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는 그림 세화(歲畵)

까치호랑이

세화는 연말연초 묵은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두들 평안하고 풍요롭기를 비는 마음으로 문에 붙이고, 또 서로 선물했던 그림이다. 세화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세화 풍습은 궁중을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행해져 왔으며 점차 민간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빼놓을 수 없는 신년세시풍속, 세화

수성노인도 지본채색세화는 그 용어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연말연초 묵은해를 보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모두들 평안하고 풍요롭기를 비는 마음으로 문에 붙이고, 또 서로 선물했던 그림이다. 요즘은 새해가 되어도 문에 그림을 붙이거나 그림을 서로 선물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어 잊혀진 풍속가운데 하나이지만 김만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시대 세시기류의 기록을 보면 세화는 정월(正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속이었다.
“도화서에서 수성(壽星)·선녀(仙女)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의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하는 것을 이름하여 세화(歲畵)라 한다. 그것으로 송축(頌祝)하는 뜻을 나타낸다. 또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바치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는다.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또 한 장군은 절을 들었는데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다 붙인다. 이것을 문배(門排)라 한다…….”(《동국세시기》 정월조)
풍속을 적은 기록뿐 아니라 고려 말부터 개인의 문집이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같이 공식적인 기록에 이르기까지 세화에 대한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은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왕으로부터 받은 세화 십장생도를 보며 병의 회복과 장수를 스스로 기원하며 읊은 찬(讚)을 남겼다. 조선 초기 성현(成俔, 1439∼1504)도 그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 왕으로부터 세화 십장생도를 하사받았음을 적고 있다. 조선중기 박미(朴彌, 1592~1645)는 《분서집(汾西集)》권1 〈병자란후집구장병장기(丙子亂後集舊藏屛障記)〉에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모란병풍에 대한 기(記)를 적어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일곱 번째는 열폭 모란병풍이다. 지금 두 폭을 잃어버렸고 나머지도 점점 완연한 색채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초제(醮祭)시 해당관서에서 옛 제도에 따라 나눠준 것이다. 또한 좀 작은 열폭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꽃과 새들을 그린 것으로 조유선생(烏有先生)의 작품이다. 두 그림은 옛날부터 짝을 이뤄 하나가 되었다. 예조(禮曹)는 전적을 모으고 서사를 담당하는 곳이다. 녹봉의 등급을 매겨 우수한 자를 취하여 새해에 임금께 진상하니 (그것을) 세화라 한다. 또한 십장생이라 부르는 것도 있는데 모두 같은 것들이다.(七爲畵牧丹屛十疊. 今 其二疊, 餘者稍完采色不. 此爲余醮時, 該司據舊制造給. 而又有稍小屛十疊, 畵雜花禽鳥者, 作烏有先生矣. 兩種畵自昔俱有成本. 禮曺果族史臨寫以第, 取尤者歲充進御謂之歲畵. 又有所謂十長生者, 各若而種.)
이 글은 그가 받은 세화병풍이 초제(醮祭)시에 예조(禮曹)에서 옛 제도에 따라 나눠준 것이며, 화원들이 진상한 그림이라는 세화의 제작과 반사 경로까지 언급하고 있어 조선 중기 세화가 어떻게 그려지고 어떤 경로를 거쳐 반사 되었는지 잘 보여 준다. 세화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조선 후기 이후이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세화 풍습은 궁중을 중심으로 계속적으로 행해져 왔으며 점차 민간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세화에 대한 개인의 기록은 공적인 기록을 통해서 좀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대표적인 공식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세화가 매년 그려지는 것을 기본으로 했고 지나치게 만연했던 모습까지 생생히 적고 있다.

