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최후의 날’ 상징하는 비운의 성,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

낙화암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도성의 구조는 백마강을 끼고 있는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걸쳐 그 외곽을 나성羅成으로 넓게 둘러싼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사비도성의 중심이 바로 백마강에 잇닿아 있는 부소산성이다.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이 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실로 망국의 한이 서린 유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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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시대 수도 방위의 중심 이룬 백제의 성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흘러간 유행가 가사 속에서도 백제의 옛 서울 부여의 정조는 이처럼 애달프기 그지없다. 같은 달밤이라도 ‘금오산 기슭’에서 바라보는 ‘신라의 달밤’과 백마강변 부소산 기슭에서 바라보는 ‘백제의 달밤’은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그것은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비애간의 차이일 수도 있고, 혹은 꽃다운 삼천궁녀의 죽음과 같은 드라마틱한 전설이 새겨놓은 선입견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부여는 충청남도의 한 도시라기보다는 역사 속 어딘가에 숨어있는 ‘망국亡國의 고도古都’로 먼저 가슴에 다가오는 전설 같은 공간이다.
부여는 옛 왕국 백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이다.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 첫 도읍을 정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세련된 문화를 가꿔가며 발전해 나갔으나 서기 5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세에 밀려 서기 475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며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게 되자 무녕왕武寧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백제 중흥의 기수 성왕聖王은 비운으로 점철된 64년간의 짧은 웅진시대를 청산하고 수도를 다시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인 사비로 옮기면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야심에 찬 장정에 나선다. 이때가 서기 538년, 성왕이 왕위에 오른 지 16년째 되던 해였다.
그러나 ‘역사의 신神’은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몰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믿었던 신라의 배신으로 그 땅을 신라에 도로 뺏기고 만다. 크게 분노한 성왕은 즉각 군사를 휘몰아 신라 정벌에 나섰지만, 도리어 신라군에게 역습을 당해 서기 554년,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었던 관산성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고 만다. 성왕의 원대한 꿈이 이렇게 좌절된 이후에도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무왕武王대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기도 했지만,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으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망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울 무렵에 참으로 어이없게 멸망한 백제는 그런 점에서 ‘비운悲運의 왕국’이라는 진부한 수식어가 결코 지나치지 않은, 그런 나라였다. 백제가 비운의 왕국이라면,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왕국의 멸망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고도古都’이기도 하다.

부소산성, 판축법으로 쌓은 ‘포곡식’ 산성

최근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도성의 구조는 백마강을 끼고 있는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 걸쳐 그 외곽을 나성羅成으로 넓게 둘러싼 형태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부소산은 금강의 줄기인 백마강에 잇닿아 있는 해발 106m의 나지막한 산으로 일반에게는 ‘낙화암’이 있는 산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산이다. 이 산에 약 2.2km 정도의 토성土城을 둘러놓아 흔히 ‘부소산성’으로 불린다. 옛 지명 ‘사비성泗泌城’이 바로 이곳을 말하는 것이다. 수도 방위의 마지막 보루였던 만큼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이 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실로 망국의 한이 서린 유적인 셈이다.
여행 차 부여를 찾았을 때, 많은 이들이 십중팔구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부소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그곳이 옛 성터, 그것도 도읍지인 사비성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유적지라는 사실은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낙화암이나 고란사 같이 유행가에도 나오는 명승지 말고는 이렇다하게 구경거리가 될 만한 번듯한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옛 유적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산성의 흔적은 산허리의 능선을 따라 일부만 길게 이어져 있다. 하지만 토성은 세월이 지나면서 비바람에 깎여 높이도 크게 낮아지는데다 풀과 나무로 덮이게 돼 자연적인 둔덕인지 일부러 쌓은 성벽인지 쉽게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부소산의 성벽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여행객은 구태여 길이 험한 산허리로 접어들어 산성의 흔적을 따라가는 대신 잘 닦여진 큰 길을 따라 전망 좋은 낙화암까지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백제의 흔적을 찾아 애써 부소산성을 찾았다면, 당연히 큰 길을 접어두고 토성의 흔적을 따라 걸어가며 백제의 마지막 날을 지킨 유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부소산성은 수도 방위의 중심 성이기는 했으나, 왕궁을 직접 둘러싼 성이 아니라 유사시를 대비한 피난성避難城이자, 평상시에는 왕실의 휴식처 등으로 이용된 다목적 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은 부소산 남쪽 아래로 이어진 평지에 펼쳐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른바 ‘백제 왕궁지’로 추정되는 이곳 관북리 일대의 평지는 지난 1982년부터 산발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부소산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많은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비단 부소산성뿐만이 아니라 산성의 발굴은 그 어떤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보다 힘이 든다. 무엇보다도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산성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끊임없이 보수되거나 새로운 시설이 덧붙여지기도 하고, 심지어 용도가 변경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무쌍해 애초의 형태를 가려내기가 몹시 어려운 탓이다.
부소산성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동안 부소산성은 산의 정상부에 테를 두른 것처럼 꼭대기 부분을 성으로 둘러싼, 이른바 ‘테메식’과 골짜기를 감싸며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형태의 ‘복합식 산성’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주축이 된 최근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은 ‘포곡식 산성’뿐이고 나머지는 후대에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부소산성은 계곡을 둘러싸 가며 지은 포곡식 산성이라는 것이 최근의 정설인 셈이다.
한편 재료상의 분류로 보면 부소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다. 토성을 쌓는 방법에는 ‘삭토법’, ‘성토법’, ‘판축법’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부소산성은 이중 가장 견고한 축성법인 ‘판축법’으로 쌓은 성이다. 판축법은 나무 등으로 특별히 제작한 틀을 세우고, 그 틀에 따라 점질토와 사질토를 번갈아가며 얇게 다져 튼튼하게 쌓아올리는 공법이다. 규모가 크고 중요한 성에 사용하던 가장 발달된 공법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산성 등 중요한 백제의 토성들이 거의 이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낙화암

