양식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건물이 있는 공간 속에 인물을 그린 점은 궁중풍의 곽분양행락도와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곽분양행락도는 화면의 규모가 크고, 채색의 기교가 필요하여 능숙한 화가가 아니고서는 다루기가 어렵다. 따라서 궁중에서 곽분양행락도를 선호하였고, 민간에서는 크기가 작은 백동자도를 만들어 활용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민간 화가의 백동자도

민간의 가옥 안에는 어떻게 그려진 백동자도가 놓였을까? 백동자도의 민간양식은 어떤 그림일까? 이 궁금증을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살펴보자. 즉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있는 백동자도로부터 시작하여 설명해 가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생활공간 속에 놓인 당시의 그림을 단서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단서가 되는 것은 19세기 말에 촬영한 흑백 사진 속의 백동자도이다. 먼저 살펴 볼 것은 <다림질 하는 여인>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도 2) 사진 속의 장면은 숯을 담은 그릇으로 옷감을 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구한말 여성들의 일상생활 속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여인의 뒤편에 작은 병풍 한 점이 둘러져 있다. 사진이 어두워 선명하지 않지만,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단병短屛이다. 그러데 그 중의 한 폭에 어느 정도 그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화면 왼편에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어린 아이들이 어울려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하나의 특징이라면 화면의 모서리가 비스듬한 사선斜線으로 각이 져있다는 점이다. 화면의 가장 자리에 테두리를 치고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은 한때의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도상과 비슷한 사례를 삼성미술관 Leeum의 <백동자도>에서 살필 수 있다.(도 3) 백동자도가 화원 양식에서 민간양식으로 옮겨가게 되면, 배경에 가옥이 사라지고, 괴석怪石이나 고목枯木이 등장하며, 그 사이 공간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그림의 크기도 줄어들어 세로 길이가 약 50㎝ 내외인 작은 병풍에 그려진 예가 있다. 이처럼 그림 크기와 배경의 변화는 민간양식의 백동자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다림질 하는 여인> 속의 백동자도(도 2)는 그것이 원래 놓였던 생활공간에 대한 정보를 준다. 즉 민간 여성의 규방閨房과 같은 공간에 놓인 작은 병풍이 바로 백동자도였음을 알게 된다. 다자손과 가문의 번창을 위한 그림이라는 특징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민간에 유통된 백동자도의 범주를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이다.
백동자도가 들어가 있는 두 번째 사진은 <다림질 하는 여인>이다.(도 4) 그림은 앞서 본 사진 속의 백동자도와 대동소이하다. 사진에는 옷감을 펴기 위해 나무에 올려 두드리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고, 그 뒤로 백동자도 단병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사진에는 사람에 가려진 부분을 제외하고 세 폭의 병풍이 드러나 있다. 첫 번째 그림은 괴석怪石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놀이 장면을 그렸고, 여인의 왼편에 있는 병풍에는 파초가 배경으로 들어가 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치고, 모서리 부분도 각을 주어 앞서 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백동자도>(도 3)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꽃병에 꽃가지가 꽂혀 있고, 음식이 차려진 소반상도 보인다. 그런데 함께 그려진 술병과 담뱃대로 미루어 보면, 이 여인을 양반가의 여성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연출된 사진일 수도 있지만, 더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진 속의 여인은 병풍을 치마걸이의 대용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이 그림보다 조금 더 간략한 구성과 묘사를 보이는 것으로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백동자도>가 있다.(도 5) 민간 화가들의 실력차가 반영된 그림이다. 민화 백동자도는 화원들의 그림보다 병풍의 크기가 작아지고 배경이 축소되며, 인물이 생략되는 소박한 분위기로 그려졌다.

어느 가족사진 속의 백동자도

백동자도가 등장하는 이 사진은 구한말에 촬영한 어느 가족사진이다.(도 6) 기록도 없고,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도 없다. 10폭 병풍으로 추정되는데, 왼쪽의 한 폭은 그림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림 속의 분위기가 언뜻 곽분양행락도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갖게 하지만, 화면 상단에 건물이 있고, 하단에도 출입문 등 점유물이 있으며, 그 중앙에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사진과 유사한 그림은 호림박물관의 <백동자도> 10폭 병풍이다.(도 6) 기존의 백동자도와 달리 병풍의 가로 폭이 좁고, 세로 폭이 긴 것이 특징이다. 이 그림에는 상단의 절반 정도에 건물이 들어가고, 아래쪽 절반은 동자들이 그려져 있다. 동자들의 모습은 기존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색감이 다소 생경하다. 아마도 19세기 말에 수입된 서양 화학안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제작시기가 20세기 전반까지로 떨어지는 그림으로 추측된다. 색동옷을 입고 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백동자도의 전형적인 구성이다. 건축물을 공들여 그린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화면의 오른쪽이나 왼쪽에 구름이 그림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19세기 말기의 민화 병풍을 보면, 바로 호림박물관의 <백동자도>와 같은 화면 비례로 그려진 것이 많다. 모란도와 십장생, 심지어 책거리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여러 폭이 하나의 그림으로 이어지는 연폭連幅이 아니라 한 폭씩 완결된 단폭單幅이라는 점이다. 19세기 말에 유행한 병풍의 주요 형식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이러한 병풍은 배경을 만들거나 가려주고 있어 가족사진이나 행사가 있을 때 펼쳐 놓기에 적합하다.
사진 속의 인물들을 잠시 보자.(도 6) 가운데 자리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들이 아내와 딸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그런데 두 아들의 자녀들 중에는 남자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어린 딸들만 그려져 있다. 따라서 백동자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게 한다. 이 가족들이 유독 백동자도 병풍을 실내에 펼쳐놓은 이유는 사진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위에서 살펴본 사진 속의 백동자 병풍은 구한말 당시 어디에 가서 살 수 있었을까? 구한말에 그림을 판매하는 유통공간에 백동자도가 버젓이 나와 있었다. 길거리에 그림을 걸어두고 판매하는 좌판 형태의 자리였다. 그 장소는 종로와 광통교廣通橋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세기 전반기의 가사 「한양가」(1848)에는 청계천 광통교의 남단에 있던 그림 가게를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광통교 아래의 가게에 각색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며 강남 금릉金陵의 경직도耕織圖며 한가한 소상팔경瀟湘八景 산수도 기이하다.”

광통교 남단의 그림 가게에는 여러 민화와 장식화가 걸려 있었다. 이 가운데 백동자도,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는 궁중장식화에서 유래된 주제이다. 특히 ‘병풍차屛風次’라 한 것은 병풍용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는 병풍으로 장황한 기성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병풍으로 만들기 위한 낱장으로 된 병풍용 그림만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 구매자는 병풍을 펼쳐둘 공간을 고려해야 하고, 일반 그림보다 고가품高價品이었을 것이므로 중류층 이상이 그 수요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말기의 빛바랜 사진 속에 등장하는 민화들은 우리가 박물관 전시실이나 도록에서 접하던 민화가 약 백여 년 전에 어떤 공간에 어떤 모습으로 놓여 있었는지를 실상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글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자에 관하여

월간 민화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