태종 8년 태조가 승하하자 “국상(國喪)기간 3년 동안 세화 제작을 금하라”는 내용, 성종 14년(1483) 11월 19일 승정원의 재상들이 ‘세화축역(歲畵逐疫)’이 비록 음사(陰邪)를 물리치기 위한 일이나 관례적으로 행해온 일이므로 폐할 수 없음을 밝히는 내용 등은 궁중에서 세화를 제작하고 반사(頒賜)하는 풍습이 관례화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세화의 지나친 제작에 대한 지적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이는 상당량 세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화의 제작은 계속해서 늘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중종실록》 1537년 9월 29일 기록에는 정언 민수천(閔壽千)이 세화의 지나친 제작을 지적하면서 “조종조에서는 세화 제작량이 60장을 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20장씩 받아 가지고 석 달을 그리니 그림의 장수를 감할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의 도화서의 인적 구성으로 따져보면 400여 장에 이르는 양이다.
이러한 기록들과 더불어 조선후기 조례집인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구체적인 제작자와 수량에 대한 규정까지 적어 놓았다. 《육전조례(六典條例)》, 진상조(進上條)에 따르면 “세화는 자비대령 화원이 각 30장, 본서화원이 각 20장을 12월 20일에 봉진하여야 한다. 문배(門排)와 양재(禳災)는 장무관과 실관 30명을 윤회로 임명하여 각 전·궁의 진상 및 각 문에 붙일 (문)배는 모든 화원에게 분배하여 12월 그믐에 봉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여 세화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하고 배포했던 신년 초 세시풍속 그림이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도화서 화원들에겐 숙제 같은 그림, 세화

도화서 화원들에게 세화는 매년 의무적으로 그려내야만 했던 그림이다. 세화를 그려내면 우열을 가려 궁궐 내용(內用)으로 쓰고, 나머지는 재상과 근신들에게 하사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어떤 때는 이를 등급을 매겨 그 결과에 따라 업무의 근속여부와 녹을 주는 기준이 되기도 해서 화원들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신경이 쓰이는 임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시 때마다 하다 보니 화원이나 관리들이 이를 관습적으로 행하고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미 중종 때부터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정해진 화목을 매년 20여 장씩 그려내다 보면 타성에 젖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익숙한 화원화가 신한평(申漢枰), 김응환(金應煥), 김득신(金得臣)이 세화를 대충 그려 내었다가 지적을 당하는 아래 내용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올해에는 이른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솜씨가 익숙한 자도 모두 대충대충 그리는 시늉만 냈으니 그림의 품격과 채색(彩色)이 매우 해괴하였다. 세화를 잘 그린 자에 대해서는 원래 정해진 상격이 있으니, 못 그린 자에 대해서도 어찌 별도의 죄벌(罪罰)이 없겠는가. 이것 또한 기강과 관계된 것이다. 먼저 그려서 바친 화사 중에서 신한평(申漢枰), 김응환(金應煥), 김득신(金得臣)에 대해서는 곧 처분할 것이니 이로써 해조에 분부하되, 나중에도 다시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할 경우에는 적발되는 대로 엄히 처리할 것이니 미리 잘 알게 하라. 하였다.”(《일성록》 정조5년 신축(1781))
혹여 사가(史家)에서 주문한 그림들에 전념하다보니 의무에 소홀했을까? 누구에게나 숙제는 하기 싫은 법, 이들에게 숙제 같은 그림 세화는 그닥 달갑지는 않았나 보다.

 
세화에는 어떤 그림들이 있을까?

