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명품 민화 히스토리 ② 사찰에 그려진 민화 호랑이

도1 통도사 명부전 좌측 <호작도>, 1890년 Ⓒ통도사성보박물관

보통 민화 까치호랑이는 19세기에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98년 18세기 말 형식화된 까치호랑이 도상이 장경각 사찰벽화에 등장했고 18세기경 제작된 조선 도자기 문양에 표현되어 주목된다. 국가 주도의 관요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주로 왕실에서 사용됐기에 18세기 관요 도자기에 그려진 까치호랑이 문양은 왕실 같은 최상류층에서 애호되었던 길상적 도상임을 알 수 있다. 서민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애호한 까치호랑이 문양을 살펴본다.

글 강영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까치호랑이, 서수에서 길상벽사로

흰색 호랑이 ‘백호’는 불법수호신이면서 신령함과 영험함을 갖춰 성군의 출현을 예시하고 사악함으로부터 왕실을 비호하는 서수瑞獸이다. 까치를 비롯해 장수와 복락을 상징하는 각종 길상의 동식물을 대동하고 화려하게 표현된 민화형 백호는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구현해줄 기복 대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찰벽화가 1890년 양산 통도사 명부전 내벽에 그려진 <까치호랑이>(도1)와 1886년 안동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좌측 외벽에 그려진 <까치호 아 치성을 드린다. 이처럼 이승과 저승의 모든 중생을 보호하고 복을 가져다주는 호랑이는 다양한 길상 상징물과 함께 등장한다. 백호는 부리부리한 큰 눈을 치켜뜨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몸집에 비해 두툼하고 큰 발로 땅을 딛고 있다. 흰 털에 끝이 날카롭고 뾰족한 검은 줄무늬를 묘사해 사나운 기세를 부각시켰다. 호랑이 뒤편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연리목連理木을 배치했다. 전통회화에서 소나무 두 그루 즉 쌍송은 두 배로 청정하며 지극한 덕德을 뜻하고 장수를 의미한다. 이와 달리 연리목은 각자 다른 뿌리를 가진 두 나무가 자라면서 마치 한 나무의 형상처럼 서로 하나가 되는 생태적 특성상 ‘영원한 사랑’, ‘화목한 부부’ 또는 ‘남녀의 사이’를 뜻한다. 똑같이 생긴 두 마리의 까치는 두 배의 기쁨, 불변하는 속성을 가진 바위는 장수,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난초는 자손번창을 의미한다. 대개 난초는 지조와 절개를 지닌 충신과 열녀 등을 상징하지만 뿌리로 빠르게 번식하는 생태와 길고 뾰족한 이파리는 새끼를 많이 낳는 쥐꼬리[鼠尾] 모양을 닮아서 다자다손 즉 자손번창의 상징이 되었다. 그 외 까치호랑이와 같은 벽면에 그려진 매화 랑이>(도3) 등이다. 이들은 모두 1871년 부산 범어사 대웅전 우측벽에 그려진 백호(도2)처럼 소나무 아래서 울부짖고 있다.

도2 부산 범어사 대웅전 우측벽 <백호도>, <매학도>, <송록도>, 1871년 Ⓒ범어사성보박물관

통도사 명부전에 그려진 <호작도>는 백호와 소나무에 앉은 까치로 구성되어 있다. 명부전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시왕과 지옥에서의 구제를 담당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이다. 백호는 이들을 엄호하는 신령스런 신으로 묘사되었다. 대중들은 심판날마다 재齋를 올리면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곳 명부전을 찾와 학, 사슴과 영지, 토끼 등은 신성함이나 품격 등의 면모보다는 장수복락, 다자다손, 부부화목 등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도2, 도3).

도3 안동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좌측벽 <호작도>, <송학도>, <송록도>, 1886년
Ⓒ필자 촬영

안동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외벽에 묘사된 까치호랑이도 살펴보자(도3). ‘응진應眞’이란 존경받고 공경받을 만하다는 뜻으로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며, 이곳에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16나한은 수행을 통해 모든 허물이 사라지고 번뇌가 없이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분으로, 미륵보살이 다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호소하고 불자를 구제하라는 부처님의 명을 받들어 아직 이 땅에 현존한다고 한다. 영산암 응진전은 통도사 명부전처럼 건물 내부와 외부 구석구석에 길상벽사의 상징물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 마치 민화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응진전 외벽에는 백호와 소나무, 3마리의 까치로 구성된 까치호랑이가 묘사되어 있다. 이 외에 학, 사슴, 토끼, 매 등 다양한 길상벽사의 상징물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중 까치호랑이를 가장 거대하고 기운차게 그렸다(도3). 지금은 벽화가 탈락되어 희미하게 보이지만 백호의 위용을 짐작하기에는 충분하다. 소나무를 등지고 포효하는 호랑이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날아오르는 까치를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다만 소나무는 거칠고 엉성하면서도 원근감 없이 그려 평면적으로 보인다. 갈색의 나무들은 가지나 이파리, 거친 껍질이나 움푹한 옹이 표현 없이 몸통만 엉성하게 채색되어 미완성으로 보인다. 그리다 만 듯한 나무의 형태와 채색은 범어사와 봉정사 벽화가 비슷하다. 그 때문에 이들 벽화의 도상이나 양식은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먼저 부산 범어사, 안동 봉정사, 양산 통도사의 까치호랑이 벽화는 같은 주제와 양식을 갖추고 있다. 경상도에 위치한 절의 벽화라는 점에서 지역적으로도 유사하다. 특히 제작 시기도 1871년(범어사 대웅전), 1886년(봉정사 응진전), 1890년(통도사 명부전)으로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일 화가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는 19세기 말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들이 민간에서 유행한 까치호랑이의 제작자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도4 <까치호랑이>, 종이에 담채, 134.6×80.6㎝ Ⓒ국립중앙박물관(동원2613)

