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와 이상향의 관계 탐구 산수화 양식과 개념의 변화

산수화 양식과 개념의 변화

산수화만을 단독으로 구성한 전시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전시,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이 7월 29일부터 열렸다. 산수는 어렵고 따분하다는 편견에 맞서기라도 하듯 박물관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2차례의 학술강연회를 준비했다. 기획의도와 산수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회 차마다 2명의 강사가 다른 주제를 맡았다. 본 기사는 1차였던 8월 20일의 강연을 정리·재구성한 것이며, 2차 강연은 9월 3일에 열릴 예정이다.

2차 강연안내
  • 일시 : 9월 3일(수) 14:00~16:20
  •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
  • 문의 : 02-2077-9000
시간주제강사소속
14:00~14:30전시기획의도와 개관권혜은금요일
14:30~15:20성리학적 이상공간, 구곡도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15:20~15:30휴식
15:30~16:20서양과 근대기 회화의 이상향 김영나국립중앙박물관장

SESSOIN 1. 회화 속의 이상향

홍선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홍선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산수, 신화적 세계와 결합하다

이상향의 대표적인 유형과 변화상을 개관하는 것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우선 이상향이라는 단어가 근대에서 유토피아를 번역하며 생긴 단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서양문물과 사고가 물밀 듯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선경이나 도원, 낙토, 동천 같은 단어들이 쓰였음을 상기시켰다. 즉 우리가 현재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개념이 초기에는 신화적 상상력의 소산이었다는 것. 그 기원을 낙랑군 왕저의 무덤벽화에 그려진 서왕모와 곤륜산에서 찾았다.
산수화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간략화 된 그림의 곤륜산은 뾰족한 나무모양이다. 하늘과 맞닿은 수목형 산수는 실제 경치가 아닌 상상 속 세계다. 수목형 도상은 하늘과 땅의 매개체로서 인간의 영혼이나 소망을 하늘에 닿게 해주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초의 낙원이 산수와 결합했다.

 

여러 유형으로 변형·전래되다

이후 우리의 산수에서는 몇 가지 유형화된 특징이 나타난다. 6세기 말 상서대묘와 백제 산수문전에서 보이는 토산과 암봉의 대비(또는 공존), 노영의 ‘담무갈보살현신도’에서 정선의 ‘금강산도’로 이어지는 뾰족한 각필(깎아지르는 듯한 암벽의 표현), 동천이나 호중천이라고 분지형 종유석 동굴, 북송의 이곽파 화풍의 고려식 수용인 점 찍힌 바위 등이 그렇다. 이들은 현실의 모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양식화된 기법으로 자리 잡아 그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산수는 사신도의 배경이나, 보살이 기거하는 곳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특히 기묘한 동굴 안에 선계가 있다는 관념은 ‘수월관음도’에서 관음이 앉아있는 호중천과, 작은 동굴을 지나가니 낙원이 있었다는 식의 무릉도원으로 풀이되어 전해진다.

 

봄이 오면 도원으로 부활하다

산수화그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 바로 에 나오는 도원 모티브다. 남송시대 도연명이 지은 산문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나라 무릉에 사는 어부가 길을 잃고 복숭아꽃이 떠내려 오는 물길을 따라 숲을 걸었다. 그 길 끝에서 마주한 산에 작은 동굴이 있어 나아가니 본적 없는 낙원이 있었다.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풍경, 즐겁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마을 사람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어부가 돌아온 후에는 아무도 그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천년이 흐른 후 이곳에 다녀온 사람이 있으니 바로 조선의 안평대군이다. 그는 하룻밤 꿈속에 도원을 누비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전하여 그림으로 남기게 했다. 몽유도원도다. 비록 꿈이지만, 누구도 이르지 못하는 선계로 여겨지는 곳을 안평대군이 다녀왔다는 사실은 당시 화젯거리가 되었다. 임금이 통치하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혼자 힘으로 이상향에 도달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평대군은 훗날 도원에 이르는 대신 세조가 된 친형,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어쨌거나 조선에서 도원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도원이 그려졌다고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 강토를 낙원으로 만들자

답답한 현실의 피안처로 이상향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내가 사는 우리 강토를 낙원으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일단은 춘색이 만발한 꽃밭으로 치장했다. 변관식의 ‘도화천’, ‘무장춘색’, 이성길의 ‘무이구곡도’, 이한철의 ‘매화서옥도’와 전기의 ‘매화초옥도’가 그 예. 특히 매화는 추위를 견디고 피는 꽃으로, 힘들고 가난한 선비들의 현실을 미화하고 위로하는 성격을 갖는다. 현상모사가 아닌 현실세계를 이상향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개념이 또 유람이다. 산수는 유람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상향에 실제로 이르고자 하는 욕망은, 현실적인 제약을 탈피해 와유산수를 탄생시켰다. 직접 가지 못하니 아쉬운 대로 그림 속 산수를 유람하는 인물을 그리고, 그 인물에 자신을 대입시켜 그림의 경치를 거니는 것이다.

