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도를 중심으로 본 민화의 대중화

봉황도
궁중장식화의 대중화 이끈 신흥부민층

조선시대 궁중미술의 정수를 들라면 단연 궁중회화(宮中繪畵)를 빼놓을 수 없다. 임금이 머물고 국정을 논하는 궁궐의 내부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 의전(儀典)을 중시한 공간이었다. 또한 궁궐은 왕가의 생활공간이기도 하여 각 전각마다 화려하면서도 길상의 의미가 더해진 다양한 장식 그림들로 꾸며졌다. 궁궐의 주요 공간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모란도, 십장생도 등의 화려한 장식화들이 놓임으로써 왕실의 위엄과 궁중회화의 화격을 높였다. 더불어 궁중회화는 왕실의 안위와 번영, 부귀와 장수 등 길상(吉祥)의 의미에도 최상의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의 궁중회화는 궁궐의 높은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통해 궁 밖으로도 전해져 민간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궁중회화는 민간 화가들이 추구한 모방의 대상이 되어 그 저변을 확대해 갔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18세기 후반기부터 등장한 신흥부민층의 증가라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인과 부농(富農), 역관(譯官)과 의관(醫官) 등 전문직 중인들이 신흥부민층에 해당한다. 이들은 궁중으로부터 민간양식으로 전래된 그림의 수요층이 되어 거래를 촉진시켰다. 궁중장식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중심에 이들 신흥부민층과 그들의 수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궁중의 장식화는 어떤 경로로 민간으로 전해지게 된 것일까? 여러 경로 가운데 하나로 궁중회화를 전담하여 그린 도화서 화원들의 매화(賣畵) 활동을 꼽을 수 있다. 궁중에서 생산한 장식화를 궁궐 밖에서 다시 그려 민간에 유통시킨 경우다. 강이천(姜彛天, 1768~1801)이 <한경사(漢京詞)>에서 광통교에 나온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圖畵署) 화원의 솜씨이다”라고 한 대목은 매화의 세태를 그대로 전해준다.
구한말에 그림을 사고파는 유통 공간이 종로와 광통교(廣通橋) 인근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노상에서 그림을 판매하는 좌판에 불과했으나, 점차 점포의 형태를 갖추고 ‘지전(紙廛)’이라는 간판을 내건 곳들이 생겨났다(도 1). 지전은 종이뿐 아니라 고급 서화류를 함께 거래하는 오늘날의 전문 매장과 같은 곳이다. 궁중회화를 재생산한 화원들의 그림은 이러한 유통공간으로 나와서 구매자의 손길을 기다렸다.

다양한 장식문양으로 즐겨 그린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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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의 현장에서 거래된 그림을 구체적으로 한 번 살펴보자. 다양한 화제(畵題) 가운데 편의상 ‘봉황도(鳳凰圖)’를 중심으로 하여 궁중양식과 그것의 민간화(民間化) 과정에 나타난 특징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봉황도를 선택한 이유는 궁중양식으로부터 민간 그림에 이르는 다양한 도상이 남아 있어 그 특징을 자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오동나무에서만 서식한다는 봉황은 고대로부터 길상의 의미를 지닌 서조(瑞鳥)로 알려져 있다. 기린·거북·용과 함께 4령(四靈)의 하나로 여겨졌으며,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 불렀다. 또한 봉황은 공작과 한 세트를 이루며 다양한 장식문양으로 즐겨 그려졌다.
먼저 제1단계로 살펴볼 것은 궁중에서 제작된 봉황도이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에 소장된 봉황도(도 2)는 궁중양식이라 할만한 특징이 뚜렷하다. ‘공작도’와 쌍폭으로 그려진 봉황도는 궁궐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부벽화(附壁畵)로 추측된다. 1802년(순조 2)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수리할 때 ‘대조전 정침(正寢)의 동상방내(東上房內) 북벽에 구추봉도(九雛鳳圖)를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궁궐 내부에 봉황도를 부벽화로 설치한 사례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구추봉도는 암수 한 쌍의 봉황과 새끼 아홉 마리로 구성된 그림을 말한다. 즉 군봉(群鳳)의 상징으로서 다산(多産)과 부부 화합의 의미를 담은 화제(畵題)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의 봉황도에서 봉황과 괴석, 화목(花木) 등에 나타난 섬세한 묘사와 완숙한 색감이 주는 중후함은 궁중화원의 기량이 발휘된 장식화 중에서도 수작(秀作)이라 할 만하다.
제2단계는 화원화가가 궁중양식을 모방하여 그린 그림이다. 온양민숙박물관의 봉황도(도 3)가 여기에 부합되는 사례이다. 형태와 세부 묘사의 정치함, 소재의 구성력, 선묘와 색감의 명징한 표현이 매우 격조 있고 세련된 화풍을 보여준다. 오랜 경험을 쌓은 궁중화원이 궁중양식으로 그려 민간에 유통시킨 그림으로 추측된다. 고위관료나 부호 등 상류층에서 구매한 그림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다음 단계에는 궁중양식의 민간화가 진행되었다. 궁중양식이 민간양식으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주목할 자료는 1880년대 광통교 인근의 그림 가게에 각각 매물로 나왔던 봉황도 2점이다. 이 그림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두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먼저 한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 해군장교 버나도(J.B. Bernadou)는 1885년에 광통교 인근에서 봉황도(도 4)를 비롯한 여러 점의 그림을 구입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 간 뒤 스미소니언(Smithsonian)박물관에 구입품 모두를 기증했다. 1888년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샤를 바라(Charles Varat, 1842~1893)가 역시 광통교로 추정되는 곳에서 봉황도(도 5)를 포함한 여러 점의 그림을 구입하여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각각 구입한 여러 점의 그림 가운데 동일한 양식의 그림이 하나 발견되었다. 바로 여기에 소개하는 2점의 봉황도이다.