새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까치호랑이

근대기 사찰 벽화로 그려진 까치호랑이는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사찰을 찾아 부처님의 가호와 복락을 기원하는 신자들의 예배대상이기도 했다. 반면 관아나 민간에서는 대문에 붙여 집안으로 들어오는 잡귀나 질병 등 재앙을 막아내기 위해 벽사용 그림으로 세화나 문배로 사용했다. 때문에 까치호랑이 도상이 같은 상징성격을 지닌 중국의 민간연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까치호랑이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소나무는 인격화된 식물로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를 상징하는 것 외에도 수령이 길어 ‘장수’를 의미하고 새해 첫 달인 ‘정월正月’을 뜻한다. 호랑이와 혼용해서 쓰인 표범의 ‘표豹’자가 중국어로 ‘소식을 알린다’는 ‘보報’자와 ‘바오’로 발음이 같아 ‘소나무와 호랑이[松虎]’는 ‘정월의 소식’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까치는 한자로 ‘작鵲’인데 보통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온다고 해서 ‘기쁨[喜]’을 뜻한다. 두 마리의 까치는 두 배의 기쁨을 기원한다하여 두 마리로 고착된다. 따라서 이들 한자를 조합하면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를 맞이하여 기쁜 소식을 알린다’라는 뜻이 된다. 그 때문에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까치호랑이> 그림이 중국의 <보희도>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까치호랑이>는 세화의 전형적인 예로 보인다(도4). 이 작품은 제법 크다. 135㎝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의 키 사이즈이다. 작품을 직접 보면 커다란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 같아 순간 멈칫하게 되지만 도상이 형식화, 단순화되어 생동감과 활기는 없다. 화면을 꽉 채운 구성에 호랑이가 뒷발을 들어 소나무를 피하는 포즈가 마치 화면 밖의 적을 막는 듯하다. 까치 두 마리도 도식화되었다. 이 같은 세화용 민화 까치호랑이에서는 백호보다 주로 황호가 그려진다. 사찰벽화에 표현된 백호와 황호는 다른 의미를 지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확히는 알 수 없다’이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사찰벽화의 종류와 단편적인 문헌기록을 통해 이른 시기 백호는 서수로 특수한 공간을 장엄하고 장식되어 종교와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반면 민간에서 애용된 황호는 백호보다 뒤늦게 유행한다. 근대기 사찰벽화 까치호랑이 도상 대부분에서 황호가 백호보다 늦게 유행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도5). 이는 백호가 상상의 동물인 데 반해 황호는 일제강점기에 빈번한 호랑이 사냥 등이 문제가 됐을 정도로 실제 접할 수 있는 현실 생활 속의 동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유행하던 호랑이 관련 설화나 전설, 민담 등이 담긴 동화책이 대거 유행하던 현상이 황호 작업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대개의 황호는 까치를 등지고 포효하며 신령스럽거나 위엄 있는 서수의 형상보다는 고양이 같은 동물처럼 귀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까치와 조우하거나 애완묘처럼 재롱부리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통도사 해장보각 외벽에 그려진 황호는 고양이처럼 앞발을 구부려 땅에 대고 웅크린 자세로 입을 크게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지만 동그란 얼굴과 노란 눈자위는 사나워보이지 않고, 몸에 기계적으로 그려진 줄무늬는 도식적으로 보인다. 소나무 위에 앉은 까치를 보고 으르렁대지만 호랑이 앞뒤로 배치된 까치는 마치 호랑이를 골탕 먹이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도5).

