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도四獸圖의 백호白虎와 민화 호랑이

도 3. 《선조목릉 천봉도감의궤》(1630) 백호

현존하는 36종의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에는 시간에 따른 도상의 변화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패턴은 조선후기의 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호와 민화 호랑이 그림이 이를 확인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조선 중·후기 호랑이 그림의 변화상을 알기 위해 사수도의 모티프에 새삼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공식적인 주요 행사를 치르고 나면,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의궤儀軌’를 만들었다. 의궤는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이라 부를 만큼 철저한 기록정신이 배어 있는 종합보고서인 셈이다. 그 중의 한 사례가 이 글에서 살펴 볼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이다. 이 의궤는 돌아가신 왕이나 왕후의 국장國葬 행사에 있어 왕릉의 조성과 관련된 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산릉도감의궤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사수도四獸圖라는 독특한 그림이 등장한다. 상상의 동물인 청룡·주작·현무·백호가 산릉도감의궤의 앞쪽에 실렸다. 사수는 현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지만, 백호白虎가 일반적인 호랑이와 생김새가 가장 가깝다. 따라서 백호는 조선후기 민화民畵 속의 호랑이와도 밀접한 연관을 지닌 도상으로 읽힌다. 또한 의궤의 제작 시기가 곧 사수도를 그린 시기가 되므로 백호 그림은 대부분 기년작이 된다. 따라서 사수도는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민화 호랑이 그림과 비교하여 그 변화의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자료이다.
그런데, 이 의궤 속의 사수도가 원래 붙어 있던 곳은 찬궁攢宮이라는 상자 안이다. 국왕이 사망하면 가래나무로 만든 관에 시신을 안치하였고, 이와 별도로 종이와 나무로 찬궁이라는 큰 상자를 만들었다. 장례일이 임박하여 왕릉으로 왕의 관이 도착하면, 찬궁 안에 임시로 안치해두었다. 그리고 화원畵員들이 그린 사수도를 찬궁의 안쪽 동서남북 네 면에 붙였다. 다분히 사자死者의 공간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림 으로 활용되었다. 찬궁에서 관을 꺼내 하관下官한 뒤에는 찬궁을 태워버리므로 사수도도 온전하지 못했지만, 의궤의 앞면에 이를 다시 그려 넣었다. 이것이 산릉도감의궤에 실려 있는 사수도이다. 현존하는 산릉도감의궤는 1630년(인조 8)부터 1926년까지 제작된 36종이 전하고 있어 여기에 실린 백호는 조선후기의 모든 민화 호랑이 그림과 비교의 대상이 된다.

사수도의 기원과 전통

산릉도감의궤에 그려진 사수도의 기원은 6~7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사신四神이 고분의 벽면에 독립된 주제로 그려졌다. 이러한 사신의 형상은 고려시대로 이어졌으나 묘제墓制의 변화에 따라 벽화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신 고려시대의 사신은 묘지명墓誌銘을 담은 석관石棺에 새겨진 형태로 전승되었다. 이후 그 전통은 조선시대로 다시 이어져 ‘사수四獸’로 기록되었다. 이를 실증해 주는 사례가 바로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이다. 사수도는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사신에 대한 사상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렇다면, 사신도의 전승 형태를 백호도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구려 강서대묘江西大墓에 그려진 <백호>는 화염문에 휩싸인 역동감 넘치는 비호飛虎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도 1) 다분히 도교道敎의 성행과 관련된 그림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려시대 묘지명 석관의 백호도 줄무늬, 화염문火焰文, 몸체의 비례 등에서 고구려 백호의 도상과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도 2) 조선시대의 백호는 1630년의 《선조목릉 천봉도감의궤 宣祖穆陵 遷奉都監儀軌》에서 만나게 된다.(도 3) 이 의궤는 사수가 등장하는 현존하는 의궤 가운데 가장 시기가 올라간다. 이 의궤의 <백호>는 형태가 조금 현실화되었으나 여전히 화염문을 달고 있다.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사자死者의 공간을 보호한다는 그림의 원래 기능과 성격은 변하지 않은 듯하다. 장구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삼국시대 그림의 사상과 모티프가 하나의 전통을 이루어 조선 말기까지 지속된 현상은 매우 귀중한 문화사적 궤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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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의궤 백호도의 전형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 가운데 《숙종명릉 산릉도감의궤 肅宗明陵 山陵都監儀軌》(1720년)의 <백호>(도 4)는 18세기 백호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전 시기에 측면의 모습으로 소략하게 그려진 백호와 달리 머리와 앞발이 화면의 앞 공간으로 나왔고, 몸체와 뒷다리가 사선斜線을 이루며 뒤쪽 공간을 점유한 동세로 그려졌다. 이러한 형식의 도상은 《숙종명릉 산릉도감의궤》의 <백호>에 처음 나타나는데, 18세기 이후 약 200년간 지속적으로 그려진 형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호랑이의 표현에 평면적 구성이 아닌 단축법短縮法이 적용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점이다. 앞 시기의 그림보다 표현 수준이 높고, 백호가 공간을 적극적으로 점유하며 그려진 점이 특징이다. 어깨와 뒤쪽 다리에 붉은색 화염문이 다시 들어가 있어, 신비감을 지닌 백호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그 다음 단계에 오는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 산릉도감의궤 貞聖王后 山陵都監儀軌》의 <백호>(도 5)는 앞의 <백호>와 달리 화염과 같은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요소를 모두 떨쳐버렸다. 따라서 더욱 현실감 있는 일반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사수를 현실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자한 당시 조형의식의 반영이자, 18세기 후반기 회화의 시각적 사실성과 관련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사례에 부합되는 화원화가의 그림으로는 김익주金翊冑(1684~?)의 <호도虎圖>(도 6)를 꼽을 수 있다. 김익주의 생년으로 볼 때, 그의 <호도>는 18세기 전반기 작으로 추측된다. 《정성왕후 산릉도감의궤》(1757년)의 <백호>와 비교하면, 호랑이의 동세와 발의 위치, 꼬리의 모양 등에 있어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김익주의 <호도>는 이러한 백호와 비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도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화원화가의 호랑이 그림이 의궤의 백호와 비슷한 형태로 그려진 점은 두 점 모두 당시 호랑이 그림의 시대양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번에는 <백호>의 모습을 초상화의 흉배胸背에 그려진 호랑이와 비교해 보자. 《정성왕후 산릉도감의궤》(1757년)의 <백호>는 1774년(영조 50)의 등준시登俊試 무과합격자들의 초상화첩에 실린 <안종규安宗奎 초상>의 흉배(도 7) 속 호랑이와 매우 닮았다. 그런데, 맹호의 위용을 갖춘 호랑이의 동세로는 단조로운 감이 없지 않다. 영조는 1756년(영조 32) 2월에 신하들과 흉배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흉배의 ‘호랑이’가 마치 ‘고양이’ 같이 해괴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영조가 지적한 그림은 《정성왕후 산릉도감의궤》의 <백호>와 가까운 도상으로 여겨진다. 앞 시기의 《숙종명릉 산릉도감의궤》(1720년)의 <백호>와 비교하면, 1774년에 그린 초상화 흉배의 호랑이는 왜소한 특징을 띠고 있다. 흉배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1756년(영조 32) 영조가 지적한 ‘고양이 같은 호랑이’라는 잔영을 탈피하지 못 한 듯하다. 그러나 백호의 동세는 여전히 앞 시기의 전통을 벗어나지 않았다. 18세기 중엽의 《산릉도감의궤》에 그려진 <백호>의 도상이 같은 시기 초상화의 흉배에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나타난 점이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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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사수도의 백호와 민화 호랑이

