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사호商山四皓, 바둑으로 소일한 네 신선

도 1 <상산사호도>, 고사인물도 병풍 6폭, 지본채색, 31×61cm, 계명대학교박물관

*도 1. <상산사호도>, 고사인물도 병풍 6폭, 지본채색, 31×61cm, 계명대학교박물관

상산사호商山四皓

노인 네 사람이 바둑판을 두고 앉아 한가로이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상산사호商山四皓’라 하여 진시황秦始皇의 가혹한 정치를 피해 상산으로 들어가 은둔한 네 현인을 그린 것이다. 동원공·녹리선생·기리계·하황공이 네 사람의 이름이다. 이들은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세어 희다는 뜻의 ‘호皓’자를 써서 ‘사호’라 불리었다. 이들은 산 속에 은둔해서는 자줏빛 영지를 캐어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자줏빛 영지는 신선이 먹는다는 선약仙藥이니 상산의 사호는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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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 은군자의 표상

네 노인은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산 속에 들어갔다. 한나라가 세워진 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초빙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고조가 선비를 하찮게 여기고 말도 거칠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고조는 평민에서 일어나 황제가 된 사람으로 선비를 대하는 기술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네 노인은 계속 산 속에 머물면서 자줏빛 영지만을 먹고 살았는데, 그들이 노래한 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무성한 자줏빛 영지, 허기를 달랠 수 있다네 曄曄紫芝 可以療飢” 이 시는 ‘자지가紫芝歌<자줏빛 영지의 노래>’ 또는 ‘채지가採芝歌 (영지를 캐어먹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시로 서진西晉시대 황보밀皇甫謐(215~282)이 은군자隱君子들의 언행과 일화를 수록한 『고사전高士傳』에 실려 있다. 이 시에서는 또한 그들이 부귀영화를 등지고 빈천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한 뜻이 담겨 있다. “네 필 말이 끄는 수레의 높다란 덮개 그 근심 심히 크구나. 부귀하면서 다른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은 빈천하면서 내 뜻대로 하는 것만 못하다네 駟馬高蓋 其憂甚大 富貴之畏人 不如貧賤之肆志”

은군자에서 태자의 보좌역으로

그들이 은둔의 삶을 잠시 접고 세상으로 나오게 된 데에는 한고조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張良의 계책이 한 몫 했다. 한고조는 이미 여후呂后에게서 난 자식인 영盈을 태자로 세운 상태였지만, 그가 총애하는 후궁 척부인에게서 난 여의如意로 태자를 바꾸고 싶어 했다. 이에 안절부절 못한 여후는 장량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나라 안에 덕이 높기로 유명했던 상산의 네 노인을 극진한 예로써 초빙하라는 것이었다. 장량의 말대로 하자, 네 노인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태자의 든든한 후원 세력이 되었다. 하루는 연회가 벌여졌는데 수염과 눈썹이 희고 의관이 위엄 넘치는 네 노인이 태자를 보필하고 있는 것을 본 한고조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몇 년이나 공을 들였지만 끝내 모셔오지 못한 상산의 네 노인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한고조도 태자를 바꾸고자 했던 마음을 접었다. 태자의 교체를 둘러싸고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 자칫 새롭게 시작된 한나라의 국운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상산의 네 노인이 태자에게 힘을 실어준 일은 한나라 초기의 안정에 절대적 힘을 발휘한 사건이었다.

바둑을 두는 노인들

동원공·녹리선생·기리계·하황공 네 노인은 상산에서 바둑을 두며 지냈다. 이들에 대한 동경과 추종은 바둑을 통한 은일의 추구로 그리고 바둑은 은일의 매개체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상산사호도>는 종종 <상산위기도商山圍棋圖>로 불리었고, 네 노인이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계명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상산사호도>(도 1)가 전형적인 도상이라 할 수 있다. 봉우리가 중첩된 깊은 산 속 계곡의 소나무 아래에 네 노인이 바둑에 빠져 있다. 두 사람은 대국을 벌이고 두 사람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수염과 눈썹이 희게 표현된 점이 도상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소나무가 배치된 것은 장수와 탈속을 상징한 것이다. 이 그림은 고사인물도 8폭 병풍 중의 한 폭인데 산수 배경은 수묵으로 인물은 채색으로 그려져 독특한 대조를 이룬다. 근경과 원근의 표현도 충실하고 구불구불한 필선으로 산 주름을 꼼꼼하게 묘사하여 입체감을 살리고자 하는 등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 흔적이 엿보인다.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상산사호도>(도 2)는 좀 더 간략화되었다. 사방에 산봉우리가 배치되어 은거처인 상산의 자연이 표현되었고, 화면의 중앙에 인물과 바둑판이 배치되었는데, 각 경물을 화면에 고루 분산 배치하여 평면적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의 여백에는 시가 적혀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桃顔雪眉翁 복숭아 빛 안색에 눈처럼 흰 눈썹의 노인들,
箇箇天下仙 각기 천하의 신선이네.
靑山玉石落子遲 푸른 산 옥 바둑돌 떨어지기 더딘데,
儲宮消息眞夢外 태자의 소식은 진실로 꿈 밖에 있네.

한가롭게 바둑을 두는 상산의 사호가 신선으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속으로 나가 태자를 보필한 일은 아련하기만 할 뿐이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상옹위기도商翁圍碁圖>(도 3)는 기하학적으로 도식화된 산과 바위의 표현에 자유로운 필치로 인물을 묘사하여 명랑하고 해학적인 특징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바둑 구경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고사인물도 10폭 병풍 중의 <상산사호도>(도 4)에는 상산사호 외에 등장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지게를 등에 메고 도끼를 손에 든 나무꾼이다. 도끼를 든 나무꾼은 왕질王質의 고사와 연결이 된다. 왕질은 육조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어느 날 산에 나무 하러 갔다가 동자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였다. 한 동자가 대추 씨 같은 것을 건네주어 그것을 먹으니 배고픈 줄을 몰랐는데, 바둑 한 판이 끝나 집에 가려고 도끼를 찾으니 자루가 썩어 있었다. 황급히 마을로 내려와 보니 세상이 두 번 바뀌었더라는 이야기이다. 왕질의 바둑 구경을 그린 그림은 ‘나무꾼의 도끼자루가 썩다’의 의미로 ‘초부난가도樵夫爛柯圖’라는 별도의 제목이 있고, 원래는 동자들이 바둑 두는 모습이 원형이었지만,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는 모습으로 전환되어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선이 두, 세명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그림에서처럼 네 명이 그려진 경우 상산사호도와 초부난가도가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둑은 유한한 인간 세계에서 잠시나마 무한한 도에 젖어들 수 있는 신선의 유희였다. 유유자적하고 초탈한 은일자의 삶을 살았던 상산사호는 그 동경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었다.

 

글 : 유미나(원광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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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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