형태의 단순화와 크기의 축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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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에 버나도가 구입한 ‘봉황도’와 3년 뒤인 1888년에 바라가 구입한 ‘봉황도’를 비교해 보면, 놀랍게도 같
은 양식의 그림임을 알게 된다. 동일한 화가의 그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두 점의 봉황도에는 각각 그림 상단의 구름과 태양, 오른쪽의 오동나무 둥치, 그 아래에 한 쌍의 봉황과 더불어 아홉 마리의 새끼가 그려져 있다. 간략한 구성이지만, 앞서 본 궁중화원들의 봉황도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이 두 점의 봉황도는 궁중양식에 근거하지만, 형태의 단순화와 크기의 축소가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거칠고 빈틈 많은 그림이라 할 수는 없다. 정통화법을 익히지 않은 민간화가의 솜씨이지만, 신흥부민층의 매물(賣物)로 인기가 높았던 그림으로 추측된다.
버나도와 바라가 각각 구입한 두 점의 봉황도는 1885년에서 1888년까지 3년간이나 서울 광통교 인근에서 제작하고 판매한 그림임이 알려졌다. 즉 같은 장소에서 같은 양식의 그림이 3년간이나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았고, 공급도 충분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봉황도 2점은 19세기 후반기 광통교 인근에서 거래된 민간 그림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림의 구입 시점인 1885년과 1888년은 이 그림의 제작 시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19세기 중엽에 양산(量産)된 봉황도는 외국인이 아닌 내국인의 경우,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구매해 갔을까? 그리고 구입해간 봉황도는 어느 공간에 어떻게 장식하였을까? 아마도 가옥 내부에 봉황도를 장식한 모습은 다음에 소개하는 흑백사진 속의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도 6). 사진에서 보듯이 이 집에는 대청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여닫이문에 봉황도와 같은 그림 한 점을 붙여놓았다. 앞서 본 버나도와 바라의 그림과는 좌우만 바뀌었을 뿐 기본 구성은 매우 유사하다. 소녀가 앞을 가리고 서 있어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화면 위쪽의 구름, 왼편의 나무, 그리고 테두리가 있는 해 그림을 상단에 함께 그려 넣었다. 이와 동일한 구도로 그린 십장생도와 기린도(麒麟圖)(도 6) 등도 그 위치에 함께 호환해 놓을 수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 정제된 고급 안료