도5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 <까치호랑이>, 1900년 Ⓒ통도사성보박물관

이렇게 까치호랑이가 해학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모된 것은 당대 사찰이 왕실과 상층 지배계층의 기도처로 쓰이던 데서 일반 백성의 구복처와 같이 민중적이고 대중적인 장소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찰은 부처님의 가호를 기원하는 동시에 복락을 기원하는 구복신앙의 장이었으므로 일반 불자들의 정서와 취향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백자 호작문, 가장 오래된 까치호랑이

이제까지 사찰이나 왕실 원당의 벽화로 제작된 까치호랑이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까치호랑이는 벽화로만 제작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보통 민화 까치호랑이는 19세기에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98년 18세기 말 형식화된 까치호랑이 도상이 장경각 사찰벽화에 등장했고 이보다 더 앞선 시기인 18세기경 제작된 조선 도자기 문양에 표현되어 주목된다. 바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가마터인 관요에서 제작한 백자의 문양으로 등장한 것이다. 까치호랑이가 그려진 백자는 사찰벽화보다 이른 시기인 18세기에 제작되어 현존하는 까치호랑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 주도의 관요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주로 왕실에서 사용됐기에 18세기 관요 도자기에 그려진 까치호랑이 문양은 왕실 같은 최상류층에서 애호되었던 길상적 도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인 민화 까치호랑이가 이름없는 화가들의 작품이며 민간에서만 사용됐다’는 잘못된 믿음을 자각하게 한다.

도6 <백자동화호작문호> 18세기, 높이 28.7×폭13.6×바닥 13.5cm , 일본 民藝館
Ⓒ일본민예관소장 한국문화재Ⅱ(국외소재문화재단, 2017)

백자동화까치호랑이항아리

도자기의 이름은 참 복잡하지만 제목 순으로 상징하는 바를 알면 한결 기억하기 쉬울 것이다. 첫 번째에는 청자·백자·분청사기 같은 도자기 종류, 두 번째에는 도자기 장식에 사용한 안료와 장식기법, 세 번째에는 문양, 네 번째는 도자기의 형태를 쓴다. 때문에 <백자동화까치호랑이항아리>는 ‘백자에다 동화 안료로 까치호랑이 문양을 그려 넣은 항아리’라는 뜻이다. 호랑이 문양만 나오는 도자기는 17세기부터 등장하지만 까치호랑이 문양은 일본 민예관 소장 작품이 가장 빠른 예이다(도6). 정면에 동화로 그려진 호랑이는 앞발을 모으고 앉아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 옆을 바라보는 좌호도상으로 호랑이의 줄무늬가 안쪽으로 이어지고, 표범의 동그란 점무늬는 가슴과 배 쪽에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호랑이와 표범 문양이 혼합된 표호문은 당시의 무관 흉배나 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의 호랑이 문양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백자 후면 구연부에서 ‘ㄱ’자 모양으로 꺾여 사선으로 늘어진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까치의 모습은 호작도의 이른 도상으로 여겨진다. 즉 초기 호작도는 호랑이 1마리와 소나무 1그루, 그 위에 앉은 까치 1마리로 단순하게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찰벽화 호랑이 그림 중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판단되는 선암사 장경각 내부에 표현된 호도와 같은 구성이다.

도7 <백자청화호작문호>, 18세기 후반~19세기 초, 높이 42.5×폭 34.5×입 15.5×바닥 16.0㎝,
Ⓒ국립경주박물관

다음의 <백자청화까치호랑이항아리>는 청화 안료로 시문된 까치호랑이다(도7). 원형의 항아리를 네 부분으로 구성해 사방에서 까치호랑이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앞면에는 너른 바위 위에 앉아 있는 호랑이 1마리와 소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치 2마리가 서로 조우하는 모습으로 시문되어 있다. 후면에서는 소나무 가지에 비상하려는 까치 두 마리를 볼 수 있다. 하단에는 사자 한 마리를 배치했다. 호랑이와 사자가 길상벽사의 상징물이기에 도자기의 문양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크게는 앞면에 까치와 호랑이를 뒷면에는 까치와 사자를 묘사했지만 측면에는 항아리의 상하를 가로지르는 긴 소나무를 배치했고 반대쪽 구연부 바로 아래에 둥근 달이 시문되어 있다. 달 아래는 넓게 여백 처리하여 시원하고 담백한 공간을 두었는데 그곳에 까치 한 마리가 유유히 나는 모습을 시문하여 서정성을 더하였다. 18세기 김홍도식 소나무는 하단에서 상단까지 ‘1자’형으로 곧게 올라가다가 구연부 바로 아래에서 양쪽으로 가지를 뻗치는 형태로 구성하였다. 반구형半球形의 백자에 그려진 그림은 사방에서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호랑이와 사자를 전후 혹은 좌우로 나누면서도 그 사이의 나무만 보면 산수화의 일부를 보는듯한 착각이 든다. 이 백자는 사방으로 총 4면의 주제가 각각 다르면서 서로 한 폭으로 조화를 이루는 도상으로 도자의 기형, 유색, 문양과 도상, 양식과 화법에서 일반회화인 19세기 민화 호도의 앞선 사례로 보인다. 때문에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백자청화호작문호>의 기준작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강영주 |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사연구소, 불교문화재연구소 등에서 근무했고,
고려대·세종대·안동대·목원대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미술사연구소 운영위원, 한국민화학회 학술이사이다.


저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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