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노학자가 출간한 책거리 연구의 이정표

1970년대부터 선구적인 혜안을 가지고 책거리 그림을 연구해온 케이 E. 블랙이 연구 결실을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책거리에 관한 국내외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과라고 평가받는다. (편집자주)

글 조인수(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최근 책거리 그림의 인기가 날로 치솟는 중이다. 국내외에서 대규모 전시회가 잇달아 열리고, 미술품 경매에서도 최고 낙찰가를 갈아치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책거리에 대하여 두툼한 화집, 그것도 영어로 된 책이 출간됐다. 책 제목은 《CH’AEKKŎRI PAINTING Painting: A Korean Jigsaw Puzzle》, 즉 책거리다.
책거리는 문방청완文房淸玩의 취향을 따르는 각종 기물을 서가에 배치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리었다.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인 18세기부터 왕실을 중심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정조는 궁중 화원 시험에서 책거리를 화제畵題로 하여 그리라고 했으며, 자신의 어좌 뒤에 배치하기도 했다. 중국제 골동품과 서책으로 가득 채운 책거리는 조선 후기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풍조를 잘 보여준다.

저자 케이 E. 블랙(Kay E. Black)

더군다나 명암법과 투시도법을 사용하는 서양화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에는 이를 사면척량화법四面尺量畵法이라 불렀다. 무엇보다도 책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 상류사회 지식계층의 책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옆으로 포개어 쌓은 책이 많이 등장하는데, 화려한 색채와 무늬가 있는 책갑冊匣으로 감싼 중국책과 더불어, 이보다 크며 책갑이 없이 오침선장五針線裝한 조선책을 구별해서 표현했다.
이렇게 책거리는 서양의 눈속임 기법인 트롱프뢰유(Trompe-l’oeil) 기법 및 중국의 다보격多寶格 양식 같은 외래 문물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아울러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동시에 잘 드러나는 그림인 것이다.
이런 책거리의 매력에 푹 빠져서 반평생을 책거리 연구에 몰두한 이가 바로 케이 E. 블랙(Kay E. Black, 1928-2020) 여사다. 그녀는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서 태어났으며, 동부 버몬트의 베닝턴대학에서 수학했다. 1963년에는 남편과 함께 에베레스트 산의 베이스캠프에 올랐는데, 당시로써는 이곳까지 도달한 최초의 서양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 후 홀로 경비행기를 몰고 경주시합에 출전하기도 했을 정도로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던 중 덴버미술관 탐방단의 일원으로 1973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운명을 바꾸게 되는 그림을 만났다. 에밀레박물관 조자용 관장의 소개로 접하게 된 ‘책거리’는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블랙 여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덴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아시아미술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유의 열정으로 책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지 달려간 끝에 150여 점의 자료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버드대학 한국사 교수였던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 2001년 타계)와 공동작업을 통해 1993년에 기념비적인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제목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됐다.

이형록, <책가도> 10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책 p114~115, Figure 13.10)



블랙 여사는 책거리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이형록李亨祿의 정체를 밝혔다. 그의 작품 중에서 숨겨놓은 도장이 있는 것이 국내외에 10여폭 남아 전한다. 마치 문방구의 하나처럼 도장을 여러 개 그리면서, 그중에 하나는 눕혀 놓아 글자가 보이도록 해 놓고 거기에 슬쩍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블랙 여사는 이를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이형록이 유명한 화원 집안 출신으로 그의 조부와 부친도 책거리를 잘 그렸으며, 57세에 이응록李膺祿으로 개명하고, 다시 64세에 이택균李宅均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형록, <책가도> 도장 부분(책 p117, Figure 13.11)

이 책은 블랙 여사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책거리 애호가에게는 필독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녀가 올해 7월 초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출간되어 더욱 뜻깊다.
책에는 책거리의 유래와 형식, 작가와 기법을 구분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커다란 원색 도판을 함께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책거리의 주요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부 도판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향후 책거리 연구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부록으로는 컬럼비아대학 명예교수인 게리 레저드(Gari Ledyard)가 책거리에 등장하는 책의 제목을 목록으로 만들고 이에 대해 친절히 해설한 해제가 곁들여져 있다. 방대하고 충실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으며, 국배판 이상의 중후한 크기에 세련된 장정이 돋보인다.
현대에 책거리를 그리는 작가라면 그림에 이 책을 포함해서 그려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블랙 여사가 이형록의 숨은 도장을 찾아냈듯이, 관람객들은 Ch’aekkŏri Painting이란 제목이 붙은 책을 그림에서 찾아내고 즐거워할 것이다.


조인수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캔사스 대학에서 미술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방문학자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에 관하여

월간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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