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조명하는 호랑이, 우리 호랑이

담배피는 호랑이, 수원 팔달사 벽화
21세기, 왜 다시 호랑이인가?

수복강녕을 비는 민화의 세계에서 호랑이는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민중을 사로잡아 왔다. 흔히 전통의 단절을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호랑이란 주제에 대한 애정에서는 옛날과 지금이 전혀 다르지 않다.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 3월에 열린 경주민화포럼의 둘째 날 주제 ‘왜 다시 호랑이 인가’에서는 미술사, 수의학,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국 민화 속 호랑이를 심층 분석했다. 포럼에서 발표된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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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랑이 그림(虎圖)의 특징

이원복 경기도박물관 관장
이원복 관장국립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은 ‘우리 호랑이’라는 글에서 조선시대 호랑이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언급하며, 이것이 곧 범과 맺어 온 밀접한 관계, 그리고 애정임을 강조한다.
한국 문화사를 조명함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다른 두 국가, 즉 중국과 일본과의 비교는 필수적이다. 한 가지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 화제를 대하는 민족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 호랑이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이 상이한 표현을 보이며, 그 전제는 호랑이를 인식하는 정서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 전제된다.

문인화적 전통이 담겨진 중국 호랑이
중국의 호랑이 그림은 한국 호랑이 그림의 기원을 인식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국 최초의 호랑이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3∼4세기 말의 작품인 . 도석인물화(도깨비나 신령스런 대상을 그린 그림. 주로 도교적 주제)에 능했던 진(晉)나라 사람 위협(衛協)이란 화가의 작품이다. 이는 호랑이가 도석화의 범주에서 다루어졌음을 뜻한다. 이후에는 당대 도경진, 오대(송 건국 이전 다섯 왕조 시대) 여귀진 등도 호랑이와 표범, 말 등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호랑이라는 독립적인 주제를 다룬 화가들이라기보다는 다른 테마 안에서 호랑이를 다루어 온 이들이었다.
호랑이를 독립적인 화제로 그린 화가가 등장한 것은 송대의 일로 조막착(趙邈齪)이 , 등 8폭의 호랑이 그림을 남겼다. 또한 부자 화가인 포귀와 포정 역시 호랑이로 그림으로 이름을 남겼던 이들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13세기 선승 법상의 로 이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들의 모델이 되기도 한 작품.
이민족 왕조인 원대에는 호랑이가 다시 도석인물화의 한 요소로 처리되는 등 부차적인 화제로 돌아갔다가 명대에 이르러 다시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들이 나타난다. 특히 명에서는 신령스런 동물 여덟 종을 그린 중의 한 주인공으로 호랑이를 택했고 인기가 높았다. 이민족 왕조이지만 한족에 동화된 청나라에서도 역시 고기패나 방사서 등의 화가가 호랑이를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 인기가 높았다.
중국의 이러한 호랑이 그림들은 사실적이기보다는 사의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호랑이 그림은 문인화적 전통과 궤를 같이 한다. 즉 그리고 싶은 호랑이의 이미지를 그렸다는 뜻이다. 물론 중국의 화가들도 호랑이를 직접 관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호랑이를 직접 기른 용장과 같은 화가가 있는가 하면 여귀진은 깊은 산에 들어가 높은 나무 위에서 호랑이를 자세히 관찰했다는 기록도 있다.