산릉도감의궤의 백호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용맹한 이미지는 《정조건릉 산릉도감의궤 正祖健陵 山陵都監儀軌》(1800년)의 <백호>(도 8)일 것이다. 이 그림은 호랑이의 동세에 있어 하나의 기준점을 마련해 준다. 즉 <백호>에는 민화 호랑이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공유한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머리와 앞발이 앞 공간에 놓이고, 몸체가 사선방향을 이루며 뒷다리를 벌린 포즈는 민화 호랑이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까치호랑이>(도 9)가 여기에 해당한다. 앞서 본 <백호>의 기본 형태를 따르면서도 머리의 위치와 표정의 변화가 보다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요소는 민간 화가들의 창의적인 재능과 구성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19세기의 민화 호랑이는 호랑이가 재액을 쫓는 맹수의 이미지에서 기쁨을 가져다주는 까치의 등장과 더불어 또 다른 풍부한 이야기와 상징의 세계로 넘어갔음을 시사해준다.
19세기 중엽의 의궤에 그려진 백호 그림 가운데 몇몇 사례는 민화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철종예릉 산릉도감의궤 哲宗睿陵 山陵都監儀軌》에 그려진 <백호>(도 10)를 주목해 보자. 이 의궤의 <백호>를 앞 시기의 그림과 비교하면, 호랑이 그림으로서의 위용이 드러나지 않고 화격畵格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면 민화를 그린 민간 화가의 그림과 매우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맹수답지 않은 표정, 몸체의 불균형, 어딘가 투박하고 공격적이지 않은 이미지가 19세기 중엽에 그려진 민화 호랑이의 도상을 연상하게 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 사수도를 그린 화원화가가 민화 호랑이풍으로 그렸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화격에 초점을 두기보다 민간 화가의 그림일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철종예릉 산릉도감의궤》에는 사수도를 그린 화가가 조성소造成所 화원畵員인 ‘임우직任友直 등 4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산릉도감의 조성소는 왕릉조성 과정에 필요한 기물이나 건물 축조 등을 담당한 국장도감 소속의 부서이다. 따라서 찬궁도 조성소에서 제작하였고, 찬궁 안에 붙이는 사수도 역시 조성소 화원이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철종예릉 산릉도감의궤》 사수도는 임우직任友直을 비롯한 네 명의 화원 가운데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실명을 밝힌 임우직은 화원이라고 되어 있으나 왕실의 행사와 관련된 다른 의궤에는 전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궁중의 주요 화역畵役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은 인물로 추측된다. 아마도 조성소는 그림을 주로 다루는 곳이 아니었기에 꼭 기량이 뛰어난 화원을 배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임우직이라는 화가는 혹시 민간에서 불러들인 민간 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게 된다.
현존하는 36종의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에는 시간에 따른 도상의 변화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변화의 패턴은 조선후기의 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호와 민화 호랑이 그림이 이를 확인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화원과 민간화가는 같은 시대의 양식 안에서 각자의 조형세계를 추구하였다. 화가의 기량이 다르고 그림의 화격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화원과 민간화가의 그림은 결코 단절된 조형세계로 존재할 수 없었다. 민화의 연구에서 사수도의 모티프에 새삼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 윤진영(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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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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