문배의 경우 매년 갈아 붙였기 때문에 남아있지 않고, 반사된 송축용 그림들 역시 누구에게 어떤 그림이 갔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세화로 어떤 그림들이 그려졌는지 실물로 확인된 바는 없고 다만 기록으로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림의 내용은 연말연초라는 제한된 기간에 특정한 목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쓰임에 따라 벽사적 성격이 강한 것과 송축적인 의미가 강한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새해에 집안으로 들어오는 나쁜 액을 막고 한 해의 안녕을 비는 뜻에서 대문에 그림이나 글씨를 붙이는 풍습은 중국의 문신(門神)신앙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정착한 것으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중국 문신에서 유래한 신도(神荼)·울루(鬱壘)와 위지공(蔚遲恭)·진숙보(秦叔寶)가 그려졌다. 그 외에 닭·호랑이와 같은 주술성이 강한 소재들이 그려졌으며, 문이나 창에 붙이는 것을 감안해 한 쌍으로 그려지거나 낱장으로 그려졌다.
전(傳) 김홍도의 「모당평생도」와 작자미상의 「평안감사환연도」에 남아 있는데, 갑옷을 입고 손에 예장을 들고 허리에 보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다. 「울지공·진숙보」는 당대(唐代)의 실존인물들이 신격화된 것이다. 세시기류들에서 흔히 언급되고 있는 금갑장군(金甲將軍)이 바로 이들이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적혀있는 묘사를 통해 보면 이들은 길이가 한길이 넘고 황금빛 갑옷을 입었으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또 한 장군은 절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세화 풍습이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문배(門排) 세화(歲畵)는 처음에는 궁궐대문이나 관아의 문과 같은 커다란 문에 주로 붙여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 풍속이 민간에 확산되면서 시정의 큰 저택들에서도 많이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축용의 길상적 화제로는 십장생, 모란도, 신선(神仙)과 같은 인물과 화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목들이 그려진다.
「십장생도」는 문헌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세화이다. 고려말 이색(李穡)이 왕으로부터 받은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사랑받았던 그림이다. 더욱이 장생동물의 조합은 동양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십장생도」 가운데 어떤 그림이 세화로 그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그림을 묘사한 시들에서는 오악이 이어지고 드넓은 창해가 펼쳐진 곳에 사슴, 거북이 등이 노니는 요즘의 십장생그림들과 유사한 모습들로 그려진 것으로 되어 있다.
‘수노인(壽老人)’은 작은 키에 전체 몸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크게 그려진 머리, 늘어진 눈썹의 모습으로 그려진 수노인은 장수를 의미한다. 수노인은 남극 가까이에 있는 남극성(南極星)이 신격화된 것으로, 예로부터 이 별이 인간수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신하들에게 주는 선물용 세화의 대부분이 「남극노성도(南極老星圖)」였다. 요즘이나 그때나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인사는 아마도 “오래 사세요”였던 것 같다.
세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용호도(龍虎圖)」나 「까치호랑이」. 비교적 늦게 선호되었던 세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후기까지의 문헌에 이들을 세화로 언급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 기억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선호되었던 것이어서 가장 친숙해져 있고,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다.

세화 풍습은 왜 사라졌을까?

노인들 중에는 더러 어렸을 때 설날 대문에 붙어있는 세화를 봤던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 적어도 1960년대를 전후한 시기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는 집안에서는 지속되던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해 아침에 대문에 그림이나 글씨를 붙이고 서로 선물하는 풍속은 이제 전시용 공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잊혀진 신년 풍속’이 되었다.
다른 모든 풍속이 그렇듯이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요인이 아마도 세화를 포함한 잊혀진 풍속이 사라진 이유일 것이다. 세화가 언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역시 생활의 변화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동양에서 ‘공간(空間)’은 단지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기운(氣運)’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문(門)’은 눈에 보이는 것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통행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문(門)’을 통해 혹시나 들어올 수 있는 나쁜 ‘기운(氣運)’을 막기 위해 문에다 글씨를 써 붙이거나 그림을 그려 막아보려 했던 것이다. 문배가 사라진 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이러한 ‘공간’의 의미가 바뀌면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더 이상 ‘공간’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처럼 ‘기(氣)’와 같은 것으로 채워진 것이 아닌 서양식의 여섯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비어있는 사각형의 내부로 인식된다. 서양식 주거가 보편화되고, 한옥이 사라지면서 눈에 보이는 변화뿐만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까지 변했다. 공간의 의미가 바뀐 만큼 공간에서 문이 차지하는 무게도 달라졌다. 이제 문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드나드는, 네모난 공간으로 들어가는 장치로서의 의미만 남게 되었다. 송축용 세화의 경우는 연하장을 그 연장선상으로 해석하여 조금은 더 지속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역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는 전통 그림이 지금의 생활공간에서 사라진 이유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세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지만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있는 풍속이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새해가 되면 문에 신도·울루상을 붙이고 한 해 액막이를 한다. 또한 송축적인 내용을 담은 민간년화(民間年畵)가 활발하게 제작, 소비되고 있다. 우리에게 이미 잊혀진 세화 풍습의 단면을 이들 이웃나라의 풍속을 통해 조금이라도 유추해 보고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서로 선물하고 붙였던 세화는 그려지는 내용에서 부터 주고받는 풍습까지 문화적 콘텐츠를 오롯이 담고 있다. 새해 서로 그림을 선물하고 붙이는 풍속이 되살아난다면 아마도 전통 문화 콘텐츠의 부활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글 :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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