양식사적 흐름을 갖고 있는 화제
한국의 호랑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 중 수렵도의 한 장면에 등장한다. 여기서 호랑이는 쫓기는 대상이다. 그런 한편 신령스런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강서대묘의 에 등장하는 백호가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의 호랑이 그림은 그 유물을 다수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있지만, 사경변상도(불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에는 호환(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변) 장면이 나와 있다.
이러한 전통을 거쳐 조선 전기(16∼17세기)에는 호랑이가 연초에 수복강녕을 바라는 세화(歲畵)로 그려지는 전통이 자리 잡았다. 특히 이상좌, 허한 등은 이 소재의 그림으로 큰 일가를 이루었는데, 이는 호랑이 그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 후기의 전통을 예고하는 그림이다. 특히 이상좌는 안견에 이어 1545년 석영과 함께 중종의 어진을 그린 화가로, 일류급 회원들이 호랑이 그림을 진지하게 그렸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기 선구자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에는 드디어 호랑이 그림의 정형이 잡힌다. 18세기 말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단원 김홍도, 그리고 홍호와 정홍래 등의 작품은 호랑이의 디테일은 물론 배경 산수에도 실경을 도입하는 등 발전을 보였다.
특히 김홍도는 화선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도석인물로 30대 초에 명성을 얻었다. 그의 스승 강세황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는 한국 범그림 중 백미이다. 화면 상단을 차지하는 노송의 세필(細筆) 기법 등은 뛰어난 테크닉으로 사실 민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수준이기도 했다. 특히 이 그림에서는 측면에서 표현하되 등을 둥글게 구부리고 얼굴은 정면을 향하며, 뒷다리를 세우고 앞다리는 서로 교차시켜 곧 다음 동작으로 향하게 하는 호랑이의 특징적 자세가 돋보이는데, 동적인 느낌의 이 자세는 후대 민화호랑이의 강력한 전형이 되었다.
또한 임희지와 김홍도가 합작한 는 대나무와 호랑이가 함께 등장하는 구도의 한 유형을 제시했다. 사실 일본풍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이미 호랑이와 대나무를 함께 등장시킨 등이 등장해 그 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의 다른 호랑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등의 굴곡을 강조한 자세가 강조되었으며 얼룩문의 섬세한 전개는 물론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 표현까지 강인한 기운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단원의 높은 이름값 때문에 그의 이름을 칭하는 무명화가들의 모조화 작품도 성행하였다. 하지만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아마추어 화가들이 호랑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세도 김홍도가 제시한 정형에 머무르지 않는 새로운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김홍도가 마련한 정형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물들도 있으나 결국 민화 속 호랑이들의 표현기법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민화연구상 인정되는 부분이다.
이렇듯 민화에서 호랑이 그림이 갖는 비중과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일반회화사 분야에서 분명히 하나의 흐름과 존재감을 가졌던 호랑이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즉 호랑이라는 화제가 민화의 전유물이 아니며 상당한 양식사적 흐름을 갖고 있는 화제로 오래 사랑받아왔다는 점을, 민화연구에 있어서도 선제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호랑이 민화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
윤열수 관장호랑이의 어원은 한자 호랑(虎狼)에서 유래했으며 순 우리말로 범이라고 한다. 그 외에 영수, 산중호걸 등 수많은 이칭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 속에서 외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호환은 심각한 문제였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호랑이를 극히 친근하게 여겼다. 특히 호랑이의 영험함은 화재, 수재, 풍재를 막아주고, 병난, 질병 기근의 삼재를 막아주는 힘으로 알려졌다. 자연히 호랑이는 벽사와 기복이라는 민화의 의의에 적절히 부합하는 화제였다.