버나도와 바라가 구입한 봉황도는 이러한 중산층 가옥의 방문에 붙이는 용도의 문배(門排) 그림이었다. 앞서 본 흑백사진은 구한말 그림가게에서 구매한 한 장의 그림이 중산층의 가정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도 7). 사진은 우리가 각종 도록(圖錄)을 통해서 본 민화 작품들이 원래 어느 계층의 집에, 어떤 공간에, 어떤 모습으로 걸려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가장 실증적인 자료다. 사진 속의 실내 방문에 부착한 그림은 매우 활용도가 높다. 방문을 열어두면, 거실에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고, 문을 닫으면 안방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외출할 때는 문을 닫고 잠그면 그림이 안전하게 보호되는 구조이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의 봉황도를 온양민속박물관의 봉황도와 비교해 보면, 앞의 봉황도는 궁중양식에서 전래된 민화, 형식의 그림이 분명하다. 궁중양식보다 색감이 짙은 편이지만, 색상의 명도는 잘 살아나 있다. 그렇다면 온양민숙박물관의 봉황도를 궁중양식이라 할 때, 이 궁중양식의 근거와 특징은 무엇일까? 궁중양식은 주제에 따라 다르지만 먼저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을 들 수 있다. 특히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의 전통 화법이 잘 남아 있고, 화조화는 밝고 선명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룬다. 또한 일반 화조화에 비해 장식성이 뛰어나고 윤곽과 색감도 선명하다. 또한 정확한 형태감과 섬세한 묘사, 그리고 정제된 고급 안료의 사용은 민간 그림이 넘을 수 없는 궁중양식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확인 가능한 것은 궁중회화의 민간화 과정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간양식의 민화는 또 다른 민간화가에 의해 모방 및 재생산되었다. 개인소장의 봉황도(도 8)는 앞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 본의 계통을 잇고 있으나, 채색의 표현에 청색조가 빠져 있고, 붉은색조만이 남았다. 오동나무와 괴석 부분에는 형태를 단순화시킨 패턴이 드러나 있고, 색감도 명도를 유지하지만 이전 보다 다소 옹색해져 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민간화가의 손을 거쳐 베껴 그려진다면, 아마도 가회민화박물관의 봉황도와 같은 형식의 그림이 될 것이다(도 8).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미숙한 기량을 화면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화면의 구성은 앞의 사례를 따랐지만, 색감이 단조롭고, 형태도 간략하여 장식적인 효과는 크게 반감되었다. 이러한 화격의 차이는 수요층의 차이와 가격의 차이를 동반하며 거래되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기의 지전에는 상류층과 민간을 대상으로 한 그림이 매물(賣物)로 나와 있었다. 상류층에는 고급 궁중장식화가 판매되었고, 중산층을 구매자로 한 민간 그림도 활발히 거래되었다. 궁중장식화와 민화로 구분되는 그림들이 함께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민간화가들 또한 기량의 차이가 매우 현저히 나타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정통 도화(圖畵) 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無名畵家)들은 도화서(圖畵署)나 지전 주변에 머물며 값싸게 거래될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넉넉지 않은 생계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봉황도를 통해 본 민간화가들의 그림은 아무리 소략하더라도 전형을 벗어나지 않았다. 개인소장의 봉황도(도 9)를 보면, 이전의 그림보다 성근 필치가 역력하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깨뜨리지 않았다. 이는 앞 시기 그림의 모방을 통해 ‘화제가 분명한 그림’ 혹은 ‘전통 있는 그림’으로 인정받고자 한 노력의 일면으로 이해된다.

민간 그림, 참다운 민화의 세계 재발견

궁중장식화와 이로부터 파생된 민간 그림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민화’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분류되었다. 궁중장식화와 민화는 그림의 화격, 화가와 수요층, 재료와 색감, 그리고 취향이 다른 그림일수 밖에 없다. 궁중과 민간, 궁중장식화와 민화를 구분해야 하는 당위성과 기준이 이전보다 더욱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두 양식의 그림은 ‘민화’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에 더 이상 병존할 수 없게 된다. 마치 궁중장식화를 서민의 집에 펼쳐 둔다고 민화가 될 수 없고, 민화를 궁궐에 걸어둔다고 궁중장식화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궁중회화와 결별해야 할 순수 민간 그림을 통해 오히려 참다운 민화의 세계를 재발견하게 된다. 특히 약 130년 전 버나도와 바라가 구입해 간 2점의 ‘봉황도’와 같이 완성도를 갖춘 민화에서 민간화가들의 채색취향과 소박하고 진솔한 조형세계를 만나게 된다.

윤진영 profile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선 왕실과 관련된 미술문화를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록을 목적으로 그려진 다양한 자료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화가의 시각과 회화 양식 등 시각문화와 관련된 현상을 인문적 담론으로 조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공저로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 <권력과 은둔>, <한강의 섬>, <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 왕실의 그림>이, 논저로는 「조선시대 계회도契會圖 연구」, 「성주이씨星州李氏 가문家門의 초상화 연구」( 22집) 등이 있다.

 

글 :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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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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