 

이면의 사상적 배경을 읽다

화첩은 이후로 가면서 문사적인 취향을 그대로 담기도 하고, 계회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양식은 변화하기도 하고 변치 않는 전형을 갖기도 한다. 근대에 이르러 이상향은 향토풍경, 두고 온 고향의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바로 그림의 이면에 담긴, 양식과 도상 뒤에 숨은 사상적 배경이다.

SESSOIN 2. 문인들의 은거와 자연관

조규희 서울대학교 강사
조규희 서울대학교 강사

‘서로 다른’ 이상향을 그리다

동양 철학에 있어서의 산수의 중요성과 이상향에 대한 담론을 모르면 흥미를 갖기 어려운 전시주제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에 초점을 맞춰보자. 과연 그들의 이상향은 제대로 표현되었을까?
앞서 언급한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1447년에 그려졌고, 전시의 첫 작품인 김홍도의 ‘삼공불환도’는 1801년에 그려졌다. 35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을 두고 탄생한 두 작품이다. 산수화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전자는 산수화에 가깝고 후자는 풍속화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표현양식도 하나는 중국풍의 산수화기법을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실경과 사람 사는 모습을 담았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자연의 이치는 곧 임금의 은혜다

혹자는 짧지 않은 세월이 둘 사이에 있으므로,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견해를, 또 다른 사람은 두 화가의 전문분야가 다름을 주목해 의견을 내세운다. 우선 ‘몽유도원도’에 주목해보자. 이 그림이 그려진 세종 대는 조선이 건국한지 얼마 안 된, 그야말로 나라의 기틀을 닦느라 바쁜 시점이었다. 원래 도화원기에서 말하듯 기름진 땅과 평화로운 마을을 그렸을 법한데, 안평대군은 인적 없이 소슬한 풍경을 보았다. 이에 안견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 즉 물회지경을 본 듯하다고 말했다. 일반인의 삶과 동떨어진 세계가 신비롭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인물은 찾아볼 수 없고 거대한 산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런 그림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일명 거비파 산수라고 부르는 이런 양식은 중국의 북송에서 시작했다. 창시자격인 이성, 곽희의 이름을 따 이곽파 양식이라고 하는 거대한 산수는 범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 시대 산수에 대한 담론이 국가와 가정을 경영하는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 산수를 크고(위로는 빼어나고 아래로는 풍만한 모습) 압도적으로 그릴수록 후손이 번영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더 나아가 자연의 이치, 우주적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모두 천자(내지는 임금)가 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상향으로 산수가 자리매김한 것이다.

 

현실화할 수 없는 전원의 꿈을 담다

산수화 양식과 개념의 변화이제 다시 ‘삼공불환도’를 보면 앞서 이야기한 ‘몽유도원도’의 특징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순조 1년에 임금의 병환(수두)이 낫자 경사를 기뻐하는 의미로 유후 한공이 휘하의 벼슬아치들에게 나눠준 계병 중에 하나다.
여러 그림중에 각자 원하는 그림을 갖고 그림에 맞는 화제를 적었는데, 이 그림을 택한 주판은 평소 자신이 꿈꾸던 생활을 묘사한 중장통의 을 썼다. 기름진 밭과 너른 집, 산과 냇물이 있는 살기 좋은 곳에 살며, 수고를 덜어줄 배와 수레를 두고, 심부름하는 이가 있어 힘든 일 없이 한가하고 풍족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예술과 사색을 즐기며, 관직에 나가 책임질 일 없이 오래 살다보면 왕도 부러울 것이 없다는 과 ‘삼공불환도’를 연결해보자. 정자에서는 주안상이 차려지고, 담벽 위에서는 산수를 내려다보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이 세속적인 욕망의 극치로 보인다. 농부가 경작하는 풍속적인 장면도 자신의 장원에서 소출을 누리는 사대부의 권위와 연관되어 보인다. 왕가의 권위를 나타내던 산수가 사대부가의 개인적인 꿈을 이룰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벼슬을 하느라 모든 책임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은둔할 수 없었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자연 속에서 은거하는 꿈을 꿨다.

 

시대적 변화, 모든 것을 바꾸어놓다

결론을 말하자면 임진왜란이 산수의 이상향도 변화시켰다. 왕실의 상징인 법궁(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인 선조가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떠나는 경험을 한 백성들과 사대부들은 동요했다. 이전까지의 성리학적 질서와 이념이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자연은 사라졌다.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려운 꿈을 담았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산수화도 이상향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산수화에서 보이는 이상향과 후기의 이상향은 내용의 차이가 크다. 산수는 이상향의 표현으로써 기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하면서 말이다.

 

글 : 윤나래 기자
사진 :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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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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