가장 인기 있는 소재 까치호랑이
호랑이가 하나의 도상으로 자리 잡은 역사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적이면서 상징적인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데, 호랑이를 비롯해 당시 주 식량이었던 산짐승과 물고기 등이 표현되어 있다. 한국의 호랑이는 줄무늬의 호랑이와 점박인 표범으로 구분된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역시 이 두 종류의 동물이 모두 나타난다.
삼국 시대 호랑이로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강서대묘의 사신도, 김유신묘 십이지신상군 가운데 부조로 이루어진 호랑이상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강화 가릉에 있는 석호(石虎)의 편안하고 근엄한 인상이 돋보이는데 조선 호랑이 그림에 나타나는 형태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호랑이의 도상적 의미는 회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가 병치레 없이 자라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호랑이 무늬를 수놓은 장식 등이 그 주요 사례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 호랑이는 신수의 영역을 넘어 친근한 존재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특히 익살스럽고 개성 돋보이는 호랑이는 18세기 민화가 흥성하기 이전 일반회회사의 영역에서도 감지되는 변화이다. 민화 호랑이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는 키워드인 해학적 표현도 이미 이 시기에 등장했다.
민화는 잘 알려져 있듯 그 사용목적에 따라 그림의 주제와 형식들이 일정한 틀을 갖고 있다. 화조도, 화조영모도, 호작도, 어해도, 십장생도, 산수도, 문자도, 호작도, 십장생도 등이 다 그러한 목적을 갖고 그려진 그림들이다.
민화 속 호랑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다정한 친구나 동네 어르신과 같은 ‘인격’이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분명 실제의 호랑이는 호환과 인명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맹수이지만 민화 속에서는 이렇듯 양면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민화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소재는 바로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사실 까치호랑이 그림은 그 등장이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풍속에 관련한 문헌인 성현(成俔)의 , 홍석모의 등에서 벽사구복에 관한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월에 대문에 붙이는 그림에는 용과 호랑이를, 부엌문에는 해태, 광문에는 개, 중문에는 닭을 소재로 택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 중 까치호랑이는 용 그림과 함께 대문에 붙였는데, 용은 오복을 집안으로 불러들이고 호랑이는 삼재로 불리는 도병, 징역, 기근을 막아주는 역할로 사랑받았다.
발생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까치호랑이 그림이지만 민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며 해학적, 풍자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특히 구전 민담에는 까치호랑이 그림의 화면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익히 잘 알려진 선비와 호랑이, 그리고 까치의 재판 일화에서도 나오지만 배경으로는 반드시 노송이 등장한다.
이는 민화가 가장 성행했던 조선 후기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힘이 약한 백성의 한풀이로 강한 자를 곯려 주는 속 시원한 내용이 담긴 설화의 주인공이 까치호랑이 속 까치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주장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까치호랑이 그림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그림으로는 가나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 가로 149cm에 세로 36cm인 긴 가로그림이다.
호렵도(虎獵圖)는 호랑이가 사냥하는 그림이 아니라 사냥꾼들, 사냥개와 매를 데리고 호복 차림의 관리들과 함께 광야를 누비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즉 호랑이는 이렇게 사냥을 나서는 사람들의 안위를 비는 동물로 나타나기도 했다.
참고로 호렵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적이기보다는 호복 차림인 경우가 많다. 물론 청나라를 사대의 예로 표현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가하자면 민화의 주제가 되는 우리 민족의 생활방식에서 수렵 자체는 친근한 것이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사례다. 수렵 자체가 일정 이상 관료들의 취미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호렵도가 꾸준히 등장한 것은 그 용맹함을 통해 무관의 무운을 기원하는 용도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랑이는 사냥의 대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작품의 경우에도 호랑이는 사냥꾼에게 달려들거나 저항하지 않는 모습이다.

심성 속에 친근하게 자리 잡은 ‘문화’
호피도와 신산도 역시 호랑이가 등장하는 그림의 주제로 인기가 높다. 먼저 호피도는 호피장막도라고도 불리는데, 호랑이 가죽을 펼친 형태의 그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호피도는 독립된 주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8폭의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장식성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액막이와 벽사용의 의미가 일차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산신도는 온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온갖 공포와 질병으로 마을을 보호하는 당(堂) 신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호랑이는 바로 이 당신의 사자로 그려졌는데 이것이 산신도에서의 호랑이다. 특히 호랑이 자체가 산신으로 숭배되었기 때문에 호랑이 그림 역시 산신당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 경우 호랑이는 법복 입은 노인 형상의 산신과 함께 등장한다.
그 외, 사찰벽화와 부적에서의 등장도 호랑이 특유의 존재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호랑이 자체가 신격화되면서 서낭신, 산신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 특히 수원에 위치한 팔달선원 벽에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 그림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는 폭포가 흐르는 심산, 신비롭게 자리 잡은 노송, 아래 눈을 부릅뜬 호랑이와, 그 호랑이의 시중을 드는 토끼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사실 호랑이의 강한 힘이 다소 부정적으로 나타난 예인데, 호랑이는 여기서 당시 민중들을 괴롭히던 탐관오리, 관료계층을 상징한다. 팔달선원의 벽에 그러진 산신도로서의 호랑이 그림은 그러한 이미지를 표현한 호랑이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호랑이를 친근한 소재로 여겨, 웃음거리로 구현하고 있는 여유로움도 돋보인다.
이렇듯 호랑이 그림은 한국인의 심성 속에 오래 친근함으로 자리잡아온 하나의 ‘문화’다. 이미 오래 전에 화제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아 민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호랑이. 이는 한국인의 독특한 심성, 즉 무서운 것이나 공포스러운 대상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친근한 이미지로 재창조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한민국 국가 상징동물로서의 호랑이