백제 마지막 날의 비극 상징하는 전설의 무대

이처럼 부소산성이 백제 최대의 유적지인 것은 틀림없지만, 애석하게도 진짜 백제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토성의 흔적 외에 부소산성 내에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유적으로는 휑한 공터나 다름없는 ‘서복사의 옛 터’. 백제 군인들의 병영지로 추정되는 소규모의 ‘수혈병영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백제와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유적이거나 ‘삼충사’나 ‘궁녀사’와 같이 백제의 이름을 빌어 최근에 지은 상징적인 건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형태가 있는 문화유적은 아니지만, 그나마 옛 왕국 백제의 숨결을 가장 살갑게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는 역시 ‘낙화암’일 것이다. 그 비극적인 ‘백제 최후의 날’에 무려 삼천 명의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 서려있는 전설의 무대이다.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과 맞닿아 있는 높이 약 40m의 자연 절벽이다. 절벽 끝에는 모양 좋은 바위가 흡사 한 폭의 동양화처럼 구비구비 드리워 있고 그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현판을 단 육각형의 정자가 올라앉아 있다. 그러나 이 정자 역시 유서 깊은 유적은 아니고 지난 1929년 이 고장의 한 친목단체가 세운 것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명소가 된 건물이다.
옛 역사책 <삼국유사>에는 낙화암이 타사암墮死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문자 그대로 누군가가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으로 보아서도, 떨어져 죽은 사람이 꼭 3천 명 씩이나 되는 꽃다운 궁녀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군에 쫓기던 궁궐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떨어져 죽었을 법하다. 그 중에는 의자왕이 거느리던 궁녀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낙화암에 서린 이 슬픈 전설은 백제 멸망의 비극을 한층 비장미 넘치는 이야기로 오늘날까지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비극적인 사연과는 아랑곳없이 백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백마강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시야를 가리는 솔가지 사이로 천년을 두고 흘러온 백마강 줄기가 아스라이 들어차고 그 강 여기저기에선 유행가 가사에서처럼 물새도 운다.
부여가 낳은 1960년대 우리 시단詩壇의 우뚝한 봉우리인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현대에 살았던 ‘백제 사람’이었다. 서른아홉 해의 짧은 생애를 바쳐 엮어낸 그의 시편에는 우리가 진작 눈뜨지 못했던 외세의 문제, 분단의 비극, 통일의 당위성 등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유구한 과제들이 뚜렷한 역사인식과 빛나는 언어로 형상화 되어있다.
백제는 신동엽이 그의 시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던 ‘영원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부여는 그 영원의 공간에 따뜻한 피를 흐르게 한 심장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 지니
–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일부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백제교 밑 강변, 유장하게 흐르는 강줄기를 굽어보며 쓸쓸히 서있는 그의 시비 앞에 서면 ‘모든 껍데기는 가라’고 절규했던 그의 맑고 곧은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아, 백제여, 그리고 사비여.

 

글 : 유정서(본지 편집국장)
사진 : 이주용(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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