이 항 (사) 한국범보전 기금 대표·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이항교수예로부터 한국인은 호랑이에 둘러싸여 태어나고, 자라고, 기뻐하며 슬퍼하고, 늙고, 죽어 왔다. ‘호랑이와 곶감,’ ‘호랑이와 팥죽할멈’ 등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로부터 단군 신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어린 시절은 호랑이와 함께 한다. 이는 호랑이를 본 적이 없는 최근의 젊은 세대들에까지도 익숙한 패턴이다. 자라면서 한반도 모습의 호랑이 그림에서 호랑이의 기상을 배우고, 까치호랑이 등 호랑이 민화와 그림에서 익살과 해학, 그리고 인생의 멋과 품위를 깨우친다.

한국인의 혼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
호랑이가 나오는 속담은 한국인의 인생관에 있어 하나의 모범적 이미지다. ‘범이 범 새끼를 낳고, 용이 용 새끼를 낳기’ 때문에 우리는 훌륭한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세상 어느 나라 부모보다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에서 개척정신, 도전정신을 배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은 침착함의 가치를 설한다.
물론 호랑이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상징 동물로 채택된 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인은 위와 같은 호랑이와 관련된 가치관 교육을 통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호랑이를 한국인의 혼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건국설화는 곰 토템임에도 말이다. 그 가장 뚜렷한 증거는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호랑이가 선정된 사실이다. 한반도 지도가 종종 호랑이 모양으로 묘사되는 것 또한 한국인이 무의식적으로 호랑이를 닮고자 하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지난 2013년 3월, (사)한국범보전기금이 20대 한국인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작은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생들은 호랑이하면 떠오르는 긍정적 이미지로서 ‘강인하다,’ ‘멋지다,’ ‘용맹하다,’ ‘우아하다,’ ‘위엄 있다,’ ‘신비하다,’ ‘고귀하다’ 등의 형용사를 꼽았다(김영식, 2010. 국가브랜드 구축을 위한 브랜드문양 디자인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이러한 결과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호랑이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한국인의 바람직한 미래상이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한국인만이 유독 호랑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2004년에 애니멀 플래닛(Animal Planet)이라는 위성TV 방송국에서 전 세계인 5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호랑이가 21%의 지지를 얻어 20%를 얻은 개를 제치고 선호도 1위에 등극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돌고래(13%), 말(10%), 사자(9%) 등의 순. 조사 방법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호랑이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동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선호도를 감안한다면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와 관련된 동물 엠블럼으로 십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88서울올림픽 이후 어느 올림픽 개최국도 호랑이를 마스코트로 사용하거나 국가 상징으로 내세우는 나라도 없다. 한국은 호랑이를 국가 브랜드로서 활용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재 한국의 야생에서 호랑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 상징 동물로서 호랑이를 활용하는 데에 큰 결격 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1988년, 같은 조건에서 호돌이는 이미 국가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바 있다. 또, 사자가 영국에 서식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상징하는 동물로 세계인에게 인식되어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범은 호랑이를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
한국호랑이는 현존하는 호랑이의 5개 아종 중 아무르호랑이 아종에 속한다. 아무르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시베리아호랑이라고도 불리나 러시아 내에서 시베리아라고 불리는 곳에는 호랑이의 서식지인 극동러시아 지역이 포함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시베리아는 호랑이의 서식지였던 적이 없다.시베리아호랑이라고 할 경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광활한 동토 시베리아 지역 전체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시베리아호랑이라고 하는 대신, 아무르호랑이 또는 한국호랑이라고 하는 것이 이 아종에 대한 올바른 명칭이 될 것이다.
현존하는 호랑이에는 아무르호랑이, 벵갈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 말레이호랑이, 수마트라호랑이의 5개 아종(subspecies)이 알려져 있다. 그 외 카스피호랑이, 자바호랑이, 발리호랑이 세 아종은 이미 멸절되었고 남중국호랑이는 야생에서 실질적으로 멸절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국호랑이는 아무르호랑이와 같은 아종인가 혹은 다른 아종인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사)한국범보전기금은 최근 일본 동경의 국립과학박물관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던 한국호랑이 두개골과 골격에서 유전자를 추출하여 아무르호랑이와 그 유전자 구조를 비교하였다. 이 호랑이 표본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외국인들이 한반도를 방문하여 호랑이를 사냥하였거나 두개골을 구입하여 본국의 박물관에 기증한 것들이다.
유전자 분석 결과, 두 종류의 호랑이 사이에는 유전적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한국호랑이와 아무르호랑이가 하나의 아종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 즉 한국호랑이가 아무르호랑이이고, 아무르호랑이가 한국호랑이라는 의미가 된다. 아직까지 극동러시아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 살고 있는 400~500마리의 야생호랑이가 바로 한국호랑이 혈통이다. 이 호랑이들이 번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으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면 한반도에 다시 호랑이가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군다나 이 지역에는 호랑이와 더불어 한국의 마지막 표범 50여 마리도 함께 살고 있다.
범은 호랑이(虎)를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표범을 의미하는 표(豹)라는 한자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와 표범을 엄격히 구분 짓지 않았다. 실제로 범이 사라지기 이전의 한반도에는 호랑이와 표범 두 종이 모두 존재하였으며 호랑이보다는 표범의 서식 밀도가 더 높았다. 1915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기록에 따르면, 해수구제 정책에 의해 사살된 호랑이는 97마리인 반면 같은 기간 사살된 표범은 624마리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1392년부터 1863년 사이에 사용된 표피(표범 가죽)의 수는 1490개로 같은 기간 호피의 수 1243개보다 많다. 이로 보건대 아마 우리 조상들은 호랑이보다 오히려 표범과 더 접촉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동물에게는 국경이 없다. 러시아 연해주의 호랑이와 표범이 번성하게 되면 중국과 북한 국경을 넘어 다시 백두산으로 확산될 것이다. 즉 연해주의 호랑이와 표범은 장래 백두산 지역에 호랑이 개체군을 회복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자 씨앗인 것이다.
백두산에 호랑이가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호랑이는 통일 후 대한민국의 명실상부한 상징 동물로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러시아, 북한, 중국 접경지역에 남아 있는 한국호랑이의 희망을 살리기 위한 노력에 호랑이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동참을 기대해 본다.

중국 호랑이 그림 메시지들의 해독

호메이 성 신시내티 박물관 큐레이터
호메이 성 신시내티 박물관 큐레이터중국에서 호랑이는 짐승들 중의 왕으로 여겨진다. 고대 왕조인 상(商, B.C. 1600∼1500)까지 그 기원이 올라가지만 그림의 주제로 완전히 정착된 때로 보는 것은 10세기 무렵으로 본다는 데서 논의는 시작한다.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함축성
중국 호랑이 그림의 시기적 기준이 되는 시기는 송대(960∼1279)이다. 초기 호랑이 그림의 사상적 배경은 중국인들의 음양 사상과 오행설이다. 이 도교 철학적 이론은 호랑이의 정의를 조금 더 새롭게 할 수 있다. 용, 주작, 호랑이, 현무로 구성된 사신수 개념은 한대에 이르는 동안 정립되었다. 이 중 용과 호랑이는 양과 음의 세계를 책임지고 있다. 용이 양, 물[水], 동쪽 등을 의미한다면 호랑이는 음과 불, 서쪽 방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에서도 용과 호랑이는 짝하는 표현으로 종종 등장하게 된다.
송대의 호랑이 그림은 고도로 전문화된 주제로 발전했다. 특히 꼬리가 몸통보다도 더 긴 호랑이의 모습, 그리고 평평한 언덕에 나와 있는 도상 등 의미 있는 주제가 이 시기에 도출되었다. 본 연구자의 발표는 이 시기에 등장한 호랑이의 의미 있는 도상들을 산으로부터 출현하는 모습, 포효하는 모습, 발톱을 핥는 모습,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모습 등으로 분류하였다.
호랑이 그림은 특히 동물의 특성상 정치적인 메시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정치적 메시지는 대부분 유교 경전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명대 호랑이 그림에는 상서로운 도상으로 ‘추우도’가 유행하였는데, 추우는 몸보다 긴 꼬리를 가졌으며 검은 줄무늬를 가진 백호를 가리킨다. 이는 유교 경전인 에 처음 등장한다. 이 경에 의하면 추우는 기존 사나운 호랑이와는 달리 살아 있는 짐승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죽은 짐승만을 먹으며 초원조차도 함부로 밟지 않는다는 다소 과장스러운 설명이 깃든 상상 속의 동물이다.
물론 시경 자체는 오래 된 경전으로 공자도 이를 언급한다. 그러나 추우를 그린 그림은 명대에서야 등장한다. 이는 이 화제 자체가 고도로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등장했기 때문. 당시 황제이던 태종 영락제는 정치적 정당성을 필요로 했다. 명의 건국자 주원장, 즉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그는 남다른 총명함으로 주원장의 총애를 받았지만 장자계승의 원칙에 따라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태조 홍무제 이후 무능한 조정 신하들과 황태자의 실정이 예견되자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축출하고 자신이 황제의 위에 올랐다.

유교 경전으로부터 도출한 정치적 개념
물론 역사적으로 성군의 평가를 받는 영락제이지만 정변을 통해 집권한 만큼 정당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황제의 동생인 주숙이 그의 영지 내에서 백호를 발견했다고 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면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이벤트로 태종 영락제의 즉위가 곧 자비로운 통치와 제국 안정의 상서로운 기운임을 만방에 알리는 데 이용됐다. 추우도는 이러한 정치적 ‘이벤트’를 기념하기 위한 도상이다.
그렇다면 흰 호랑이의 출현은 과연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일까? 본 연구자(호메이 성)가 동물 전문가를 만났을 때 이 호랑이는 알비노 증세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알비노 증세가 있는 개체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 ‘추우’가 혼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웃한 다른 호랑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서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의 두루마리그림으로는 대만국립고궁박물관에 2점이 있다. 하나는 주숙의 정치적 의도를 담은 1404년 작품이며 나머지 하나는 청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호랑이 중국의 호랑이 그림이 갖는 의미 및 도상은 유교 경전으로부터 도출한 정치적 개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의 정치적 사건들에 알맞게 적용되어 권력자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의 이 호랑이 그림은 문인화적 전통, 즉 사상적 배경을 갖춘 사대부들의 여기였음을 생각하면, 이 추우도 등의 정치적 호랑이 그림이 조선의 문인화에 영향을 준 과정도 설명될 수 있다. 또한 그 영향은 시간이 지나며 민간의 민화에도 번져 갔는데, 한국 무위사의 꼬리가 긴 백호 그림은 다름 아닌 추우의 도상과도 닮은 부분이 있다.

 

구성·정리 : 한명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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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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